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글/시

강연호의 시 모음

조용한ㅁ 2009. 10. 7. 10:03

비단길 2
- 강연호

잘못 든 길이 나를 빛나게 했었다 모래시계는
지친 오후의 풍광을 따라 조용히 고개 떨구었지만
어렵고 아득해질 때마다 이 고비만 넘기면
마저 가야 할 어떤 약속이 지친 일생을 부둥켜안으리라
생각했었다 마치 서럽고 힘들었던 군복무 시절
제대만 하면 세상을 제패할 수 있을 것 같았던
내 욕망의 신록이 지금 때절어 쓸쓸한데
길 잘못 들수록 오히려 무모하게 빛났던 들끓음도
그만 한풀 꺾였는가, 미처 다 건너지 못한
저기 또 한 고비 신기루처럼 흔들리는 구릉이여
이제는 눈앞의 고비보다 그 다음 줄줄이 늘어선
안 보이는 산맥도 가늠할 만큼은 나이 들었기에
내내 웃목이고 냉골인 마음 더욱 시려오누나
따습게 덥혀야 할 장작 하나 없이 어떻게
저 북풍 뚫고 지나려느냐, 길이 막히면 길을 버리라고
어차피 잘못 든 길 아니더냐고 세상의 賢者들이
혀를 빼물지만 나를 끌고 가는 건 무슨 아집이 아니다
한때 명도와 채도 가장 높게 빛났던 잘못 든 길
더 이상 나를 철들게 하지 않겠지만
갈 데까지 가보려거던 잠시 눈물로 마음 덮혀도
누가 흉보지 않을 것이다 잘못 든 길이 지도를 만든다.

 



허미혜
* 감옥 - 강연호

그는 오늘도 아내를 가두고 집을 나선다
문단속 잘해, 아내는 건성 듣는다
갇힌 줄도 모르고 노상 즐겁다
라랄랄라 그릇을 씻고 청소를 하고
걸레를 빨며 정오의 희망곡을 들으며
하루가 지나간다 나이 들수록 해가 짧아지네
아내는 제법 철학적이기까지 하다
상추를 씻고 된장을 풀고 쌀을 안치는데
고장 난 가로등이나 공원 의자 근처
그는 집으로 들어가는 출구를 찾지 못해 헤맨다
그는 혼자 술을 마신다
그는 오늘도 집 밖의 세상에 갇혀 운다
* 바닥 - 강연호

그는 지금 여기가 바닥이라고 생각한다
더는 밀려내려갈 곳이 없으므로
이제 박차고 일어설 일만 남은 것 같다
들끓는 세상이 잠시 식은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지만
갈증은 그런 게 아니다
바닥의 바닥까지 내려가
여기가 바로 밑바닥이구나 싶을 때
바닥은 다시 천길 만길의 굴욕을 들이민다는 것을
굴욕은 굴욕답게 캄캄하게 더듬어 온다는 것을
그는 여전히 고개를 가로 저어보지만
스스로를 달래기가 그렇게 쉬운 게 정말 아니다
그는 바닥의 실체에 대해
오래 전부터 골똘히 생각해온 듯하다
그렇다고 문제의 본질에 가까워진 것은 아니지만
바닥이란 무엇인가
털썩 주저앉기 좋은 곳이다
물론 그게 편안해지면
진짜 바닥은 거기서부터 시작된다
* 행복 - 강연호

이제는 행복해졌느냐는 안부가 그에게 온다
혓바늘이라도 일 것 같은 저녁의 비애 속으로
뚝뚝 떨어지는 질문의 풍경
행복? 그가 낮게 되뇌여보는 입술의 움직임을
귀청이 따라가다 포기한다
별들이 빛나 보이는 건 멀리 있기 때문일까
멀리서는 그 역시 빛나 보일까
생각은 삼십 촉 알전구보다 길게 그늘을 드리우고
한때는 그에게도 서늘한 추억이었을
연애나 정열 같은 것들이
읽다 놓친 신문의 부고란같이 싸늘하다
기를 쓰고 행복해지고 싶었고
어쩔 수 없이 행복해져야 했지만
그는 안부가 숨겨놓은 행간이 문득 궁금해진다
세월은 늘 너그럽지 않았다고
자책인지 불화인지 뚜렷하지 않은 날숨이 터진다
행복이라는 낱말 근처에는
그의 눈시울을 적시는 무엇인가가 어려 있다
그는 이제 주간지의 현란한 고백처럼 텅 빈다
* 비단길 3 - 강연호

