소리/가곡

노래 <부용산>에 얽힌 60년 사연

조용한ㅁ 2009. 5. 23. 11:41

노래 <부용산>에 얽힌 60년 사연





  부용산 오리 길에 / 잔디만 푸르러 푸르러

  솔밭 사이사이로 /  회오리바람 타고

  간다는 말 한마디 없이 / 너는 가고 말았구나

  피어나지 못한 채 / 병든 장미는 시들어지고

  부용산 봉우리에 / 하늘만 푸르러 푸르러


 박기동 선생은 1917년 여수 앞바다 돌산도에서 태어나 12살 되던 해에 가족과 함께 벌교로 이사를 왔다. 일제하 식민지 현실에 절망하며 청소년 시절을 방황으로 보내기도 한 박기동 선생은 한의사인 부친의 지원으로 일본에 유학, 관서대학 영문과를 졸업했다. 박기동 선생은 대학 시절 영문학을 전공하면서 한편으로 모국어의 소중함을 인식, 우리의 말과 글을 갈고 닦는 시인이 되고자 일찍이 일생의 방향을 정했다.


박기동 선생은 1943년 귀국하여 벌교남초등학교 교사로 있다가 해방을 맞았다. 1946년 광주 서석초등학교 교사, 벌교상고 영어, 국어 교사를 지내고 1947년에는 순천사범 교사로 근무하고 있었는데, 이때 좌파 계열의 남조선교육자협회에 가입, 순천경찰서에 4개월여 구금되고 6개월여 교사직이 정직되었다. 이 6개월은 비운의 노래 <부용산>과 함께 평생 박기동 선생에게 굴레가 되었다.


박기동 선생에게는 천사와 같이 착해 특별히 예뻐하고 아껴왔던 여섯 살 아래 여동생 영애가 있었다. 박영애는 꽃다운 18세에 혼인하였으나, 결혼 몇 년 후 폐결핵에 걸려 순천도립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 순천사범에 근무하던 박기동 선생은 애잔하게 생명의 끈을 이어가던 누이의 병실을 자주 찾아 갔지만, 오빠의 보살핌도 덧없이 누이는 자식 하나 남기지 못하고 1947년 24세의 나이로 저 세상으로 떠났다.


시집 식구 몇몇과 친정 피붙이들만 모인 가운데 쓸쓸한 장례식이 치러지고, 박영애의 시신은 벌교 부근 연꽃 모양을 닮은 부용산 자락에 묻혔다. 박기동 선생은 사랑하는 누이를 부용산 자락에 묻고 오리 길을 걸어 내려오며 그 사무치는 슬픔과 애틋함, 허망함을 못 이겨 한 편의 시를 지으니, 이 시가 <부용산>이다.


1948년 박기동 선생은 누이의 흔적을 지우기라도 하듯 벌교를 떠나 목포의 항도여중(현 목포여고의 전신)으로 전근을 갔다. 당시 항도여중에는 안성현이 음악선생으로 있었다. 안성현 선생은 동경 동방음악대학 성악부 출신으로 피아노를 잘 쳤고, 또 용모도 준수하여 학생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았다. 두 사람은 민족의식이 투철하였고, 예술적 감수성도 통하여 곧 친하게 지내는 사이가 되었다.


그때 항도여중 3학년생으로 김정희라는 학생이 있었다. 김정희는 서울에서 경성사범학교에 다니다가 해방이 되자 고향 목포로 내려와 항도여중에 재학하고 있었는데, 학업성적도 우수한 수재였을 뿐 아니라 문학적 소질이 뛰어나 선생님들로부터 귀여움을 많이 받았다.

 

그런데 1948년 가을, 김정희가 16세의 나이로 갑자기 요절해 버렸다. 김정희를 특별히 아꼈던 안성현 선생이 어린 제자를 추모하며 평소 눈여겨 보았던 박기동 선생의 시 <부용산>에 선율을 입히니, 이 노래가 <부용산>이다. 결국 노래 <부용산>은 박영애, 김정희 두 애잔한 젊은 죽음을 기린 제망매가(祭亡妹歌)이자 제망제자가(祭亡弟子歌)였던 셈이다.

