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숙한 천재와 구스타프 클림트
어느 제국이던 몰락이 다가오면 제국의 신민들은 현실로부터 등을 돌리고, 쾌락과 평온을 찾아 떠나기 마련이다. 당시의 오스트리아 역시 이와 다르지 않았다. 그들은 미술과 무대 예술에 열광했으며, 거리의 건축물들을 화려한 장식으로 치장하길 즐겼고, 중산 계급의 시민들(부르조아)도 귀족처럼 살려고 했다. 실레의 부모도 마찬가지였다. 아버지의 사망은 청소년기의 민감한 실레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친 것 같다.
실레는 아버지의 죽음 이후 어머니와는 더욱더 사이가 나빠졌는데, 그 이유는 자신의 모친이 아버지의 죽음을 그다지 슬퍼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일설에 의하면 실레의 아버지는 죽기 전에 자신이 소유하고 있던 주식과 채권을 모두 불살랐다고 한다. 매독의 병세로 인해 점점 더 기이한 행동을 보이다 결국 직장도 잃고 그의 아버지는 제정신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나 실레는 아버지의 죽음을 통해 자신의 아버지를 이상화(자신의 재능을 탐탁치않게 여겼고, 드로잉들을 태워버린 아버지가 아닌가)시킨다. 실레가 아버지를 이상화시키고, 자신의 어머니에 대해 적대감을 갖게 된 것은 아마도 실레 자신이 아버지의 사회적 지위와 능력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거기에 덧붙여 실레 자신이 평생에 걸쳐 남의 시선을 의식하며 살아간 것처럼 그의 모친이 남편의 죽음에 대해 미망인으로서 충분한 슬픔과 애도를 표명하지 않은데 대한 사회적 수치심이 더해진 것 같다. 그러면서도 실레는 자신의 여동생 게르티와는 각별하였고 에로틱한 분위기를 풍기기까지 하는데 그의 누이동생 게르티는 오빠를 위해 정기적으로 누드 모델이 되어주었고, 실레가 16살, 게르티가 12살 무렵엔 어린 누이를 데리고 트리에스테의 호텔의 더블룸에서 하룻밤을 보내려고 하기까지 한다. 그곳은 자신의 부모가 신혼을 보낸 곳이었다.
어쨌든 실레는 16세 되던 해 자신의 대리인이던 삼촌(백부는 미술보다는 음악 애호가였다.)과 무관심한 어머니가 마음내켜하지 않았지만 비엔나 미술학교로 보내졌다. 그는 이곳에서도 특별한 재주를 보였지만 보수적인 아카데미의 교육자들은 그의 재주를 인정해주지 않았다. 그의 스승은 실레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악마가 너를 내 수업에 들여보냈구나. 어디가서 내가 너의 선생이라 말하지 말거라." 그는 이런 아카데미식 교육을 달가와 하지 않던 다른 친구들과 함께 학교를 중도에서 포기한다.
그로부터 1년 후인 1907년, 실레는 당시 비인 분리파의 수장격이던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의 주변을 엿보며 그에게 접근할 기회를 찾는다. 그를 만난 클림트는 실레의 드로잉을 작품을 보고 나서 "재능이 있군요. 너무 많아요."라며 그의 비상한 재능을 인정해준다. 이후 실레는 클림트의 막대한 영향(아르 누보 양식과 소재의 영향)을 받는다. 그러나 실레는 클림트도 분명히 가보고자 했으나 결코 갈 수 없었던 영역까지 밀고나감으로써 자신만의 독자적인 예술세계를 구축할 수 있었다.
실레가 클림트와 달랐던 것은 클림트가 끝까지 밀고나가지 못하고 두리뭉실한 에로티시즘으로 포장한 것을 실레는 적나라하게 드러내 보였기 때문이다. 클림트의 그림에서 여성은 비록 남성의 잘린 목(피가 뚝뚝 떨어져야 정상일테지만)을 들고 있더라도 정사 중인 여자처럼 만면에 홍조를 띠고, 몽롱한 눈초리로 타인에게 시선을 건넨다. 섹스 어필이란 점에서 만 보자면 클림트의 그림들은 후대의 핀업 걸(pin up girl) 사진들과 별로 다를 바가 없어 보이기까지 하다. 그러나 실레의 그림들은 클림트에 비해 훨씬 더 도발적이다. 그는 여성의 체모가 적나라하게 드러나거나 심지어 수음을 하고 있으며, 그런 자신을 어쩔 수 없이 훔쳐보게 되는 입장에 처한 관객들의 눈동자를 똑바로 쳐다본다. <빨간 블라우스를 입고 등을 대고 누운 발리>를 보라.(마치 '이 저질들아!' 라고 외치는 듯하다.) 그는 당시 비엔나 사람들이 드러내고 싶지 않았던 현실과 꿈의 간극 속에 감춰진 불안과 중산층 부르조아들의 허위의식을 파헤쳐 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이런 위선들을 증오한 것은 아니다.
