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미술사에 족적을 남긴 거장들의 작품 탄생에는 그들의 작품세계를 형성하는데 일조를 한 아내들의 역할이 있었다. 화가의 작품세계를 이해하는데 결코 빠질 수 없는 요소는 바로 '아내'. 모든 사람들이 화가의 작품과 생애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는 사이 아내의 존재는 슬며시 등한시되어 왔다. 그렇다면 화가의 아내를 주인공으로 하여 화가의 작품세계를 이해해보면 어떨까. 생각만 해도 흥미롭고 신선한 시도가 아닐 수 없다. 일본의 소설가 시와치 히사에가 지은 <화가의 아내>는 위대한 예술을 내조한 화가들의 아내 이야기이다. 렘브란트를 비롯하여 밀레, 로세티, 피카소, 샤갈, 세잔 등 근현대미술사를 빛낸 거장들 19명과 그의 아내들의 이야기가 소개되어 있다. 예술가의 삶이 그러하듯 그의 아내들 역시 굴곡지고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이 책에 소개된 아내들의 삶은 크게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다. 남편과 함께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묵묵히 그들을 내조하며 희생을 아끼지 않았던 부류와 뜨거운 열정과 감수성 내지는 독특한 개성으로 인해 남편과는 별개로 자기만의 세계를 구축했던 부류이다. 병약했던 첫 번째 아내와 사별한 밀레가 두 번째 부인으로 맞이한 카트린은 비록 신분은 낮지만 생활력이 강하고 성실하여 밀레 대신 가정의 생계를 꾸려나갔다. 13년이라는 긴 세월동안 결혼생활을 비밀리에 유지하면서 생계를 책임지며 남편을 후원했던 마네의 아내 수잔의 삶 역시 희생과 봉사 그 자체다. 희생과 봉사의 삶을 묵묵히 살다간 아내들
또한 그 누구보다 가정적이고 성실했던 르누아르의 온화하고 부드러운 화풍은 평생 그의 그림자가 되어 말없이 도와주었던 아내 알린의 애정 없이는 이루어지기 힘들었을 것이다. 결벽증이 있는데다 남모르는 비밀이 많았던 부인을 위해 나체화를 그리게 된 피에르 보나르와 마르트 보나르의 이야기는 불꽃같은 사랑은 아니어도 깊은 숲 속에 피어있는 야생화를 보는 것과 같은 잔잔한 아름다움을 안겨준다. 평생 성적인 결함으로 인한 피해의식과 생활고로 인한 고통으로 살다 간 기시다 류세이 곁에는 그런 남편을 안타깝게 바라보아야 했던 아내 기시다 시게루가 있었다. 또한 1,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시절에 유대인의 신분이었던 샤갈이 찬란한 예술의 꽃을 피워낼 수 있었던 것은 그의 그림을 누구보다 정확히 이해할 뿐 아니라 무엇보다 시대의 흐름을 읽어낼 줄 알았던 얼음처럼 차갑고도 현명했던 아내 벨라 샤갈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로세티와 그의 아내 엘리자베스 로세티다. 이들은 모델과 화가라는 미묘한 관계에서 사랑을 하고 동거를 시작하지만 결혼도 하지 않은 어정쩡한 상태에서 서로 외도를 즐긴다. 끊임없이 로세티에게 예술적 영감을 불러일으켰던 엘리자베스의 존재로 인해 로세티는 그녀를 끝내 버리지 못하고 서로에게 상처만 안겨준 채 엘리자베스는 자살을 하게 된다. 불후의 명작 '축복받은 베아트리체'만을 남기고. 사랑하는 연인이자 아내였지만 끝내는 '서로 이해하는 동지'로 남게 된 앙리 마티스와 그의 부인 아멜리 마티스의 경우도 이에 해당된다. 아멜리는 단순히 한 남자의 아내로 살아가기엔 야망과 열정이 살아 꿈틀대던 여인이었다. 