 

1997년 안치환은 신곡 앨범을 내면서 <부용산>을 취입하였는데, 곡 설명에는 ‘작자미상의 구전가요’라고 했다. 안성현 선생이 월북하여 작곡자가 알려지지 않았는데다 작사자인 박기동 선생조차 그 행방을 알 수 없었고, 6.25 때 빨치산이 즐겨 불렀으며 7,80년대 민주화운동 세력들 사이에서만 은밀히 회자되었던 노래였기 때문에 지레 그렇게 생각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부용산에 대해서도, 장흥의 부용산이라는 주장(그러나 이 산은 한자가 다르다), 광양 백운산 부근의 빨치산 근거지였다는 이야기에서부터 엉뚱하게도 지리산의 다른 이름이라는 설 등 그 위치조차 분분하였다. 그러나 이 시에 나오는 부용산은 전남 보성군 벌교읍 근교의 높이 96미터의 산으로, 빨치산이 근거지를 틀고 활동하기에는 너무 작았으므로 애초부터 빨치산과는 관계가 없었다.

   

1998년 박기동 선생의 제자인 경기대 김효자 교수에 의해 노래 <부용산>의 원본이 발굴되면서, 작사자 박기동 선생이 호주에 살고 있다는 것, 작곡자 안성현 선생이 동족상잔의 와중에서 북으로 갔다는 것 등이 밝혀지면서 이 노래에 얽힌 사연들이 하나 둘 확인되기 시작하였다. 안성현 선생은 동경 유학 시절부터 알고 지냈던 무용가 최승희의 권유로 월북했다고 전해지는데, 안성현 선생이 최승희의 남편인 안막의 조카라는 설도 있으나 이는 사실과 다른 것 같다. 안막은 경기도 안성이 고향이고, 안성현 선생은 전라남도 나주시 남평읍 출신이기 때문이다.

 

그 동안 그가 만들었던 11곡의 음악이 담긴 작곡집만 전해져 왔는데, 몇 년 전 안성현 선생의 처조카 성경래씨가 어렵사리 두 번째 작곡집을 발굴했다. 이 작곡집에는 일제 강점기 전 국민이 애창했던 <엄마야 누나야>(김소월 시)를 비롯해 <부용산>, <낙엽>(안성현 작사 작곡), <앞날의 꿈>(조희관 시), <진달래>(박기동 시) 등 민족의 아픔을 희망으로 승화시킨 23편의 노래가 수록되어 있다. 안성현 선생은 2006년 4월 펑양에서 타계했으며, 2009년 4월 나주시 남평에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노래비가 세워졌다.


박기동 선생은 1957년 목포사범학교 국어교사를 끝으로 교직을 떠났다. 1961년 서울로 이주한 그의 가족들은 이루 형언할 수 없는 가시밭길을 걸어야 했다. 늘 감시를 받은 것은 물론 툭하면 가택수색과 연행, 구금을 당해야 했다. 시 <부용산> 중에 ‘피어나지 못한 채 병든 장미는 시들어지고’라는 구절은 박기동 자신의 운명이 돼버린 것이다. 가택수색 등으로 시작(詩作) 노트도 모두 빼앗겨 평생의 소망인 시집 한 권 내지 못했다. 박기동 선생은 부인을 먼저 이승으로 떠나 보내고 한국에선 더 이상 시를 쓸 수도, 시집을 낼 수도 없다는 절망감 때문에 76세에 홀홀단신 호주로 이민을 갔다.


일부 남도 사람들 사이에서만 구전으로만 전해지던 노래 <부용산>이 대중에게 다시 빛을 보이기 시작한 것은 1998년 한국일보 김성우 논설위원이 <부용산>에 얽힌 사연을 한국일보 지면에 2회에 걸쳐 소개하면서부터였다. 이를 계기로 노래가 다시 햇빛을 보기 시작했고, 고향인 목포와 벌교를 중심으로 시와 노래 <부용산>에 대한 여러 행사가 이어지면서 화제를 모았다. 1999년 목포의 ‘부용산 살롱음악회’를 시작으로 벌교 부용산에 정자와 시비(1999년 9월)가 세워졌고, 목포여고 교정에도 ‘부용산 노래비’(2002년 4월)가 세워졌다.

 

노래 <부용산>의 구전에는 진보적 지식인들의 역할이 컸다. 시인 김지하, 김남주, 소설가 천승세, 송영, 황석영, 경제학자 고 박현채, 홍익대 경제학과 교수 고 정윤형,  전 노동부장관 남재희, 전 교통부장관 이계익, 전 연합뉴스 사장 김종철 등이 <부용산>을 애창했다. 그중에서 소설가 송영과 고 김남주 시인의 버전이 가장 정감있게 <부용산>의 애절한 사연을 표현하는 것으로 평가받았다.

