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사랑에 긴 이별
ㅡ시인 백석과 자야 여사와의 사랑
밤이 깊었습니다. 병실의 밤이 고즈넉합니다. 백석! 그대 이름을 또다시 불러봅니다. 세상은 저를 ‘백석의 애인 자야 여사’라고 부릅니다. 제 나이 어느덧 여든셋, 이번에는 걸어서 퇴원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깊어가는 이 밤에 그대와의 추억을 더듬어봅니다.
제가 그대를 처음 만난 것은 1936년 가을, 함경남도 함흥에서였지요. 그대는 시집 『사슴』을 낸 그해, 조선일보사 기자직을 그만두고 함흥시의 영생고보 영어교사로 와 있었습니다. 그대는 평북 정주군 갈산면 익성동에서 난 촌사람인데 2년여 서울 생활에 지쳐 있었던 것 같습니다. 영생고보에 있던 문학평론가 백철 씨가 같이 있자며 불렀고, 에라 머리나 식히자고 함흥으로 왔던 것이지요. 일본 청산학원 영문과를 우등으로 나온 실력에 서울서 시집을 낸 유명한 시인이라 영생고보에서 아주 인기 있는 선생님이었습니다.
저는 그때 스물두 살 꽃다운 나이였고 그대는 스물여섯 살이었습니다. 저는 서울 관철동에서 태어나 일찍 부친을 여의고 할머니와 홀어머니 슬하에서 성장했습니다. 금광을 한다는 친척에게 속아 집안이 망하자 1932년 조선권번에 들어가 기생이 되었습니다. 한국 정악계의 대부였던 금하 하규일 선생의 지도를 받아 여창 가곡과 궁중무 등 가무의 명인으로 성장했지요. 1935년 조선어학회 회원이던 신윤국 선생의 후원으로 일본에 가서 공부하던 중 신 선생이 함흥형무소에 투옥되자 저는 면회차 귀국하여 함흥에 잠시 머물러 있었습니다.
처음 만난 자리에서 저를 옆에 와서 앉으라고 한 그대는 술잔을 저한테만 권하면서 관심을 보였지요. 자리가 파하여 헤어지면서 “오늘부터 당신은 내 마누라요”라고 말했지만 그 말이 진심이라고 어찌 생각했겠습니까. 제가 사는 하숙집에 수시로 찾아와 만주에 가서 살자는 말을 불쑥 내뱉곤 하셨는데 그 말씀 또한 진심임을 그때는 알 도리가 없었습니다. 제 손목을 들여다보며 “어이구, 요런 손목을 하고 그 바람 찬 만주 땅을 어찌 가서 살겠나” 하셨지요.
저는 기생이었기에 그대의 ‘숨겨 놓은 애인’이 될 수는 있었을지언정 처는 될 수 없었습니다. 우리의 운명은 여기서 이미 결정이 나 있었던 게지요. 그대는 제가 선물한 『당시선집』에 나오는 이백의 「자야오가(子夜吳歌)」를 읽고 저를 ‘자야’라고 부르기 시작했고, 그때부터 저의 본명 김영한은 사라지고 그대의 자야로 다시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때 서울에서 사시던 그대의 부모님은 장가를 가라고 성화였지요. 쉰이 넘은 그대 어머니가 손자를 보고 싶다고 조바심을 냈지요. 한 집안의 장남이 객지를 떠도니까 가정을 꾸려 안정을 취하라고 친척들도 번갈아 가며 충고했습니다. 저 역시도 속마음은 그렇지 않았지만 좋은 배필을 만나야지, 기생 치마폭을 잡고 있으면 되겠느냐고 성혼을 부추기곤 했습니다.
그 다음해 그대는 집에 다녀왔는데, 혼례를 치른 뒤 사흘 만에 달아나듯이 집을 나와 함흥으로 온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대 곁을 떠날 때가 되었음을 알고 보따리를 싸서 서울로 왔습니다.
1937년 4월에는 그대에게 충격적인 일이 벌어졌습니다. 4월 7일에 그대가 마음에 두고 있었던 처녀 란(蘭)이 결혼을 해버린 것입니다. 그것도 그대와 가장 가까운 친구였던 신현중이란 분과. 저는 그저 애인 정도였고, 란이란 분과 결혼을 하기 원했던 것 같은데 무너진 사랑탑이 돼버린 것입니다.
다시 그 다음해, 그러니까 1938년 봄이었지요. 저는 청진동에 작은 집을 구해 기예를 닦고 있었는데 웬 아이가 쪽지를 들고 찾아왔습니다. ‘몇 달 만에 이렇게 찾아온 사람을 허물하지 마시고 나 있는 데로 속히 와 주시오.’
제일은행 부근 오뎅집에서 그대를 보는 순간, 모든 원망은 눈 녹듯이 사라지고 저는 평생 그대를 사랑하며 살아갈 운명임을 깨달았습니다. 밤차로 함흥으로 떠나는 그대를 배웅하면서 저는 그대의 아내가 누구이던지 간에 평생 사랑하리라 굳게 결심했습니다.
영생고보 축구부 지도교사였던 그대는 전선(全鮮) 고보 축구대회에 참가하려고 선수들을 인솔해 서울로 다시 왔습니다. 와서는 선수들을 돌보지 않고 일주일 내내 저한테만 와 있던 것이 문제가 되어 영생여고보로 전보발령이 납니다. 선수들이 유흥장에 간 것이 합동단속교사에게 적발된 것입니다. 몇 달 뒤 그대는 사표를 써 우편으로 부치고는 다시 서울 생활을 시작합니다. 『여성』지 편집을 하다가 조선일보사로 다시 들어갔지요.
