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그림들/외국의화가의 작품

쉴레

조용한ㅁ 2011. 12. 4. 01:48

 

 

 

 

 



 


 


 


 


 





















     


<이중자화상>-1915,종이에 구아슈,수채와 연필,32.5x 49.4cm


 

오스트리아 빈,합스부르크 왕가가 몰락하기 직전 화려함과 불안감
이 뒤섞인 도시를 무대로 에로틱과 육감적인 그림들로 활동했던
화가 에곤 쉴레는 1890년 도나우강변의 툴른에서 태어났다.
에곤 쉴레의 어린 시절은 지극히,어린 시절이라기 보다 그의 주변환
경은 우리가 대체로 알고있는 그 어떤 화가들보다 평범했으며 그를 
시련에 빠지게 하고 해하고자 하는 무리는 거의 없었다.

예를 들어 
굶주림과 고독,번뇌와 말그대로 자애의 결핍으로 
태어남과 동시에 죽기전까지 불행했던 
빈센트 반고호에 비하면...
(직업이 화가인 고호는 화가임에도 불구하고 그 살아생전 몇몇의 
간단한 스케치를 제외하고는 그의 그림을 사려는 이가 없었다.
그림 한점이 땔감과 빵한조각인 그 당시를 생각하면 그의 굶주림과
그보다 더한 모욕은 상상하기조차 힘든 비참함이었다.)

그림의 소질을 살려 예정이나 된듯이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쉴레는
진정 행복한 사람이었다.
'신 예술가'그룹을 이끌며 활동하던 명예,연애에 대한 자유와 방종,
결혼,모든 위상을 쉽게 내려다보던 인물이었다.

그러나 쉴레는 스스로가 쳐 놓은 그물에서 스물여덟이라는 불꽃이
라고 말하기조차 안타까운 그 짧은 생을 마감할때까지 그가 가진 
고독과 욕망,솔직하고 대담한 에로틱의 혼란에서 벗어날수 없었다.
자신을 아끼는 것 이상의 
나르시시즘적인 자애(自愛)는 쉴레를
늘 혼란에 빠뜨리곤 했다.

다시 그림속으로...
이 그림속에는 두資?쉴레가 있다.
먼저 그림을 말하기 전에 다시 한번 그림을 보자.
참으로 기발한 상상을 현실과 잘도 버무려 그려놓은 작품이 아닌가?

'이중자화상'이라니...
인간이라면 누구나 필수로(?)겸비한 '이중적'인 내면 모습을 현실이
라는 하얀 종이위에 펼친 그의 작품,그 솔직함이 이루말할수 없이
근사하다.
아래쪽의 쉴레는 그림을 보는 감상자에게 적개심을 품고 있다.
아니,쉴레 자신에 대한 적개심이라고 하는 것이 더 옳겠다.
경계하는 듯한 심각한 그의 모습은 '오픈 마인드'라는 것에 대해 
한치의 양보도 없어 보인다.
약간의 미동도 없이 그렇게 오래도록 경계심을 풀껏같지 않다.
반면,적개심과 경계심으로 가득찬 인물을 감싸고 다독이는 듯한 
윗쪽에 위치한 쉴레는 관상자를 향해 끊임없는 그러나 알수없는 
호기심이 가득한 얼굴이다.
열린 가슴을 가진 또 다른 에곤 쉴레인것이다.
아랫쪽의 인물과는 대조적으로 어느 한 점만 응시하지 않는 그의 
시선은 상당히 자유롭다.
커다란 눈동자는 시선의 자유를 끝없이 누리며 현란하게 깜빡이는 
요란한 굴림을 계속 하고 있을 것 같다.
끝 없는 자신에 대한 갈증과 욕망,경계심,혼란,치를 떨며 그리워한
그 자애감까지...이 모든것이 이 '이중자화상'에 녹아있다.

이 그림을 응시하고 있노라면 나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
벌겨벗겨진 나를 보게 된다.
수치심을 동반하였으나 왠지 모를 쾌락과 향락을 느끼며 자조하고 
있는 나.....이 느낌이란 참으로 그득하다.

쉴레는 알고 있었다.
자신의 훌륭함을..자신의 뛰어난 독창성과 상상력과 
자신의 손끝에서 더 견디지 못해 뿜어져 나오는 거친 선들이 모여
영혼의 자유를 얻은 태초의 에로틱한 욕망이 가쁜 숨을 쉬도록 하는 
그 날것의 기쁨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먼저 밟아 본 그의 놀라운 세계, 천재성을 함께 할 이는 
없었다.그는 알기에...아는 만큼 고독했던 것이다.

난 스물여덟살에 걸린 독감이라는 병이 쉴레를 현세에서 몰아낸것
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물론,그 당시의 독감은 그 자체의 병보다 위생관리와 전염,약품의
애매함과 후진성으로 수많은 
합병증의 위험을 동반했다.)

자아의 파괴와 자아의 창조적인 소용돌이가 멈추었는데...
그가 남은 현세에 어떤 미련이 있었을까 싶다.
더 내 놓을 것이 없을 정도로 강렬하게 표현한 뒤에 그에게 찾아 온
것은 어쩜...깊이를 알수 없는 어두운 낭떠러지였을지 모른다.
현세에 남고자 하는 그의 의지는 사라진것이다.
사그라든 것이 아닌 순식간에 꺼져버린 불꽃의 이름은 에곤 쉴레..
'미련없는 세상,
염세주의...'그는 그의 인생관에 맞게 생을 마감한다.

하루가 멀다하고 아니 한시간이 멀다하고 
이율배반적인 삶을 살아
제끼는 나...
이제는 의지조차 치를 떨며 돌아서버려 온갖 꾀를 내어 꼬셔보아도
뒤 한번 돌아봐주지도 않는다.

그렇다.
세상 그 어느 누구도 상처를 주지 않는다.
삶이란 생각하기 나름인것이다.그 잠깐의 생각이 나를 죽이기도 살
리기도 하는 것이 아닐까?
고통은 고통이 얼르고 다독이며 치유하는법.
얇디 얇은 종이에 베인 상처는 연고 하나로 족하지만 시퍼렇게 날이
선 칼에 베이고 썰린 상처는 연고가 아닌 칼보다 더 날카롭고 예리
한,뾰족한 바늘로 그 벌어진 틈을 꽉 잡아 꾀매서 메꿔야한다.

자,이제 현실을 직시해보자.아니,아직은 자신이 없으므로 응시하자.
거울로 내 꼬라지를 좀 보자.
오늘 나의 '이중자화상'...어떤 모습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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