 

그리고 7,80년대 학생운동가들이 감옥에서 미전향 장기수들로부터, 또는 이 노래를 알고 있었던 동지들로부터 배워 이후 민주화운동권에 널리 퍼져 나갔다. 빨치산 활동을 했던 미전향 장기수들이 이 노래를 알고 있었고, 가사의 내용이 젊은 아내나 누이들을 집에 두고 입산한 사람들의 애절한 마음을 표현하는 것 같아, 이때까지는 가사의 그 서정성에도 불구하고 <부용산>은 빨치산이 부른, 빨치산의 투쟁가로 알았던 것이다.

 

안치환에 이어 국소남, 한영애, 이동원, 유민 등의 대중가수가, 바리톤 박흥우가 <부용산>을 취입했다. 이들의 노래는 각각의 창법, 음악적 취향과 해석에 따라 특별한 맛을 보였지만, 그 동안 미궁이었던 노래의 사연만큼이나 가사도 조금씩 달리했다. 박기동 선생의 시가 확인된 이후에 취입한 듯 한영애와 이동원의 노래만이 원작과 같았다. 이후 많은 시인들이 다투어 부용산을 자기 시의 소재로 삼았고, 소설가 정도상, 최성각은 <부용산>의 사연을 작품으로 썼다.

 

2002년에 5월 20일 '부용산'이라는 이름으로 박기동 선생의 산문집이 발간되었다. 그때 목포에서 이를 기리는 출판기념회가 있었는데, 박기동 선생도 잠시 귀국해서 그 자리에 참석했다. 그 자리에서 본인이 직접 시 <부용산>을 낭독하였고, 자리의 분위기가 무르익자 참석했던 사람들이 제각기 돌아가면서 자신만의 스타일로 <부용산>을 노래했다. 그때 참석자들의 요청에 따라 박기동 선생도 직접 노래를 불러주었다.

 

  그리움 강이 되어 / 내 가슴 맴돌아 흐르고

  재를 넘는 석양은 / 저만치 홀로 섰네

  백합일시 그 향기롭던 / 너의 꿈은 간데없고

  돌아서지 못한 채 / 나 외로이 예 서 있으니

  부용산 저 멀리엔 / 하늘만 푸르러 푸르러


2003년 
박기동 선생은 호주생활을 청산하고 귀국, 서울에서 살다가 2004년 87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1998년, 호주에 살 때 목포 출신 연극인 김성옥(연극배우 손숙씨의 부군)씨가 찾아와 <부용산>의 2절을 작시해 달라고 권유했다. 한 편으로 완결된 자유시 <부용산>에 정형시처럼 2절을 덧붙인다는 것이 문학적으로는 이상했지만, 박기동 선생은 멀지 않은 죽음을 앞두고 <부용산> 이후 자신의 신산했던 삶을 되돌아보려는 듯 위와 같이 제2절을 작시했으니, 시 <부용산>이 노래 <부용산>으로 마무리되기까지는 50년의 세월이 흘러야 했다. 

 


 (2009년 4월 30일, 노무현 전 대통령이 검찰에 소환되던 날, 한나라당의 보궐선거 0 대 6 참패가 확정되던 날, 오후 7시 경운동에 있는 주점 '낭만'에서 '<부용산> 노래, 누가 누가 잘하나' 대회가 있었다. 소리꾼 임진택의 사회로 진행된 이 대회에서, 남재희 전 노동부장관, 이계익 전 교통부장관, 서상섭 전 국회의원, 임진택 선생, 시인 송상욱, 벌교에서 쪽빛 염색을 연구하고 있는 한광석 선생, 인사동의 주점 '소설'의 염기정 사장 등이 각기 <부용산>을 접하게 된 기이한 사연들을 이야기한 후 <부용산>을 열창했다. 특히 이계익 전 장관은 아코디언으로 <부용산>을  반주하여 분위기를 띄웠다. 임재경 전 한겨레신문 논설위원, 김도현 전 문체부차관, 유광언 전 정무제1차관, 화가 여운 등이 심사(?)를 맡았고, 이두엽 군산대 교수가 전체 기획, 진행을 담당했다. 이 글은 이 대회를 위해 여러 자료를 참고하여 내가 작성했다 - 한겨레신문 2009년 5월 2일자 기사 참조)                                                                 


[출처] 노래 <부용산>에 얽힌 60년 사연|작성자 김학민

 

  

노래   부용산  안치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