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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한도 가는 길

조용한ㅁ 2014. 3. 2. 01:14

*유안진 - 안동 임하초등 졸업. 시인. 서울대학교 교수

유안진의 【세한도 가는 길】과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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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한도 가는 길


 

서리 덮인 기러기 죽지로
그믐밤을 떠돌던 방황도
오십령(五十嶺) 고개부터는
추사체로 뻗친 길이다
천명(天命)이 일러주는 세한행(歲寒行) 그 길이다
누구의 눈물도로도 녹지 않는 얼음장 길을
닳고 터진 알발로
뜨겁게 녹여 가라신다
매웁고도 아린 향기 자오록한 꽃진 흘려서
자욱자욱 붉게붉게 뒤따르게 하라신다 


이 짧고도 녹녹하게 꽉찬 시(詩)가 우리 고향 임동 출신으로 아기산의 정기를 받아 태어나

 한국 문단에 우뚝선 유안진시인께서 1998년, 그러니까 지금으로 부터 14년 전인 만 57세에 쓰신 시다.

 이 한편의 시(詩)는 1998년 그해 여름 계간 <시와 시학사>에서 주관하는

 제10회 정지용문학상 수상의 영예를 안겨준 작품이다.

1998년 초가을 종로구 중학동 한국일보 13층 송현클럽에서 유안진 시인의 정지용 문학상 시상식이 있었다.

그때 시상식 축사로 참석하신 우리 임동 지례출신으로 원로 시인이신 김종길 前고려대 교수님께서는

 축사에서 이 시제목 <세한도 가는 길>에서 세한도를 빼고 천수통(川水通)을 넣어

<천수통(川水通)가는 길>이라고 해도 무방하다고 하시면서 유안진 시인의 아픈 가족사를

 통찰 하시는 듯한 말씀을 하신 것이 기억 난다.

**유안진시인의 아픈 가족사는 본 향우카페<고향임동이야기>방 No.177 -박곡동② 유안진-코너 참조**

 천수통(川水通)이란 영양 일월산에서 흘러내린 물줄기가 진보 를 지나

 아기산 뒤 지례 궁난을거처 망천 천전 으로 흘려 안동 용상동과 정상동 앞을 흐르는

낙동강 제1지류인 반변천(半邊川)중에서도 내앞(川前)에서 수곡(水谷)까지 30여리 길을 말한다.

즉 천전에서 반변천 본류를 따라 올라가 지례까지와 반변천 지류인

임동천(渭水) 수곡 무실을 관통하여 아우르는 길을 말한다.

옛부터 천수통에는 시인 묵객들이 많았고 유안진 시인도

 천수통의 대를 이어 고향의 산하가 낳은 여인 이라 할 수 있다.

유안진 시인은 시상식 수상소감에서

<내 골방에 걸린 복사판 『세한도(歲寒圖)』를 처다보며 천명을 느꼈다>라고

말한 기억이 아직도 내 머리 속에 뚜렸하게 남아 있다.

이 시에 등장하는 <기러기 죽지> <오십령 고개> <추사체> <세한행> 이런 시어(詩語)들과

 이 시(詩)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세한도(歲寒圖)를 자세히 알아보는 것이 필요하다.

 

 추사 김정희가 제자 우선 이상적에게 그려준 세한도(국보180호)

 

 

 

 

 잣나무 3그루 소나무 1그루 집 한채

그림 오른쪽 늙은 노송의 추사 김정희가

팔을 뻗어 제자 이상적을 보호하고 있는 모습에

가슴 아립니다.

 

 

 

 우선시상(藕船是賞)

 

 

 

長毋相忘(장무상망)-오래도록 서로 잊지말자

 

 

 

김정희가 직접 쓴 발문

 

 

 

세한도!
세한도(歲寒圖)!!
추사 김정희의 이상과 혼이 담겨져 있는 세한도!!!
추사 김정희의 고고한 인품이 녹아 있는 문인화의 정수 세한도!!!!
그려지는 것과 그려지지 않는 여백의 절묘한 조화를 이루어

마침내 조선 선비정신의 꼿꼿한 기상을 우주로 통하게 하는 세한도는 과연 어떤것인가?