멀리 가다 보면 길도 저를 포기하던가
아무렇게나 헝클어지고 드러눕는 길을
달래는 마음이 또한 기댈 곳 없어 비틀거릴 때
지도책에 힘겹게 매달려 있던 낯선 지명들도
철 지난 이파리마냥 우수수 떨어져내린다
國道 여기서 미련없이 끊겨 버스 지나가면
흙먼지 뽀얀 기다림이 자갈마저 튕겨 날리지만
아무도 내리지 않는다, 하기는 정류장이랬자
표지판 하나 없는 미포장도로에
누구라도 멈춰 서기는 쉽지 않은 법이다
삶의 뒷덜미를 낚아채며 날은 저물고
오늘 안으로 약속해 놓은 목적지도 없는데
막차 끊어지기 전에 타기는 타야 할 것만 같은
알 수 없는 조급함이 물결 친다, 너 역시 가야 할
어떤 定處를 미리 새겨두었다는 걸까
보퉁이 짊어진 어둠이 먼저 다복솔로 기어
어디론가 부지런히 퍼져간다
네가 자는 잠이 언제나 새우잠이듯
네가 기다린 건 오랜 습관일 뿐
무엇을 기다렸는지조차 모를 세월 흐르도록
아무도 돌아오지 않아서 이제 너도 가야 한다
기억한다면, 철든 짐승처럼 터벅터벅 걸어
아무도 돌아오지 않는 길을 너는 돌아와야 한다
* 비단길 2 - 강연호

잘못 든 길이 나를 빛나게 했었다 모래시계는
지친 오후의 풍광을 따라 조용히 고개 떨구었지만
어렵고 아득해질 때마다 이 고비만 넘기면
마저 가야 할 어떤 약속이 지친 일생을 부둥켜안으리라
생각했었다 마치 서럽고 힘들었던 군복무 시절
제대만 하면 세상을 제패할 수 있을 것 같았던
내 욕망의 신록이 지금 때절어 쓸쓸한데
길 잘못 들수록 오히려 무모하게 빛났던 들끓음도
그만 한풀 꺾였는가, 미처 다 건너지 못한
저기 또 한 고비 신기루처럼 흔들리는 구릉이여
이제는 눈앞의 고비보다 그 다음 줄줄이 늘어선
안 보이는 산맥도 가늠할 만큼은 나이 들었기에
내내 웃목이고 냉골인 마음 더욱 시려오누나
따숩게 덥혀야 할 장작 하나 없이 어떻게
저 북풍 뚫고 지나려느냐, 길이 막히면 길을 버리라고
어차피 잘못 든 길 아니더냐고 세상의 賢者들이
혀를 빼물지만 나를 끌고가는 건 무슨 아집이 아니다
한때 명도와 채도 가장 높게 빛났던 잘못 든 길
더 이상 나를 철들게 하지 않겠지만
갈 데까지 가보려거든 잠시 눈물로 마음 덥혀도
누가 흉보지 않을 것이다 잘못 든 길이 지도를 만든다
* 세상의 모든 뿌리는 젖어 있다 - 강연호

