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떠난 여행
- 순천만 갈대숲-
한 해의 끝자락인 어느 아침.호남선 새마을호 카페 안. 初老의 여자가 혼자 앉아 있었다.
아주 천천히 밥을 먹고 순하게 끓여진 원두커피를 마시면서,그녀는 마치 잃어버린 날들처럼 빠르게 스쳐가는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어느덧 기차는 섬진강변을 지나고 있었다.
지난 봄, 매화꽃을 만나러 왔던 길. 지금은 모든 색깔들을 거두고 다소곳이 겨울을 맞고 있는 회색풍경.
표정없이 흐르는 강물은,
분홍빛과 연두빛깔 꿈, 그리고 짙푸른 여름날의 열정과 수줍게 익어가던 열매의 기억을 간직하고 있을까...
해 지는 풍경을 보려면 순천만 갈대밭속에 오래 있어야 했으므로 서둘러 식당 안으로 들어갔다.
벌교벌의 꼬막을 먹어볼 요량으로 주문한 "꼬막 정식"은 두 사람 이상이어야 했고, "짱뚱어 탕"이 유일한 그녀의 몫이었다.
'짱뚱어, 그 우스광스런 놈을 보기도 전에 먹기부터 하는군...'
그런데, 뚝배기 안의 어디에도 짱뚱어는 보이지 않는다.
"아줌마, 짱뚱어 탕인데, 왜 짱뚱어가 한 마리도 없어요?" 묻는 그녀에게 "푸욱 고아서 걸렀지라잉~~"
식당 아줌아의 말씨와 짱뚱 탕 맛이 닮았다고 생각하는 그녀.
이제 갈대숲에 들어섯다.
드넓은 갯벌에 무성한 갈대숲, 이 안에 또다른 생명들이 셀 수 없이 깃들여 있다고.....
그러나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세상의 가장 중요한것들은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 고 누군가 그랬었지.
숨차게 올라온 용산 전망대.
눈 올듯 어둡던 날이 신의 선물인듯 환해지면서, 갯벌에 노을이 드리우기 시작했다.
사진에 얽매이지 말고 천천히 노을을 즐기리라 별렀건만, 눈은 어느새 카메라의 렌즈에 대어져 있다.
무엇이 바쁜가?
하룻밤쯤 이 적막한 곳에서 새운다한들 아무것도 달라지는게 없을 처지임에랴.
철새들은 어찌됬냐고 ?
그들은 너무 멀리 있었고, 가까이에서 만난 몇몇도 카메라 안에 넣을 시간 없이 청명한 소리만 남기고 날아가 버렸다.
비록 허접하긴 하지만 눈이 못 본것을 망원렌즈는 점으로나마 챙겨오긴 했다.
후기: 이 날 하루가 마치 내 평생과 닮았다고 생각했습니다.
순천만에가자, 그 곳의 황금빛으로 반짝이는 S라인 물길과 만나자. 천둥소리를 내며 떠오르는 철새들과 만나자. 벼르고 벼르며, 선배들에게 데려가 달라고 조르다가, 그러다가 12월을 맞았습니다.
결국 혼자가게 되는구나.
아무도 나를 배려하지 않는다는 소외감과 서운함을 제쳐두고라도 평생 이렇게 적막하거나, 무엇이나 나 스스로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는, 그러나 이렇게라도 원하는것을 행 할 수 있으니 그나마 다행한 일이라는 생각들을 했습니다.
그러려고 한것도 아닌데, 별 생각 없이 골라넣은 책, "눈을 감고 보는 길"이 좋은 길동무가 되어주었지요.
정채봉이 순천사람인줄을 그제야 알았으니, 좋아한다 좋아한다 하면서도 그의 글들을 수박 겉핥기 식으로 읽었듯이
어쩌면 나는 평생 그렇게 살아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눈 내려 쌓이기전에 가 보려고 작정한 날이 하필 흐리고 간간이 빗방울까지 떨어졌습니다.
매사에 한발짝 늦던 지나간 일상처럼 순천만을 만나러 가는길도 그렇게 늦었던거지요.
하지만, 저녁나절이 되자 신의 선물인듯, 두터운 구름을 제치고 햇살이 갯벌위에 노을을 펼치기 시작했습니다.
사진작가 인듯 싶은 이들은 '해가 포인트까지 오려면 30분 이상 기다려야 한다'며 팔짱끼고 서 있었지만, 나는 그날 밤차로 상경할 예정이었으므로 어찌됬건 서둘러 사진을 찍어댔지요. 해가 그들이 말하는 포인트까지 오지않고 구름속에 잠겨버리자 그들은 미련없이 그곳을 떠났습니다.
나는 좀 더 서성이다가 내려왔는데, 갈대숲에 들어서면서부터 빗망울이 굵어지더니, 금새 주위는 캄캄해지고 많은 이들이 나를 앞지르며 달려나갔습니다.
나는 혼자 남아서 갈대숲 사이로 보이는 하얀 길을 따라 걸었어요. 옷이 젖고 빗물은 이내 신발속까지 스며들었는데, 무거울까봐 카메라 가방 대신 가벼운 숄더 백에 넣어온 카메라가 젖는게 몹시 걱정되었습니다.
안내하는 이가 입구에서 용산전망대까지 왕복 한시간20분이라 했으니 나는 적어도 40분 넘게 어두운 갈대밭 속에서 눈비를 맞으며 헤맨게 되겠네요.
가까스로 밖으로 나왔으나 공원엔 아무도 없었습니다.
건너편 식당까지 나가서 택시를 불렀지만. 택시가 없다는것이었습니다. 택시가 없을 수도 있다는것을 짐작도 못했으니 이래저래 허술한 내 성격을 드러낸것이지요.
오래 기다려 시내버스를 타고 순천역에 왔으나 타려했던 기차는 놓쳤고 비에 흠뿍 젖은 몸을 어떻게든 해결해야했습니다.
역 건너편에 생활용품....뭐라고 쓴 간판이 보이기에 들어가서 수건, 양말등과 이상하게 생긴 신발도 하나 샀습니다.
그리고 또 길을 건너서 목욕탕으로 갔지요. 샤워를 하는둥 마는둥하고 나와 헤어드라이어로 카메라를 말리고 젖은 옷도 말리고.....
야간열차를 타고 새벽에야 집에 도착했습니다.
나는 왜, 거기서 하룻밤을 보내고 다음날 돌아올수도 있다는 생각을 못하고 그렇게 허둥대었던걸까요?
이담에 또 이런 상황을 맞게되면, 그땐 어디 조용한 여관으로 들어가 편히 쉬고 들아올셈입니다만,
예, 내 삶도 이제 많이 저물었으니 그런날이 오기나 할런지 모르겠습니다.
- 2010.12.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