 먼저 그림부터 감상하면 세한도(歲寒圖)는 추운 겨울을 그린 그림이다.
소나무 1그루,잣나무 3그루, 집1채가 전부인 쓸쓸하고 황랑한 그림 세한도,

극도의 절제미와 거칠고 메마른 붓질을 통해 추운 겨울 고독의 절정을 보여주는

 국보 제180호 세한도는 과연 무었을 담고 있는가?

그림 우측 상단에 歲寒圖(세한도)라고 가로로 쓰여 있고

그 옆에 藕船是賞(우선시상)이란 글씨와 阮堂(완당)이란 김정희의 호를 쓰고 붉은 낙관을 찍었다.

그림 왼족에는 정교하게 사각형의 칸을 그어 20행 273자의 꼿꼿한 추사자신의 글씨로 적는

이 그림을 그리게된 제작 동기와 작품의 의의를 담은 발문(跋文)이 있다.

오른쪽 상단 제목 옆 우선시상(藕船是賞:우선 감상해 보게)에서 보듯 분명 이 그림은 누구에게 그려준 그림인지를 분명히 밝히고 있다.우선(藕船)이란 조선 후기 역관(譯官:통역을 맏은 벼슬)출신으로

대시인 이었던 이상적(李尙迪)을 말한다.우선(藕船)은 그의 호다.

우선(藕船) 이상적(李尙迪)은 추사의 애제자로 추사 김정희가  절해고도 제주도에 유배되어 있을때

한결같이 그를 스승으로 모시고 그를 도운 인물이다.

1844년 제주도에서 유배생활 5년째 되던해에 59세

환갑 바로 한해 전에 추사는 이 세한도를 그리고 발문에
   
歲寒然後知松柏之後凋(세한연후지송백지후조)
-추워진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시들지 않음을 안다-

 

논어(論語)의 자한(子罕)편에 나오는 공자의 이 유명한 말을 인용해

시류에 영합하지 않고 늘 변함없고 한결같은

이상적을 칭송하는  글을  적어 이상적에 주었던 것이다.

 

우선 이상적과 추사 김정희는 어떤 스승과 제자 관계였던가?
추사(秋史)김정희(金正喜1786년~1856년)는 조선 후기 대표적인 서예가로 금석학과 고증학에 뛰어난 인물이다.

24세 때인 1810년(순조 10년) 아버지 김노경이 청나라에 동지부사로 사행(사절단)을 떠날때

사절단의 자제자격(자제군관)으로 참석해 청나라에 두달 동안 머물면서

중국 문화예술의 중심지인 강남지방 양조우(절강성)출신인  유교경전의 대석학 완원(阮元)과 청나라 최고의 금속학자이자 대서예가인 옹방강(翁方綱)을 만나면서 학문의 교류를 넓혔다.

**김정희의 호는 추사(秋史)를 비롯해 여러가지가 있으나

유배후 주로 완당(阮堂)이란 호를 주로 사용한 것은

청나라 석학 완원(阮元)을 흠모 했기때문**

이 두사람은 김정희가 중국으로 떠나기 전부터 무척만나고 싶어 했던 사람으로

 김정희는 완원과 옹방강의 학문 세계를 늘 배우고 싶어 했다.

두달여 동안 사행기간이 끝나고 돌아오기 전 이들은 떠나는 김정희를 위해

전별연을 베풀 정도로 추사 김정희를 학문과 문장이 동방 제일이라고 칭송했다.

김정희는 전별연 자리에서 청나라 문인들로부터 학문과 예술이

하나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학예일체의 경지라고 평가 받았다.

중국에서 돌아온 김정희는 과거도 뒤로 미룬체 청나라 문인들과

교류하며 학문연마에 온 힘을 다하여 정진 한다.

김정희 가문은 증조부 김한신(金漢藎)이 영조임금의 부마가 되면서 조선 최고의 명문가가 된다.

