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를 좋아하고 바다와 섬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이생진 시인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이생진 시인을 생각하면
우리는 먼저 섬이나 바다를 생각하게 된다.
그것은 그만큼 이생진 시인이
섬이나 바다에 관한 시를 많이 썼다는 말도 되지만
우리 나라를 사랑하고 섬을 사랑한다는 말과도 같다.
이생진 시인이 섬이나 바다에 관한 시를
직접 낭송하는 것을 보고 듣노라면 울컥 눈물이 솟는다.
시인의 섬 사랑이야말로 숙연한 마음까지도 가지게 한다.
그런데...
이런 이생진 시인이 또 좋아하는 것이 있다는 사실을
연전에 부산 해운대 달맞이고개에 있는
김성종추리문학관에서 열린 시 낭송회에서 비로소 알게 되었다.
자필 시로서도 유명하지만 다름아닌 '황진이'와 '반 고흐'였다.
'황진이'와' 반 고흐'에 대한 시를 낭송할 때의
그 열정적이고 진지한 모습.
물론 다른 시를 낭송할 때도 늘 그러하지만
특히 이 두 사람에 관한 시를 낭송할 때는
엄숙한 기운마저 감돌고 있음을 느끼고
가슴이 싸아하게 저미어옴을 느낀 것은
비단 나만의 감상일까.
구구한 억측으로 시인의 '진이' 사랑과 '고흐' 사랑을 논하진 말자.
그들 '진이'와 '고흐'가 살아온 삶과 예술 혼을 살펴보고
그들의 삶을 조금이라도 이해를 할 수 있으면
이생진 시인의 그들 사랑에 대한 깊은 뜻과
불우한 환경에서 예술의 혼을 불태우고
생을 짧게 마감한 그들의 삶에 대한 안타까움을
시로 토로하는 시인의 깊은 마음을 알 수 있으리라.
오늘 나는 이생진 시인이 좋아하고 사랑하는
'빈센트 빌럼 반 고흐'를 추억해 보면서
감히 이생진 시인의 건필과 건강을 기원해 보려고 한다.
까마귀 나는 밀밭
(-고흐의 마지막 그림-) / 이생진
테오*야 가야겠다
그림의 힘은 하늘인데
하늘이 오라 하니
가야겠다
나보다 시신에 민감한 까마귀
까마귀가 출발했으니
나도 까마귀 따라 가야겠다
무섭다
이 길이 무섭다
개미 새끼 하나 지나가지 않는 밀밭 길이 무섭다
하늘과 까마귀와 밀밭의 정적이
나를 덮치려는 순간
혼자 남아 있는 내가 무섭다
왜 이렇게 나는 혼자냐
그 하나를 하나인 내가 나를 쏘다니
나는 나를 배반한 자
다시는 이 길을 밟지 않을 거다
그러나 나를 무서워 마라
나의 무덤은 내 그림 안에 있고
내 그림은 밀밭에 있으니
밀밭에서 나를 끝내는 거다
나는 내게 지은 죄를 그림으로 사죄한다
테오야 가야겠다
*테오(1857-1891):고흐를 끝까지 도와준 고흐의 동생
(이생진 시인의 시집)
빈센트 빌럼 반 고흐(Vincent Willem van Gogh,
1853년 3월 30일 ~ 1890년 7월 29일)는
네덜란드 화가로 일반적으로 서양 미술사상
가장 위대한 화가 중 한 사람으로 여겨진다.
그는 그의 작품 전부(900여 점의 그림들과 1100여 점의 습작들)를
정신질환(조울증으로 추측)을 앓고 자살을 감행하기 전의
단지 10년 동안에 모두 만들어냈다.
그는 생존기간 동안 거의 성공을 거두지 못했지만,
특히 1901년 3월 17일 (그가 죽은 지 11년 후) 파리에서
71점의 반 고흐의 그림을 전시한 이후 그의 사후 명성은 급속도로 커졌다.
암스테르담에 있는 반 고흐 미술관은 반 고흐의 작품과
그의 동시대인들의 작품에 바쳐졌다.
네덜란드의 또 다른 도시인 오테를로에 있는 크뢸러-뮐러 박물관도
상당히 많은 빈센트 반 고흐 그림의 수집, 보유하고 있다.