그 자신이 오히려 이런 이중적이고 위선적인 인간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본의든 아니든 감추고 싶은 상처를 들추어 낸 사람은 어느 세계에서나 미움을 받기 마련이다. 그는 비록 짧은 생애였지만 살아있는 내내 그런 적개심을 품은 사람들로 인해 고립되었다.
<그 와중에 만나는 사람이 바로 구스타프 클림프 입니다. 당시의 그는 빈 미술계의 명사였지만 과감하고 충격적인 누드화로 인해 많은 이들의 비난과 공격의 대상이었죠. 열 일곱 살의 쉴레가 자신의 데생에 대한 조언을 구하자 “자네가 나보다 더 많이 알고 있는 것 같은데.” 라며 어떠한 의지도 사용하지 않았지만, 클림프는 쉴레의 인생에 가장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마흔 다섯의 클림프는 열 일곱의 쉴레에게 휼륭한 스승이면서 의리있는 친구로서의 역할을 다하였습니다. 후에 클림프는 쉴레보다 9개월 먼저 세상을 떠나게 되는 데요, 그 때 쉴레는 클림프의 침대로 달려가 막 숨을 거둔 그의 얼굴을 스케치하였답니다.>
적대적 세계의 실체를 의식하지 못한 속물
1909년 무렵까지 실레는 자신의 가족과 후견인으로부터 경제적 후원을 받았다. 실레는 이 무렵부터(채 스무살이 되기도 전에) 비평가로부터 좋은 평가를 얻어내기 시작했고, 세 명의 후원자들에게 관심을 끌어낼 수 있었다. 후원자들은 그의 그림을 정기적으로 구입해줄 것이었고 그것은 그에게 경제적인 안정을 주었다. 하지만 실레는 이에 만족하지 못했다. 아니 스스로의 마음속으로는 만족해했을 것이다. 아마도 고흐(Vincent Van Gogh) 이후의 모든 화가들이 지니게 될 콤플렉스일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실레 자신은 화가는 궁핍하고 고난에 처해야 한다고 믿었던 것 같다. 그가 화가로서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자 법적인 보호자였던 어머니와 삼촌은 그 동안의 염려를 덜고 경제적 지원을 그만두었다. 실레 자신이 늘어놓은 이 시기의 경제적 고난에 대한 묘사가 많이 남아 있기는 하지만 귀테르슬로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말해준다.
에곤 실레는 보기 드문 미남인데다가 화가다운 데를 찾기 힘들었다. 머리는 단정했고, 하루도 수염을 깍지 않고 그냥 내버려두지 않았다. 손톱은 항상 말끔하였으며 가장 빈곤할 때에도 궁색해 보이는 옷은 절대 입지 않았다. 내 기억이 맞는다면 실레는 아주 우아한 젊은이로서 그의 세련된 태도는 당시 그의 서투른 그림 솜씨와 천양지차였다. 실레가 혁명 대중처럼 옷을 입고 천박한 아낙네처럼 이야기한다면 그것이야말로 혁명적인 일일 것이다.
실레의 엄살은 사실과 달랐다. 실레가 궁핍함을 가장했던 것은 그가 중산층 부르주아지의 가치관을 거부했기 때문이 아니라 위대한 화가가 되기 위해서는 그 가치를 거부한다는 코스츔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실레는 말쑥하게 차려입고, 돈을 헤프게 쓰고 다니면서도 가난한 척 했고, 화가의 고단한 삶, 평범한 사람들과는 다른 삶을 추구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아버지와 자신의 후견인이 누린 보다 안락하고 평온한 삶을 원했다. 결국 자신에게 지극히 헌신적이었던 여인 발리를 버리고 부르주아 가정의 여인(에디트 하름스)를 선택하여 결혼한다.
