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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글/수필.기타

백 편을 쓰고 아흔아홉 편을 버릴 줄 알아야...

백 편을 쓰고 아흔아홉 편을 버릴 줄 알아야...
서정춘 선생님께서 현대시학 신인상 심사를 마친 뒤에 남기신 말씀입니다.
(현대시학 2004년 10월호)

* * *

많은 작품들이 아쉬움을 남기고 아슬아슬 떨어져 나갔다.
이들 모두가 시정신으로서의 장인정신에 많이 게을렀던 것으로 보인다.
바늘 끝으로 찍어 벼룩을 잡아버리겠다는 우직하면서 치열한 시정신, 그것이 장인정신이다.
긴장과 절제를 잃으면 시는 멀리 튀어버리는 벼룩의 생리를 닮아 있다.

고려 때, 백운거사 이규보는 동국 이상국집에 다음과 같은 글을 남긴다.


어려운 글자를 쓰기 좋아해서 남을 쉽게 현혹하려 했다면
이것은 함정을 파놓고 장님을 인도하는 체격이다.
사연은 순탄하지 못하면서 끌어다 쓰기를 일삼는다면
이것은 강제로 남을 내게 따르게 하려는 체격이다.
속된 말을 많이 쓴다면
이것은 시골 첨지가 모여 이야기하는 체격이다.
기피해야 할 말을 함부로 쓰기를 좋아한다면
이것은 존귀를 침범하는 체격이다.
사설이 어수선한대로 두고 다듬지 않았다면
이것은 잡초가 밭에 우거진 체격이니,
이런 마땅치 못한 체격을 다 벗어난 뒤에야
정말 더불어 시를 말할 수 있다.
남이 내 시의 병을 말해 주는 이가 있으면 기쁜 일이다.
그 말이 옳으면 따를 것이고 옳지 않아도 내 생각대로 하면 그만인데,
하필 듣기 싫어해서 마치 임금이 간함을 거부하여 제 잘못을 모르듯이 하리요.
무릇 시를 지었다면 반복해서 읽어보되,
내가 지은 것으로 보지말고,
다른 사람 또는 평생에 제일 미워하던 사람의 작품처럼 여겨
덜되고 잘못된 것을 찾아 보아서 찾을 수 없을 때 내놓아 발표할 것이다.


낙선자들이여,
시 백 편을 쓰고 아흔아홉 편을 버릴 줄도 아시라.
나머지 한 편 한 편으로 주춧돌을 놓겠다는 각성이 있어야 하겠다.
더욱 분발할 일이다.
나도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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