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크 로드코(1903~1970)
현란한 구도와 색채가 시선을 휘어잡는 그의 그림은
마티스나 샤갈, 피카소의 작품을 떠올리게도 합니다
대형 캔버스 위에 떠 있는 육중한 사각의 색채 덩어리들...
보면 볼수록 오묘한 빛과 색감을 표출하며 경외감마저 들게 하는
마력을 가지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죠
(Untitled), early 1940s
Study for "Antigone", early 1940s
Untitled, 1944/1945
로드코를 뉴욕 추상화파 중 색면 회화(color-field)의 대표적 작가로 꼽습니다
고르게 칠한 캔버스 위에 2~3개의 사각형을 배열하고
색채의 깊이 감을 통해 내면세계를 표현했어요
특히 그는 전시장의 조명, 벽면의 명도, 그림이 걸리는 높이까지
직접 결정했고 전시장 한가운데 등받이 없는 의자를 배치할 것까지 주문했다고 해요
1940년쯤까지만 해도 미국미술은 지역미술
또는 유럽미술의 아류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어요
그러나 1950년대 들어 미국에서 일어난 추상표현주의 운동은
그 대담함과 참신성으로 세상을 놀라게 했어요
추상표현주의는 그림의 형식은 추상이나 내용이 표현적인데서 붙여진 이름이지만,
무의식과 자동기법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오히려 초현실주의에 가깝다고 해요
그렇다면 로드코가 어떤 사람이었을까?
드빈스크에서 찍은 가족사진 : 오른쪽에서 2번째가 마크 로드코. 1912년
러시아 태생인 로드코는 약사인 유대인 아버지 아래
엄격한 종교교육을 받으며 자랐죠
열살 되던 해에 가족을 따라 미국으로 이민했으나
가난 속에서 학비를 벌기 위해 신문 배달, 웨이터 등을 해야만 했죠
예일대학을 그만 두고 뉴욕의 의류공장에서 옷 모형을 떠주던 그는
미술학교에 적을 두기는 했지만 자신은 독학한 미술인 임을 자처했어요
The Syrian Bull 1943
Sacrifice, April 1946.
Untitled (Violet, Black, Orange, Yellow on White and Red) 1949
Untitled (# 17), 1947.
Untitled, 1949
그는 1950년에 뉴욕화파(New York School)의 일원이 되었고
1954년부터 영향력 있는 시드니 재니스 화랑의 전속작가가 되어
활발한 작품활동을 펼치는데,
추상표현주의의 풍미와 함께 당대 최고의 작가로 부상하게 됩니다
#73 1952
Earth and Green, 1955
작품 ‘땅과 초원’(1955)에서 보듯
1950년대 이후의 모든 작품은 직사각형과 색 면으로만 이루어져 있어요
여기서도 위에는 어두운 적갈색의 직사각형 면이,
밑 부분은 검은 녹색이 대비되어 배치되어 있는데
내면으로 침투하는 듯 일렁이는 색들은 부유하는 영혼을 연상시킵니다
어떤 것도 고정되어 있지 않고 모든 것이 흘러가는 듯 하면서도
앞이 꽉 막히는 듯한 고독과 절망감...
그는 "예술의 가장 극적인 표현은 좌절의 순간이며
그림이야말로 인간의 근본적 정서인 비극과 법열,
숙명감 같은 것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했어요
Mark Rothko in his West 53rd Street studio, c. 1953
동맥경화증과 우울증에 깊게 시달리면서도 술을 많이 마셨던 그는
이미 서서히 자살의 삶을 살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1954 White, pink and mustard
1957 # 20 1957
Untitled 6001.58 1958
1960년대 초에 이르러 저명인사가 된 그였지만
변화된 자신의 사회적 위상에 대해
오히려 자신의 미술적 진보가 막다른 골목에 다다르지 않았는지 두려워하였죠
그는 당시 미증유의 경제적 번영과 함께
예술이 자본의 논리에 종속되는 현상에 대해 극도로 불편해했어요
더구나 미술계가 그 거대한 시스템으로 자신과 같은 작가들을 착취하고
이용만 하려한다고 크게 불만스러워하였죠
| No. 14, 1960 | 1960
1960년대부터 팔레트의 색이 어두워지고
No. 1, White and Red 1962
Red Maroons | 1962.239
1963
1970년 자살 직전엔 거의 회색과 검은 색으로
모노크롬화 한 것이 이를 반증합니다
Untitled (Black on Grey), 1969/1970
면도날로 양 팔뚝의 동맥을 크게 자르고
작품을 응시하는 동안 피는 서서히 흘러 그를 죽음으로 이끌었어요
로드코의 전기작가 브레스린은 그의 몸이 무너지고 감정이 무너지고,
그의 숨겨진 세계가 상품으로 공개되어 가는 상황에서
그의 자존심을 지킬 수 있는 최후의 수단은 자살의 길이었다고 말했죠
로드코야말로 당대사회의 고독을 살고,
좌절을 가장 잘 표현한 작가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말입니다
그는 생애 말년 3년간을 작가 자신이 생애 최고의 성취라고 자평하였던
텍사스 소재 비종파 교회 ‘로드코 채플’의 벽면 설치회화 제작에 몰두하였어요
그는 이 프로젝트를 통하여 서양 종교미술 전통의 현대적 변용이라는
필생의 과업을 실현시키고자 하였죠
하지만, 1970년 스스로 자신의 목숨을 끊은 그는
이듬해 열린 ‘채플’의 봉헌식에 참석할 수 없었다고 해요
외부 전경
로드코 채플 실내 모습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