아버지 김노경(金魯敬) 으로 이어지는 벼슬길도 순탄했다.

김정희도 순조19년인 1819년 30대중반 과거에 급제하여 암행어사가 되는 등 승승장구 하고 있었다.

 조정에서는 풍양조씨와 안동김씨의 외척세력을 밀어내기 위해

1827년 순조가 효명세자에게 대리청정을 위임하자 효명세자의 최측근이었던

부친 김노경에게 힘이 실리면서 김정희 가문은 절정에 달한다.

그러나 대리청정을 시작한지 4년만인 1830년(순조30년) 갑자기 효명세자가 죽자

김정희 집안에도 먹구름이 드리우기 시작한다.

효명세자가 죽은 후 1834년 8살의 헌종이 즉위하자 왕실의 두 외척인

안동김씨(김조순가문)파와 풍양조씨(조만영가문)파의 세도정치가 다시 시작되면서

두 가문의 권력투쟁이 심화되는 속에 왕실의 힘이 약해진다. 

1840년(헌종 6년)무렵 안동김씨의 세력이 커지자 안동김씨 세력은

추사 김정희를 비롯한 김정희 세력의 대결집을 막아야 하기 때문에

추사 김정희를 터무니 없는 무고로 선대의 윤상도(尹尙度)의 옥(獄)에 연류시켜

당시로서는 절해고도 였던 제주도 서귀포시에 있는 대정으로 유배시켜 버렸다.

유배 형벌 중에서도 최고의 형벌인 위리안치(圍籬安置)를 시켜

집밖으로 탱자나무 가시울타리를 치고 집안에서만 생활하게 하는 형벌에 처해졌다.

 하루아침에 반도의 끝 외딴섬에 연금을 당하게 된 김정희는 그토록 정진하며 매진하던

청나라 학자들과 학문 교류도 단절되고 풍토병과 끝없는 외로움에 시달리게 된다.

오직 실낟같은 희망 하나는 어릴때부터 불알친구이자 안동김씨의 핵심인물로

 순조와 처남 매부사이인 황산(黃山) 김유근 자신을 구해줄지 모른다는 희망 하나만 가슴에 품고 있었다.

그러나 김유근도 유배온지 얼마되지 않아 죽고

1842년 11월13일 유배 3년차 되던해에 부인도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남쪽 땅끝 제주도에서 차마 죽지도 못하고 처절한 고독과 외로움에 시달리며

극도의 극한상황에서 『우선 감상해 보게(藕船是賞)』로 시작되는 세한도(歲寒圖)가 그려졌다.

이때가 유배 5년되는 해로 김정희의 나이 59세였다.

우선(藕船) 자네 이그림 보게~~로 무언가 강렬한 부르짖음이 들어 있는듯한 세한도!!~

 세한도 속의 우선은 누구인가? 앞에서도 말 한바같이

우선은 역관(譯官)이자 시인으로 유명한 이상적(李尙迪)을 말한다.

우선(藕船)은 이상적의 호(號)이며 이상적은 김정희의 제자로 역과 시험에 합격한후

역관이 되어 12차례나 중국에 다녀온 애제자였다.

이상적은 역관자격으로 중국에 다녀올때마다 절해고도 제주도에서

외롭게 유배생활하는 스승 김정희를 위해 청나라 문인들 책을 어럽게 구해  김정희에게 갔다 주었다.

 그 책들은『만학집(晩學集)』. 『대운산방문고(大運山房文庫)』.『황조경세문편(皇朝經世文編)』

등 명저를 그것도 한두권이 아닌 한수레나 되는 분량이었다.

유배지에서 발이 묶여 외롭게 유배생활을 하던 김정희는

오직 이상적이 보내준 청나라 문인들 책이야말로 선진 문물에 목말라 있던 유배객에게

 외부와의 숨통을 트게 하는 길이었다.