그대는 저와 청진동에다 아예 살림을 차렸습니다. 마당 한 뼘 없는 작은 한옥이었지만 안방과 건넌방, 그리고 쪽마루가 딸린 작은 찬방으로 된 집은 우리의 단란한 보금자리였습니다. 그대의 시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에 나오는 “아내와 같이 살던 집”은 바로 이 집을 가리키는 것이지요. 넥타이를 하나 선물했더니 보는 사람마다 좋다고 하더라며 저녁 때 들어와서 몇 번이고 넥타이 잘 고른 제 안목을 칭찬해 주던 그대의 자상함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저는 제 생애에서 그때만큼 밥 짓는 것이 즐거웠던 적이 없습니다. 그대는 고기보다는 나물반찬을 좋아했지요.
그대의 첫 부인은 아마도 크게 낙심한 채 친정으로 갔을 것입니다. 저와의 살림살이를 알고 있던 그대 부모님은 아들의 마음을 바로잡고자 새장가를 들이기로 했습니다. 1939년 6월이었지요. 그대는 충청도 진천으로 출장을 다녀오겠다고 했습니다. 아, 그쪽 사람과 혼인을 하러 가는구나, 저는 짐작했습니다. 부모님 말씀에는 절대적으로 복종해 온 그대인지라 부모님의 간청을 뿌리칠 수 없었을 테지요. 보름이 넘게 아무 소식이 없자 저는 마음을 독하게 먹고는 짐을 싸 명륜동으로 이사를 했습니다.
두 달이 지난 어느 날이었습니다. 해가 뉘엿뉘엿 서산으로 넘어갈 시각에 집 뒤로 난 골목길에서 “자야-” 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망설이다가 에라 얼굴이나 보고 완전히 헤어지자고 얘기해야지 하는 생각에 황급히 나가 보았습니다. 그대는 석양을 등지고 퀭한 얼굴로 서 있더군요. 저의 독한 마음은 또 눈 녹듯 스르르 사라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대는 새색시를 버려두고 또다시 저한테 달려온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남의 눈을 의식해야 하는 이런 사랑이 오래 지속될 수는 없었습니다.
그대는 모든 것 다 팽개치고 만주로 가서 숨어살고 싶었나 봅니다. 저한테 같이 가자고 몇 번 권했지만 저는 기생으로서의 제 생활이 있었기에 고개를 저었습니다. 그해 말, 그대는 만주의 신경으로 떠났습니다. 오랜 꿈을 이룬 것이겠지요. 그대의 역마살을 제 사랑이 부족하여 붙들지 못한 것이 천추의 한이 됩니다. 토마스 하디의 소설 『테스』를 번역하여 출간하고자 서울에 잠시 다녀간 것이 1940년이었고 그 이후 그대는 남쪽으로 발걸음을 하지 않았습니다. 만주 안동으로 옮겨 세관업무를 보기도 했다지만 함흥고보 제자가 찾아가 보니 중년의 초라한 모습이 되어 있었고 생활도 궁핍하게 보였다고 합니다.
38선에 철조망이 놓이고, 전쟁이 일어나고, 그대의 소식은 더 이상 들려오지 않게 됩니다. 저는 해방 후 요정 ‘대원각’을 인수했습니다. 장안 최고 요정의 명성을 이어갈 수 있었지만 허전한 마음을 어찌할 수 없었습니다. 그대가 월북시인이 아니었음에도 월북시인으로 간주되어 시가 읽히지 못한 세월이 참으로 길었지요. 이동순 시인의 노력으로 그분의 첫 전집이 나온 것이 1987년, 이때부터 저도 할 일이 생겼습니다. 시인 백석의 명예를 회복시키는 일에 이제는 제가 나서야 하겠다고 결심을 했습니다.
요정은 불교계에 기증하였고 재산을 정리하여 2억원을 만들었습니다. 그 돈을 백석문학상의 제정에 써달라고 기탁했습니다. 그래서 백석문학기념사업 운영위원회가 만들어졌고, 백석문학상이 제정되었습니다.
백석 시인은 한낱 기생에 지나지 않는 저에게 남편으로서의 사랑을 베풀어 주셨고, 저는 그 은혜에 조금 보답했을 따름입니다.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자야 여사는 1999년에 작고하였다. 월북시인이 아니라 재북(在北)시인이었던 백석은 1945년 말 북한에서 재혼했으며, 슬하에 3남 2녀를 두었다. 1962년부터 1995년 사망할 때까지 33년 동안 붓을 꺾고 시인이 아닌 농민으로 살아간 백석― 남쪽의 자야 여사가 그렇게 자신을 그리워하고 있다는 것을 모른 채 살다 갔다는 것도 분단의 비극이 아닐 수 없다.
ㅡ『빠져들다』에서
여기의 김영한 여사는 언제 시인이 가장 보고싶냐는 기자의 말에
사랑하는 사람을 그리워 하는때가 따로있겠냐는 대답을 했고
대원각을 길상사로 봉헌할때 백억이 아깝지 않냐는 물음에
"백억도 백석시인의 시 한줄만 못하다 했다고 합니다.
자야 김영한 (1916 ~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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