문득 떨어진 나뭇잎 한 장이 만드는
저 물위의 파문, 언젠가 그대의 뒷모습처럼
파문은 잠시 마음 접혔던 물주름을 펴고 사라진다
하지만 사라지는 것은 정말 사라지는 것일까
파문의 뿌리를 둘러싼 동심원의 기억을 기억한다
그 뿌리에서 자란 나이테의 나무를 기억한다
가엾은 연초록에서 너무 지친 초록에 이르기까지
한 나무의 잎새들도 자세히 보면
제각기 색을 달리하며 존재의 경계를 이루어
필생의 힘으로 저를 흔든다
처음에는 바람이 나뭇잎을 흔드는 줄 알았지
그게 아니라 아주 오랜 기다림으로 스스로를 흔들어
바람도 햇살도 새들도 불러모은다는 것을
흔들다가 저렇게 몸을 던지기도 한다는 것을
기억한다, 모든 움직임이 정지의 무수한 연속이거나
혹은 모든 정지가 움직임의 한 순간이듯
물 위에 떠서 머뭇거리는 저 나뭇잎의 고요는
사라진 파문의 사라지지 않은 비명을 숨기고 있다
그러므로 글썽한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아도
세상의 모든 뿌리가 젖어 있는 것은 당연하다
* 마음의 서랍 - 강연호

이제는 완전히 지워버렸다고 자신했던
아픈 기억들 바늘처럼 찔러올 때
무수히 찔리면서 바늘귀에 매인 실오라기 따라가면
보인다 입술 다문 마음의 서랍
허나 지금까지 엎지르고 퍼담은 세월 적지 않아서
손잡이는 귀가 빠지고 깊게 패인 흠집마다 어둠
고여 있을 뿐 쉽게 열리지 않는다
도대체 얼마나 뻑뻑한 더께 쌓여 있는 걸까
마음의 서랍 그저 바라보기만 해도 힘에 겨워
나는 어쩔 줄 모른다 거기 뒤죽박죽의 또 한 세상
열면 잊혀진 시절 고스란히 살고 있는지
가늠하는 동안 어디에선가 계속 전화벨이 울려
아무도 수신하지 않는 그리움을 전송하는 소리 적박하다
나야, 외출했나보구나, 그냥
걸어봤어, 사는 게 도무지 강을 건너는 기분이야,
하염없이 되돌아오는 신호음에 대고 혼자 중얼거리듯
우두커니 서서 나는 마냥 낯설기만 한
마음의 서랍 끝내 열어보지 못한다
아무래도 외부인 출입금지의 팻말 걸린 문 앞에
서성대고 있다는 느낌이다 아니 그보다는
대낮에도 붉은 등 켜고 앉아 화투패 돌리며
쉬어가라고 가끔 고개 돌려 유혹하는 여자들의 거리에
와 있는 것만 같아 안절부절이다 순정만화처럼
고만고만한 일에 울고 웃던 날들은 이미 강 건너
어디 먼 대양에라도 떠다니는지
오늘 풍랑 심하게 일어 마음의 서랍 기우뚱거리면
멀미 어지러워 나도 쓸쓸해진다 언젠가
뭘 그렇게 감춘 것 많냐고 속 시원히 털어놓으라고
나조차 열어보지 못한 마음의 서랍
우격다짐으로 열어본 사람들 기겁하여 도망치며 혀차던
마음의 서랍은 서럽다
* 상처 - 강연호

밑바닥 상처는 고요한 법이라고
나 어느 날 무심코 중얼거렸네 강물 위
빗방울에 흔들리는 무수한 파문처럼
사소하게 가슴 다치면서 살아왔는데
하지만 그것도 아파서 자주 엄살 떨었는데
저 파문 이는 강물의 표면
한없이 부드러운 물살도 제 힘 다해
빗방울 튕겨내는 걸 보았네
깊은 속내까지는 덧내지 않으려
멈칫멈칫 맺혔다 풀리는 동심원을 보았네
이 사내 저 사내 다 받아주는 작부의 자궁 속에도
딱딱한 각질처럼 굳은 순정 하나는 있어
열리지 않고 끝내 고요하리라
나는 너무 쉽게 가장했나 보네
돌아보면 한 뼘도 못 되는 길을 걸어오면서
상처 아닌 상처를 들쑤셨더랬네
그 길의 상처에 빚 갚을 일 많았네
나 어느 날 강물 위 무수한 파문을 따라가다
무심코 중얼거림에 걸려 넘어졌지만
가슴 밑바닥 돌쩌귀처럼 박힌 상처는
꿈쩍도 않고 고요했네 이상하게
하나도 아프지 않았네
* 작은 배가 있었네 - 강연호