김정희는 이런 이상적에게 항상 고마움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정치세력에 밀려 귀양가 있는 스승에게 국가의 녹을 먹고 있는 현직 역관의 신분으로

끝끝내 추사의 뒤를 돌봐드리고 그를 추종 했다는 것은 상당히 신분의 위협을 느겼을 텐데

 이상적은 시류에 영합하지 않고 끝까지 추사에게 절개를 지키고 있었다.

요즘의 정치인들처럼 권력이 있을때는 몰렸다가 권세가 다하면 언제 봤냐는 식으로

이합집산하는 정치인들 하고는 사뭇 달랐다.

이런 제자 이상적에게 김정희는 공자의 말씀

歲寒然後知松柏之後凋(세한연후지송백지후조)를 인용하여 발문을 쓰면선

 

『그대(이상적)는 나를 대함이 귀양 오기전이나 귀양 온 후나

변함없으니 그대는 공자의 칭송을 받을만 하지 않겠는가?』

 

『사마천이 말하기를 권세와 이익으로 합친자들은

권세와 이익이 다하면 사귐이 시들해 진다고 하였네

그대 또한 세상의 도도한 흐름속에 있는 사람인데

세상의 권세와 이익을 초연하게 벗어났으니~~』

 

*세한도 속 김정희의 발문 전문(全文)은 아래 하단 참조*

 

이상적의 절개를 칭송하며 세한도 오른쪽 하단에 장무상망(長毋相忘:오래도록 서로 잊지말자)이라는

 네글자의 붉은 낙관을 찍어 이상적에게 선물로 주었던 것이다.

선비는 유.불리를 따지지 않는 다고 했던가?

스승과 제자의 정이 알알이 담겨있는 세한도를 이상적은 추사 김정희로 부터 선물 받고

그해 겨울 중국에 공무차 가서 이듬해 봄(1845년)까지 있으면서

모든 공식업무가 끝나고 자금성 근처에서 청나라 관리와 문인들 오찬모임에서 세한도를 보여 주었다.

이 자리에서 세한도를 감상한 청나라 문인 17명은 크게 감동하여

각자 세한도를 본 감상기를 적어 주었는데 이상적은 그 청나라 문인들의 글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돌아와 스승 김정희에게 보여 주었는데 유배생활을 하면서 실의에 빠져있던 김정희는

 이상적이 가지고온 청나라 문인들의 세한도 감상기를 읽으며 큰 힘을 얻는다.

여기까지가 추사 김정희의 명작 세한도의 탄생 배경이다.

 

자 그러면 다시 앞으로 돌아가 유안진 시인의 <세한도 가는 길>을 다시 보자

 

세한도 가는 길


-유안진-

 

서리 덮인 기러기 죽지로
그믐밤을 떠돌던 방황도
오십령(五十嶺) 고개부터는
추사체로 뻗친 길이다
천명(天命)이 일러주는 세한행(歲寒行) 그 길이다
누구의 눈물도로도 녹지 않는 얼음장 길을
닳고 터진 알발로
뜨겁게 녹여 가라신다
매웁고도 아린 향기 자오록한 꽃진 흘려서
자욱자욱 붉게붉게 뒤따르게 하라신다   

 

이 시(詩) 키포인트는 <오십령(五十嶺) 고개>다.

오십령(五十嶺)고개는 오십을 갓넘긴 고개가 아니고 오십을 다 넘기고 육십을 바라보는 고개다.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는 육십을 1년 앞둔 59세에 그려졌고

 유안진의 <세한도 가는 길>은 육십을 3년 앞둔 57세에 쓰여진 시다.

유안진 시인의 시를 애독하는 독자라면 느낄 수있겠지만 사실 이 작품을 쓰기 전

그러니까 년도별로는 거의 90연대 중반전까지는

 그야말로 내방가사의 여류시인을 느끼게 하는 섬섬옥수의 시들을 주로 썼다.

즉 오랬동안 전통적인 서정시를 주로 써왔다.