레지스탕스 운동에 몸을 던진 아멜리는 묘비에도 결혼 전의 이름을 새겨 넣을 정도로 자의식이 강한 여인이었다. '야수파'라는 새로운 사조를 만들어낸 마티스의 작품세계에 그녀가 끼친 영향은 분명 지대했다. 끊임없는 자극과 영감의 원천이 된 아내들 소설 <달과 6펜스>의 실제 모델로도 알려진 고갱의 자유분방하고 얽매이지 않은 생활은 예술가로서는 고무적이었을지 모르나 그의 아내 메테 고갱의 입장에서는 무책임하고 문란하기만 한 치기에 불과할 뿐이었다. 이후 극도로 사이가 나빠진 그들 부부는 이름만 부부였을 뿐 남과 다를 바 없는 사이였다. 몇 점 남아있지 않는 데다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린 채 날카롭게 표현되어있는 그녀의 초상화가 그 사실을 미루어 짐작케 한다. 20세기를 대표하는 위대한 화가로 불리는 피카소는 어떤가. 92살의 나이로 세상을 뜰 때까지 잦은 결혼과 이혼, 동거와 별거 등 성적으로 문란한 삶을 살았던 그는 가정적으로 보았을 때 결코 행복한 사나이는 아니었다. 첫 번째 아내였던 올가의 초상화에서 보이는 우수 어리고 쓸쓸한 표정에서 그녀의 불행을 암시라도 하는 듯한 인상을 받는다. 그런가하면 스물여덟의 나이로 요절한 천재화가 아오키 시게루는 그의 예술세계를 이해하고 적극 후원했던 후쿠다 다네가 있었지만 원만한 부부로 맺어지기에는 둘의 열정이 너무나 뜨거웠던 것일까. 끝내 다네와 결별한 시게루는 극도의 가난 속에서 너무나도 쓸쓸하게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생전에 화가로서 이름을 날리지는 못했지만 그녀와의 짧았던 열정적인 사랑 속에서 피워낸 몇점의 그림은 그의 뜨거웠던 재능을 엿보게 한다.
저자는 이 책의 제작을 위하여 수 십 차례 외국의 박물관과 화가가 활동한 지역을 찾아서 드나들어야 했다. 관련 자료를 구하기 위해 외국자료를 번역하는 수고도 마다하지 않았으며 박물관에서 큐레이터와 관장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하기도 했다는 것. 그렇다면 저자는 무엇 때문에 화가의 아내들의 삶에 그렇게 천착했던 것일까? 단순한 호기심에서? 그 이유는 비교적 길다 싶은 서두의 '지은이의 말'에서 찾을 수 있다. '화가의 아내라는 소재에 관심을 가진 것은 남의 사생활을 엿보고 싶어서가 아니다. (중략) 인간적인 호기심에서 그림에 다가가는 것도 괜찮은 접근방식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예컨대 마네와 모네라는 헷갈리기 쉬운 이름을 가진 두 거장에게는 피아니스트였던 아내와 젊은 나이에 세상을 뜬 아름다운 아내가 있다. 이런 사실과 상관없이 작품이 탄생하지 않았으며 두 화가의 삶까지 알게 되면 마네와 모네를 헷갈리는 일은 없을 것이다. 화가에 대한 평가 가운데 그들의 아내가 차지하고 있는 부분은 매우 적었다. 화가를 평가하는 데에도 화가의 아내는 잊힌 존재였던 것이다' 대부분 예술가의 아내의 삶이 그렇듯 화가들의 아내의 삶도 고단했다. 특히 경제적인 면 외에도 모델과의 미묘한 관계로 인해 화가의 아내들은 심적으로도 많은 갈등과 고민을 떠안아야했다. 이 책을 읽고 나면 지금껏 잊혀진 존재였으나 화가를 이해하는데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는 아내라는 존재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된다. 그녀들의 삶을 이해하고 비로소 바라보는 그들의 초상화는 얼마나 눈물 나도록 숭고하며 아름다운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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