그대 데불고 간 세월의 강을 따라
나 흘러가지 못했네

어쩌면 그리움 어쩌면 외로움 같은 것들이
사실은 견딜만한 거 아니냐며 뒷덜미 잡아채는

붉은 신호등에 걸려 멈춘 그때부터
건널목 이쪽에서 신호 바뀌길 기다리는 동안
서슬 시퍼런 강물 출렁일수록
얼마나 많은 슬픔이 나를 에워싸는지
나 일찍이 철없어 헤아리지 못 했네

그대 이미 물결에 떠밀려 보이지 않았지만
우리가 만나 나누었던 사랑이나 눈물
혹은 희미한 추억의 힘만으로도
능히 따라잡을 수 있으리라 객기 부렸네

어차피 한번은 다쳐야 할 상처라며
그대 데불고 간 세월의 강물
말라붙도록 움키고 또 움키었지만
언젠가는 나도 흘러가야할 물결이라며
그동안 밥 잘 먹고 건강하려 애썼지만
이직도 나를 멈춰 세운 붉은 신호등 바뀌지 않고
건널목 이쪽에서 나 마냥 기다렸네
기다리다 늙어버렸네

사람들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나 세상을 구경했네
* 개미 - 강연호

절구통만한 먹이를 문 개미 한 마리
발 밑으로 위태롭게 지나간다 저 미물
잠시 충동적인 살의가 내 발꿈치에 머문다
하지만 일용할 양식 외에는 눈길 주지 않는
저 삶의 절실한 몰두
절구통이 내 눈에는 좁쌀 한 톨이듯
한 뼘의 거리가 그에게는 이미 천산북로이므로
그는 지금 없는 길을 새로 내는 게 아니다
누가 과연 미물인가 물음도 없이
그저 타박타박 화엄 세상을 건너갈 뿐이다
몸 자체가 경전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저렇게
노상 엎드려 기어다니겠는가
직립한다고 으스대는 인간만 빼고
곤충들 짐승들 물고기들
모두 오체투지의 생애를 살다 가는 것이다
그 경배를 짓밟지 마라
* 산수유 마을에 갔습니다 - 강연호

지리산 산동 마을로 산수유 사러 갔습니다
산동 마을은 바로 산수유 마을이고
그 열매로 차를 끓여 마시면 이명에 좋다던가요
어디서 흘려들은 처방을 핑계 삼았습니다만
사실은 가을빛이 이명처럼 넌출거렸기 때문입니다
이명이란, 미국 같은 귓바퀴가 소리의 출구를
봉해버린 것이지요
내뱉지 못한 소리들이 한꺼번에 귀로 몰려
일제히 소용돌이치는 것이지요, 이 소리도 아니고
저 소리도 아니면서
이 소리와 저 소리가 한데 뒤섞이는 것이기도 하구요
어쨌거나 이면은 이명이고 산수유 열매를 입에 넣어
하나하나 씨앗을 발라냈다던가요
산수유, 하고 입 안에서 가만가만 굴글려보면
이명이란 또한 오래 전 미쳐 못 다란 고백 같은
것이어서 이제라도 산수유 씨앗처럼 간곡하게
뱉어낼 것도 같았습니다
그래서 붉은 혀와 잇몸 같은 열매가 간절했답니다
어쩌면 이명이 낫는 대신, 지난 봄의 노란 꽃잎마냥
눈이 환해지거나
열매처럼 붉은 목젖이 자랄 수도 있었겠지요
마을은 한참 산수유 열매를 따서 널어 날리는
중이었습니다
씨앗을 들어낸 뒤 마당이나 길바닥에 펼쳐진 열매들은
넌출거리는 가을 빛에 쪼글쪼글 말라가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문득, 장롱에 차곡차곡 개켜 넣은
철 지난 옷가지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일처럼
서글펐답니다
이제 돌아가면 오래 전의 쑥뜸 자국 같은 한숨 한 번
몰아쉰 뒤 이명보다 깊은 잠들 수 있을는지요