그러나 오십령 부터는 당차고  매웁고 꼿꼿한 길을 자기 자신 혼자 가라고 조인다

문단의 데뷔도 요즘은 신춘문에등 각종 문학상을 통해서 하지만

유안진 시인이 데뷔 할 당시만해도 각종 문학상과 추천제도 가 있어서

 스승이 제자를 추천 하여 데뷔시키는게 많았다.

유안진 시인도 지금은 고인이 되신 박목월 선생으로 부터

<달>이라는 시한편으로 현대문학지에 추천을 받았다.

보통 추천제도는 한번으로는 그 시인의 자질 평가가 위태롭다고 하여

 세번까지 추천을 받아야 추천 완료가 된다.

유안진 시인도 1965년~1967년까지 <달> <별> <위로>등3회추천을 받아 문단에 나왔다.

요즘이야 덜하지만 옛날에는 문단에 계파라로 하면 좀 뭐하지만 계보라는게 있어서

그사람이 어는 문학지? 어떤 문학상? 어떤 선생님?에 추천을 받았는지 서로의 형성 라인이 있었다.

유안진 시인은 정지용 문학상 당선 소감의 자리에서

자신은 한국시단에서 들꽃이나 돌배나무 같다고 했다.

<문학을 전공 이수 한것도 아니고 어떤 문학상을 통해 데뷔된 것도 아니고

그저 글풍류로 빈핍을 극복하던 촌가에서 태어나 자장가 내방가사 민담 등과 자연에 대한

 무한 외경으로 저절로 태어난 돌 시인이다>고 하시면서 추천해 주신 단 한분의 박목월 스승께서

작고하시자 한국시단에서 천애고아라는 자의식을 떨칠 수 없었다고 했다.

데뷔시절 그 가녀린 손끝의 필체, 수줍음이 많아서 박목월 선생이 현대문학지에 추천해주고

<이문설렁탕>집에서 설렁탕을 같이 먹는데 선생님 앞에 있는 소금그릇을 앞당기기 어러워

그냥 맨 국물을 먹었던 유안진 시인은 지천명을 넘어 천명을 알게하는 세한도 길을 가고 있다.

스스로를 채찍질하여 엄격하고 단아함 그리고 맵고 당찬 선비의 정신을 걸어가고 있다.

세한도 가는 길은 선비정신으로 가는 길이요.

추사체로 가는 길이요.

유안진 자신 속으로 들어가는 길이다.

그 길은  위에서 김종길 교수님이 말씀했던 <천수통 가는 길>바로 그 길이다.

유년 한채의 유림 할아버지로 부터 글 풍류를 배웠던 곳  박실,

그곳이 바로 선비의 본토 기질이다.

<세한도 가는 길> < 천수통 가는 길>을

<박실 가는 길>로 바꾸고 싶어진다.


 

 

 이 두루마리를 펼치면 길이 14m로 추사 김정희 세한도와 청나라 문인들의 감상기 등이 나온다

 

 

 

 

추사가세한도를 그린지 70년 후인 1914년 작품전체를 표구 했다

 

 

세한도 제일 앞 김준학의 발문

 

 

 

 

추사 김정희가 우선 이상적에게 그려준 세한도 부분 길이 108Cm 폭 23Cm

 

 

 

 

 이상적이 청나라 문인들에게 세한도를 보여주고 감상기를 받은 글

 

 

 <세한도 추사김정희의 발문(跋文)>

 

 

 

<발문 풀이>

 

 

 

 

 

 

 

 

 

 

 

 

 

 

 

 

 

 

 

 

 

 

 

 

 

 

 

 

 

 

 

 

 

 

 

 

 

 

 

 

 

 

 

 

 

 

 

 

 

 

 

 

 

 

 

 

 

 

 

 

 

 

 

 

 

 

 

 

 

 유안진 시인의 정지용문학상이 발표된 계간 <시와 시학>1998년 여름호

 

 

P> 

 

 

 

세한도를 그리게 된 발문

 

세한도는 秋史 金正喜 선생이  이조 헌종9년 탄핵상소를 받아 제주도 대정(大靜)이라는 곳으로 유배중 58세 되던해에 그린 것으로 알려저 있다. 추사 김정희(1786~1856)는 추사라는 호 말고도 완당이라는 호로도 유명하다.