반 고흐가 그린 몇몇 그림들은
세상에서 가장 비싼 그림들 사이에 순위가 매겨지기도 한다.
1987년 3월 30일에 반 고흐의 그림 '아이리스'가
뉴욕의 소더비즈에서 539만 미국 달러라는 기록으로 팔렸다.
1990년 5월 15일에 그의 '가셰 박사의 초상'이
크리스티즈에서 8,250만 달러(한국돈으로 약 580억 원)에
일본의 제지사업자 료에이 사이토(당시 74세)에게 팔림에 따라,
새로운 최고가 기록을 세웠다.
당시 료에이 사이토가 지불한 8,250만 달러는
낙찰가 7,500만 달러에 경매가 구전 10%가 가산된 금액이었다.
살아생전 1,900점이 넘는 스케치와 회화를 완성시킨 빈센트 반 고흐.
1853년 네덜란드 준데르트에서 개신교 목사의 맏아들로 태어난 그는
처음부터 직업 화가의 길을 걸은 것은 아니다.
학교 졸업 후 순회 설교자로 벨기에의 탄광촌 보리나지에 간 반 고흐는
그곳의 참담한 현실 앞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의 무력함을 발견했고, 이에 놓았던 붓과 펜을 다시 들어
그림으로 보리나지의 비참한 실상을 세상에 알릴 결심을 한다.
그 후 어둡고 암울한 탄광촌을 떠난 반 고흐는
네덜란드와 프랑스를 옮겨 다니며
여러 사람과 장소를 보고 경험하며
그 모습들을 자신의 화폭에 담는다.
그러면서 그의 작품에선 새로운 기법이 사용되고
밝은 색들로 하여금 그의 작품에서 따뜻함이 발산하게 되지만,
반 고흐는 이미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지쳐가고 있었다.
당시 사람들에게 정신이 이상한 사람으로만 여겨진 반 고흐.
하지만 지금 그가 머물면서 작품 활동을 했던
유럽 여러 도시에서의 그의 영향력은 말로 다 할 수 없다.
불꽃같은 정열과 격렬한 필치로 눈부신 색채를 표현했으며,
서양 미술사상 가장 위대한 화가 중 한 사람으로 꼽히는 빈센트 반 고흐.
불과 10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제작된 그의 작품들은
강렬한 색채, 거친 붓놀림, 뚜렷한 윤곽을 지닌 형태를 통하여
그를 자살까지 몰고 간 정신병의 고통을 인상 깊게 전달하고 있다.
1853년 3월 30일,
네덜란드의 브라반트 북쪽에 위치한 작은 마을에서
엄격한 칼뱅파 목사의 맏아들로 태어난 빈센트 반 고흐는
1890년 7월 29일 프랑스 오베르 쉬르 우아즈에서
자살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모두 879점의 그림을 남겼다.
정신병 발작을 일으켜 고갱과 다툰 끝에
면도칼로 자신의 귀를 잘라버리기도 했던
그의 삶은 발작과 입원을 되풀이했으며,
발작이 없을 때에는 그간의 공백을 메우기라도 하듯
닥치는 대로 그림을 그렸다.
서른일곱 해의 짧은 생을 살면서 지독한 가난에 시달리며
늘 고독했던 그는 주로 브뤼셀, 헤이그, 앙베르 등지에서
노동자와 농민 등 하층민의 모습과 자연의 풍경을 화폭에 담았다.
종교적인 신념, 인간에 대한 연민으로 가득했던 고흐의 삶은
현실과 타협하지 않은 채,
고독과 가난 속에서
온전히 예술을 위해 바쳐졌다.
그러나 정작 살아 있는 동안에는 인정받지 못하고
비참한 죽음을 맞이한 후에야
그의 작품들은 불후의 명작이 되었고,
삶은 신화로 남았다.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의 일부
--- 너 하나만이라도 내가 원하는 전체 그림을 보게 된다면,
그래서 그 그림 속에서 마음을 달 래주는 느낌을 받게 된다면…
나를 먹여 살리느라 너는 늘 가난하게 지냈겠지. 돈은 꼭 갚 겠다.
안 되면 내 영혼을 주겠다.