실레에 대한 글을 써 나가는 내내 그를 이해하지 못한 것은 아니다. 이해는 하지만, 다만 그가 싫은 내 마음은 나도 어쩔 수 없는 것이란 것이 맞는 말일 것이다.(동시에 그의 작품에서 줄곧 느껴지는 관객을 의식하는 포즈들은 이해할 수 없는 것이지만 거부할 틈도 없이 빨려 들어가는 느낌만큼은 부인할 수 없다.)
에곤 실레의 여인들
에곤 실레의 여성 관계는 주변의 증언을 보면 그의 그림의 성적인 요소들에 불구하고 비교적 건전한 편이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 글을 쓰고 있는 필자는 그런 증언들이 그다지 가치가 없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중요한 것은 그가 얼마나 많은 여자들과 관계를 맺었느냐 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지닌 이중적인 가치관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를 가차없이 속물로 지적하는 데에는 그의 삶이 그러했기 때문이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사건은 실레와 발리 노이칠 그리고 에디트 하름스와의 연애 과정에서 빚어진 실레의 이중적 선택의 문제였다. 발리 노이칠은 실레의 모델이자 동거 애인이며 도발적이고 요염한 면을 지닌 여자였다. 그리고 자기자신에 대해서도 솔직한 여자였던 것 같다.
발리는 원래 화가 클림트의 모델이었는데, 1911년 실레를 만나 그의 모델이 되었다. 그리고 둘은 실레가 결혼할 때까지 함께 살았다. 발리는 실레에게 헌신적이었다고 한다. 집안 일은 물론이고, 실레의 선정적인 누드 드로잉을 고객에게 전달하는 심부름도 했는데, 그런 심부름을 할 때면 고객들의 성적 희롱에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발리는 순진한 여자는 아니었다. 그녀는 쉴레의 그림에 에로틱한 환상을 불러일으키는 원천이었다. <빨간 블라우스를 입고 등을 대고 누운 발리>에서 그녀는 순진한 듯 하면서도 요염한 눈빛과 자세로 상대방을 유혹하고 있다. 그녀는 자신의 성적인 욕망을 어떻게 표현하는지를 아는 여자였다.
실레는 자신의 이웃집에 살고 있는 부르주아 철도공무원 가정의 하름스 자매를 알게 되고, 발리를 시켜 그 집 자매에게 연애 편지를 전하게 한다. 물론 하름스 집안의 부모는 실레와의 교제와 결혼을 승낙하지 않았지만 에디트 하름스는 실레를 사랑하게 되고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실레와의 결혼을 강행한다. 에디트 하름스는 동시에 실레의 곁에 그의 분신과도 같이 버티고 있던 발리와 대면하여 발리로 하여금 실레를 떠날 것을 요구한다. 이때 실레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던 것은 역시 그 다운 일이었다. 결국 발리는 실레의 곁을 떠나기로 한다. 이런 발리를 실레는 마지막으로 만나 편지를 건네준다. 편지의 내용은 매년 여름 에디트 없이 함께 휴가를 보내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발리는 그것은 불가능하다고 거절하고 떠난다. 그리고 그 후로 그들은 다시는 만나지 않았다.
<쉴레에게 버림받은 발리는 그후 간호사로 종군, 1917년 야전 병원에서 숨을 거두었다.>
실레 자신도 아마 알고 있었을 것이지만 실레에게 있어 발리는 실레를 실레답게 만드는 어떤 영감의 원천이었던 것 같다. 실레는 발리를 통해 억압되어 있던 자신의 성적 욕망을 분출할 수 있었고, 발리 역시 실레를 깊이 사랑했고, 그를 지켜주었고, 실레에 대해 나름의 헌신적인 사랑을 했다. 그러나 실레에게 있어 발리는 이미 클림트의 모델이었고,(클림트는 자신의 모델과 성관계를 갖는 것으로 유명했다.) 자신에게 예술적 영감을 불러 일으켜주기는 하겠지만 부르주아적 안락함을 줄 수 없는 여인이었다. 실레는 어려움없이 에디트를 선택했으며 에디트의 사랑을 이용할 줄 알았다.