 

그밖에 수십개에 달하는 호를 쓰기도 했지만 추사와 완당은 우리에게 잘 알려진 호다. 완당 김정희는 판서를 지낸 유당노경의 맏아들로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일찍이 아버지를 따라 연경을 왕래하며 최고의 중국통으로써 청조경학이난 학계문단에 밝아 청조 명류와도 친교가 많았던 당대 엘리트 지식인 이었다.

 

24세에 소과에 합격하기 시작하여 종2품 병조판서(오늘의 차관급)에까지 오르게되고 동지부사로도 선발되게 된다. 조정에서도 그의 학문의 실력을 인정하고,청조의 새풍조를 따르는 항상 앞서 가는 신지식인이었기때문에 주위의 시샘이 따랐다.

 

그러다, 윤상도의 옥(죄로 처형을 받게되는사건)에 관계되었다고하여  제주도로 귀양가게 된다. 이때 완당의 나이 55세로 인생의 황혼길에 접어들어 제주도 귀양살이는 9년이나 되는 고통의 긴세월을 보내게 되었다.

 

당시의 제주도 유배생활은 아무도 없는 섬에서 모든것을 도와 주는 이 없이 살아야 하는 큰고통의 세월이었는데 그속에서 선비로써 낙이라면  오로지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일 뿐이었다.

 

완당의 처지가 벼슬이 떨어지고 9년에 이르는 유배생활을 하게 되자  모든 주위의 인심은 바뀌었다. 사람들의 인심도 예전같지 않은 속에서도 완당의 제자중 이상적이라는 제자는 스승을 잊지않고  중국에 역관(지금의 통역관)으로 드나들며 스승을 생각해서 귀한 책을 구해 계속 유배지로 보냈다.

 

당시도 범죄자를 도와 주면 도와준 사람도 크게 벌을 받게 되므로  사람들은 감히 엄두내기가 어려웠다 . 완당은 그런 위험을 무릎쓰고 계속해서 책을 보내 주는 제자가 너무 고마워 세한도를 그렸다.

 

그림의 크기는 세로 23.7센티에 가로109센티미터로 그림만은 별로 크지않은 크기지만 여러사람의 발문(그림을 보고 느낀 감상이라든가 등 느낌을 쓴글)이 붙어있어 세한도를 펼치면 10미터에 이른다.

 

(두루마리식)그림의 구도를 설명하면, 왼쪽엔 잣나무 두 그루와 그 옆으로 초라한 초막집과 꼿꼿이 서있는 소나무 두그루를 그리고  오른쪽에 김정희 필치의 화제와 낙관이 찍혀있는것이 전부이다.

 

단순하기도 한데다가 먹물이 묻은 붓을 꼭 짜서 마른 붓질로 까실 까실한 느낌이드는 갈필을 많이 써서 황량한 느낌과 함께 메마르고 차가운 먹색이 어우러져 외롭고 초라한 유배생활을 잘 나타내주고 있으며 고고한 문기를 강렬하게 발산하여 김정희 문인화의 높은 경지를 보여주고 있다.

 

구도도 삼각구도를 잡아 단순한 작품속에서도 안정성을 이루고  필력있는 필치로 글씨하나, 낙관한점 찍는것에 소홀함이 없는 작품이었다. 그림에 김정희 자신이쓴 시제에 [세한연후지송백지후조]라고 쓰여있다. 이뜻은 "아주추운 겨울이 되어서야 잣나무와 소나무의 푸르름을 알 수 있다"는 뜻으로 처지가 뒤바뀌어 주위의 인심이 변함을 말하기도 하고 자신의 힘든 유배생활을 세한(추운겨울의 심한추위)에 비유하여 그런 속에서도 송백과 같은 변함없는 의지로  선비의 기상을 잃지않겠다는 자신의 굳은 의지를 표현하고,또한 곁들여 완당의 발문에 사람이 한번 잘 살다 못살아 보면 주위에 인심을 알수 있는데 예전의 제자 이상적의 처세는 칭찬할게 없으나  (스승에게 제자가 잘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뜻) "지금의 이상적의 처신은 어느성인이라도 칭찬할 것이다" 라고 제자 이상적의 스승에대한 변치않는 의리에 고마움을 표현하였다.