(테오에게, 1889년 1월)
태양의 화가, 영혼의 화가라 불리는 빈센트 반 고흐
지독한 가난, 고독, 예술에 대한 끝없는 집착, 발작, 요절…
그는 우리의 이중섭처럼 37년의 짧은 생애 동안
극적인 삶을 살면서 강렬한 작품을 남겼다.
이것이 반 고흐가 미술애호가는 물론
평범한 사람들까지 사로잡는 이유이다.
고흐는 1872년 8월부터 세상을 떠날 때까지
동생 테오와 편지를 주고받았는데,
그가 테오에게 보낸 편지는 무려 668통이나 된다.
고흐에게 테오는 어떤 존재였을까?
여동생 윌에게 보낸 편지에서 고흐는 이렇게 썼다.
---테오가 없었다면 그림을 제대로 그릴 수 없었을 것이다.
친구 같은 테오가 있었기에 내 그림의 수준이 나아지고
모든 게 제자리를 찾을 수 있었다.
(1887년 여름∼가을)
테오는 고흐에게 동생이자 친구이며 후원자였고 또 동반자였다.
고흐의 고백처럼 테오가 없었다면
고흐의 그림은 탄생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러한 테오에게, 고흐는 일기 쓰듯 편지를 썼다.
고흐의 편지에는 그의 심정과 처지가 매우 솔직하게 씌어 있다.
'본의 아니게 쓸모 없는 사람' '새장 속에 갇힌 새'
'나는 개다'는 표현이 편지에 등장한다.
그의 복잡한 내면과 힘겨운 생활이 고스란히 담긴
고흐의 편지에서 가장 핵심적인 것은 두 가지다.
가난과의 고투, 그리고 '색'으로 상징되는
그림에의 끝없는 열정과 집착이
고흐의 수많은 편지를 관철하는 주제인 셈이다.
또한, 고흐는 사촌인 케이에게 구혼했다가 거절당했을 때의 심정,
매춘부 시엔과 동거하게 됨으로써
동료는 물론 가족과 겪게 된 갈등,
아버지와의 격심한 불화, 고갱과의 다툼 등을
'적나라하다'는 표현이 어울릴 만큼 솔직하게 토로한다.
----이 감옥(무지, 편견 등)을 없애는 게 뭔지 아니?
깊고 참된 사랑이다.
친구가 되고, 형제가 되고, 사랑하는 것,
그것이 최상의 가치이며, 그 마술적 힘이 감옥 문을 열어준다.
그것이 없다면 우리는 죽은 것과 같다.
사랑이 다시 살아나는 곳에서 인생도 다시 태어난다.
(테오에게, 1880년 7월)
반 고흐가 이 세상을 떠난 지 100년이 넘었다.
하지만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그와 그의 작품을 기억하고 있고 흠모한다.
지독한 가난과 고독 때문에 힘겨워하면서도
더 나은 작품을 위해 쉼 없이 고투하고,
그 결과 많은 사람을 매료한 작품을
이 지상에 남겼기 때문이다.
천재는 왜...
살아 생전 혹독한 고통의 삶을 살아갈까?
그리고, 우리 곁을 그렇게 일찍 떠나버릴까?
이생진 선생님이 사랑하는 '반 고흐'...
왜 선생님이 '황진이'와 '반 고흐'를 좋아하는지
조금은 알 것만 같다.
(동생 테오와 함께 나란히... 테오도 33세로 졸)
지도에서 도시나 마을을 가리키는 검은 점을 보면
꿈을 꾸게 되는 것처럼
별이 반짝이는 밤하늘은 늘 나를 꿈꾸게 한다.
그럴 때 묻곤 하지.
프랑스 지도 위에 표시된 검은 점에게 가듯
왜 나는 창공에서 반짝이는
저 별에게 갈 수 없는 것일까?
타라스콩이나 루앙에 가려면 기차를 타야 하는 것처럼,
별까지 가기 위해서는 죽음을 맞이해야 한다.
죽으면 기차를 탈 수 없듯,
살아있는 동안에는 별에 갈 수 없다.
증기선이나 합승마차, 철도 등이 지상의 운송수단이라면
콜레라, 결석, 결핵, 암 등은 천상의 운송수단인지도 모른다.
늙어서 평화롭게 죽는다는 건
별까지 걸어간다는 뜻이지.
-빈센트 빌럼 반 고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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