죽음과 소녀 (1915 )
이 작품은 4년간 동거 후 버린 발리와의 이별을 상징한다고 합니다. 남자에게 거의 매달린 듯 안겨있는 여인의 모습은 불안하고 위태로워 보입니다. 깍지를 낀 여인의 손가락은 결코 남자를 잃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여주지만 남자는 동요하지 않는 듯 하네요. 손가락의 깍지만으로는 남자를 붙잡을 수 없는 여인이 애처롭고 안쓰럽습니다.
에곤 실레과 제국의 몰락과 함께 사라지다
에곤 실레가 드디어 본격적인 명성을 누리기 시작할 무렵 오스트리아는 세계의 화약고로 변해가고 있었다. 워낙 다양한 인종의 도가니와 같았던 오스트리아인지라 발칸의 위기는 곧 제국의 위기로 불거졌고, 범게르만주의와 범슬라브주의의 각축장이었다. 제1차세계대전이 발발하여 전유럽의 성인 남자의 한 세대가 전멸하는 유럽 문명의 위기 속에서도 에곤 실레는 전쟁에 거의 전혀라고 할만큼 관심이 없었다. 대전 초기에 그는 징집을 피할 수 있었으나 전쟁이 격화되면서 결국 그도 징집의 그물을 피할 수 없었다.
그가 에디트 하름스와 결혼한지 얼마 안되었을 때 일이었다. 그는 에디트 하름스와 함께 병영을 돌아다녔고, 그의 상관에게 자신이 비엔나에서 얼마나 유명한 화가인지 인정받기 위해 몸부림쳤다. 그런 노력의 결과 그는 전투부대에 배속받지 않고, 후방에서 편안한 근무를 하며 군대 창고의 일부를 아뜰리에로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제 1차 세계대전 말기에 번진 악명 높은 스페인 독감이 10월 비엔나를 휩쓸었다. 당시 임신 6개월이던 에디트 하름스가 독감에 걸려 사망했고, 실레는 그 사흘 뒤인 10월 31일 밤에 아내의 뒤를 따랐다. 실레가 최후로 남긴 작품은 죽어가는 아내를 그린 소묘였다. 실레 자신은 자신의 그림이 자신의 사후에 유럽의 유명 박물관에 전시될 것을 알고 있었다. 그만큼 그는 자신의 작품들에 대해서 자신이 있었으며 자기 자신이 유명해질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 했다.
이제 에곤 실레의 그림을 보는 우리들이 그의 그림을 보며 느끼는 것은 그가 유명해지기 애썼던 그런 몸부림이 아니라 그의 재능을 통해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우리들 자신의 내재된 욕망에 관한 이야기들이다. 우리의 출세에 대한 욕망, 안락함에 대한 희구, 명성에 대한 갈증, 성적인 쾌락, 관음증, 롤리타 콤플렉스와 같은 것들 말이다. 에곤 실레는 감추려 했는지 몰라도 그는 자신의 작품을 통해 자신의 이중성과 관객의 이중성을 여지없이 들추어내고 있다. 오늘날 그의 회화가 전세계의 미술관에 걸려 있는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글출처 http://windshoes.new21.org/art-egon.htm
쉴레의 죽음
쉴레가 같은 독감으로 숨을 거둔 것은 아내가 세상을 떠난 3일 후, 1918년 10월 31일이었다.
그는 자신의 생명이 끓어지는 모습까지도 사진으로 남겨 두었다.
죽음의 순간까지, 자기 자신에게 집착하는 쉴레….
어린 시절부터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끊임없이 묘사했던 쉴레다운 최후가 아닐 수 없다.
결국 그가 생애에서 사랑한 것은 단 한 사람 바로 자기 자신뿐이었던 것이다
내게 예술이 없었다면
지금 나는 무엇을 할 것인가?
나는 생을 사랑한다.
모든 생명의 깊이에 참잠하는 것을 사랑한다.
그러나 나를 원수 다루듯 사슬로 묶어
나 자신의 것이 아닌 삶으로,
즉 하찮은 가치밖에는 지니지 않고 그저 실리적일 뿐인,
예술이 결여돼 있고
신이 부재하는 삶으로
나를 몰아넣고자 하는 강제를 혐오한다...
나는 모든 살아있는 존재의 심층으로 가라앉기를 원한다
<1912년 4윌 27일 옥중에서 쉴레>
Eye In The Sky - Alan Parsons Project
<출처;blog.joins.media 가브리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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