산수유 사러 산수유 마을에 갔습니다
* 적멸 - 강연호

지친 불빛이 저녁을 끌고 온다
찬물에 말아 넘긴 끼니처럼
채 읽지 못한 생각들은 허기지다
그대 이 다음에는 가볍게 만나야지
한 때는 수천 번이었을 다짐이 문득 헐거워질 때
홀로 켜지는 불빛, 그 어떤 그리움도
시선이 닿는 곳까지만 눈부시게 그리운 법이다
그러므로 제 몫의 세월을 건너가는
느려터진 발걸음을 재촉하지 말자
저 불빛에 붐비는 하루살이들의 생애가
새삼스럽게 하루뿐이라 하더라도
이 밤을 건너가면 다시
그대 눈 밑의 그늘이 바로 벼랑이라 하더라도
간절함을 포기하면 세상은 조용해진다
달리 말하자면 이제는 노래나 시 같은 것
그 동안 베껴썼던 모든 문자들에게
나는 용서를 구해야 한다
혹은 그대의 텅 빈 부재를 채우던
비애마저 사치스러워 더불어 버리면서
* 폐가 - 강연호

이 집에서 마지막으로 밝힌 불빛은
근조등이었다고 한다 나는 부의금도 없이
이곳에 왔으므로 슬픔을 기대하지는 않는다
너무 늦었다는 생각도 없다
대체로 인사치레의 조문이 아니라면
상가에서 정작 만나고 싶은 사람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닌 사람인 것이다
죽은 사람이 그저 죽은 사람이듯
떠난 식솔들 역시 기다리지 않았으리라
한때 이곳에 쥔 붙였던 육신을 따라
빈집은 흙으로 돌아가고 있는 중이다
창살과 문설주가 아직 버티는 것은
한꺼번에 무너지기 위한 악다구니일 뿐
햇살이 빈집의 서까래를 들쑤신다
언젠가는 저 햇살의 무게조차 견디지 못해
폭삭 주저앉고야 말 것이다
나는 곡비가 아니어서 울지 않는 게 아니다
어떤 숨죽인 물음도 헛되이
빈집은 녹슨 못처럼 고요를 구부러뜨린다
나는 다만 밥 짓는 냄새를 그리워하는 것으로
간곡한 예를 올리고 돌아설 뿐이다
* 지긋지긋이 지극하다 - 강연호

지긋지긋한 게 어디 세 끼 밥 먹는 일뿐이랴
다들 별고 없다는 안부조차 지긋지긋해질 때
세상은 어디 국경이라도 넘어 보라는 듯 고요하다
쓸 만한 사람은 죄다 넘어갔다던 시절이 있었지
쓸 만해서 그들이 건너간 게 아니라
넘어가서 쓸 만해진 것 아닐까
지긋지긋하다는 것은 간절하다는 것
깊은 고요는 못 이룬 열망을 감추고 있다
세월은 여전히 고봉밥처럼 지긋지긋을 퍼담겠지만
비손은 부질없어야 더욱 빛나는 법이다
간절한 비손이 허드렛물을 정화수로 바꾸듯이
지긋지긋이 모여 삶은 지극해진다
모월 모일 어디 국경이라도 넘어보라는 고요 속
삼가 지긋지긋한 밥심으로 쓴다
지긋지긋이 지극하다
* 건강한 슬픔 - 강연호

그녀로부터 전화가 왔다
오랜만이라는 안부를 건넬 틈도 없이
그녀는 문득 울음을 터뜨렸고 나는 그저 침묵했다
한때 그녀가 꿈꾸었던 사람이 있었다 나는 아니었다
나도 그때 한 여자를 원했었다 그녀는 아니었다
그 정도 아는 사이였던 그녀와 나는
그 정도 사이였기에 오래 연락이 없었다
아무 데도 가지 않았는데도 서로 멀리 있었다

전화 저쪽에서 그녀는 오래 울었다
이쪽에서 나는 늦도록 침묵했다
창문 밖에서 귓바퀴를 쫑긋 세운 나뭇잎들이
머리통을 맞댄 채 수군거리고 있었다
그럴 때 나뭇잎은 나뭇잎끼리 참 내밀해 보였다
저렇게 귀 기울인 나뭇잎과 나뭇잎 사이로
바람과 강물과 세월이 흘러가는 것이리라
그녀의 울음과 내 침묵 사이로도
바람과 강물과 세월은 또 흘러갈 것이었다

그동안을 견딘다는 것에 대해
그녀와 나는 무척 긴 얘기를 나눈 것 같았다
아니 그녀나 나나 아무 얘기도 없이
다만 나뭇잎과 나뭇잎처럼 귀 기울였을 뿐이었다
분명한 사실은 그녀가 나보다는 건강하다는 것
누군가에게 스스럼없이 울음을 건넬 수 있다는 것
슬픔에도 건강이 있다
그녀는 이윽고 전화를 끊었다
그제서야 나는 혼자 깊숙이 울었다
* 9월도 저녁이면 - 강연호

9월도 저녁이면 바람은 이분쉼표로 분다
괄호 속의 숫자놀이처럼
노을도 생각이 많아 오래 머물고
하릴없이 도랑 막고 물장구치던 아이들
집 찾아 돌아가길 기다려 등불은 켜진다
9월도 저녁이면 습자지에 물감 번지듯
푸른 산그늘 골똘히 머금는 마을
빈집의 돌담은 제풀에 귀가 빠지고
지난 여름은 어떠했나 살갗의 얼룩 지우며
저무는 일 하나로 남은 사람들은
묵묵히 밥상 물리고 이부자리를 편다
9월도 저녁이면 삶이란 죽음이란
애매한 그리움이란
손바닥에 하나 더 새겨지는 손금 같은 것
지난 여름은 어떠했나
9월도 저녁이면 죄다 글썽해진다

『세상의 모든 뿌리는 젖어 있다』, 문학동네
* 허구한 날 지나간 날 - 강연호

아무도 오지 않는다
허구한 날 내 마음의 공터에는
혼자 놀다 심심해진 햇살
곰곰한 생각에 지쳐 그늘 키우고
기다리는 일 많으면 사람 버리기 십상이라며
귓바퀴에 잠시 머물던 바람결 총총히 사라진다.

저 햇살 저 바람도 저녁이면 돌아갈 집이 있는가
고개 갸우뚱하면 침착하게 낙법을 연습하던 나뭇잎 몇 장
내일 또 오마는 약속처럼 어깨에 얹힌다

삶이란 이런 거다
건너편 아파트 베란다에 널렸다 걷히면서
다시 더러워질 결심을 바투 여미는 흰 빨래의 반짝임 같은

세월아, 갈기갈기 찢기고 늘어진
하품에 지쳐 나는 너에게 줄 그리움이 없는데
너는 손 벌리고 자꾸만 손 벌리고
사진틀 속에 흑백으로 갇힌 날들이 파닥거린다

더러 지나간 날들이 예쁘게 이마 짚어주지만
아무리 기억의 초인종을 신나게 눌러도
그때, 그 들길, 첫 입맞춤
풀잎 풀잎 풀잎, 서걱서걱 서투르다며 흉보던 날들은
이제 더 이상 여기에 살지 않는다
텅 빈 우편함에는 수취인 불명의 먼지만 쌓여갈 뿐

내 한 번도 같이 놀자고 한 적 없는
세월아, 내가 언제 숨바꼭질 하자 했니?
그것도 모자라서 세월아
왜 나만 술래 되어야 하니?


 

'아름다운글 > '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자작나무/ 안도현  (0) 2009.10.09
데쟈뷰/강연호  (0) 2009.10.07
그대를 향한 내 마음은/제이미 딜러레  (0) 2009.10.07
처음부터 혼자였어 /석암  (0) 2009.10.06
겨울밤/이채  (0) 2009.1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