 

완당은 아마도 당시의 어려움을 세한속의 꼿꼿한 송백을 표현하면서  자신의 슬픔을 굳은 의지로 이겨나간 것 같다. 이 그림을 받는 이상적은 이듬해에 중국 북경에 가게되어 스승의 옛 친구인 오찬의 잔치에 초대 받아 간 자리에서 스승의 세한도를 내보였다.

 

이때 함께 자리했던 청나라 문사 16인은 이 그림을 감상하고는 그 어려운 유배생활 속에서 세한도에 표현한 김정희의 마음을 십분 헤아리고 세한도의 높은 품격과 사제간의 깊은정에 감격하여  저마다 이를 기리는 시문을 남겼다. 그후, 이상적은 자신의 제자 매은 김병선에게 그림을 주게되고 그의 아들 소매 준학군이 쓰고 ?셈만? 보관했으나, 그림이 그려진지 70여년뒤 일제 강점기를 맞아 귀중한 보물과 서적을 온갖 수단을 다하여 탈취하니 이때 이 그림도 마침내 경성대학 교수였던 후지쯔까를 따라 동경으로 건너가게 되었다.

 

그후,세계에서 전운이 가장 높은 1844년 서예가인 소전 손재형 선생이 어려움과 위험을 무릎쓰고 현해탄을 건너가 후지쯔까를 여러번 방문 사정하여 사재를 털어 세한도를 다시 고국의 품으로 돌아오게 하였다.

 

세한도가 다시 고국의 품으로 돌아오니 이를 보고 위대한 한학자이자 독립운동가였던 오세창이 세한도가 이역으로 전전한 내역과 그동안에 기록된 찬문의 내역을 자세히 적고 세한도를 찾게 된 기쁨을 시한수로 덧붙였다.

 

이어서 초대 정부 부통령 이시영과 정인보의 평가와 감회의 글과 서예가 손재형의 필치로 [세한연후지송백지후조]가 남겨져있다.

 세한도가 많은 사람들의 관심이 대상이 된 것은 작가의 농축된 예술적 기질과 고결한 선비의 정신에서 발로 되는 담박함과 지조와 기상,  그리고 사제지교의 아름다움이 이 시대의 교훈이 되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또하나 더욱 중요한 것은 청나라 유학자 16인의 발문이 있어  문화사적으로 중요한 자료가 되어 세한도의 가치를 더해 주고 있다.

 

지금은 개인 소장되어 있으며 국보 180호로 지정되어 있다.

 

** 추가 설명**

 

1. 그림이 그려진 배경

추사가 제주도에 유배되자 그 간 그와 왕래하던 사람들 중 거의 모두는 발길을 끊게되었으나 그의 제자 이상적<李尙迪. 호는 우선 藕船. 당시 온양군수>만은 꾸준히 스승을 위하여 책을 구해 보내는 등 정성을 다하였다. 

추사의 유배 5년째인 1844년 추사는 우선<藕船>을 위하여 이 그림을 그렸는데 이 때 그의 나이 59세였다.

 

2.李尙迪<1804- 1865>

호 藕船 추사의 역관출신 제자로서 북경에 여러차례 왕래하였으며 시문에 능하여 중국의 문사들과 교류가 깊었다. 

저서에 은송당집<恩誦堂集>과 해린척소<海隣尺素>가 있다.

 3.화풍<畵風>

세한도는 그림이기 이전에 그의 암울하고 쓸쓸한 유배생활을 잘 보여주고 있는 하나의 심경사진<心境寫眞>이다.

자신의 말할 수 없이 처절한 심정은 볼품없는 조그마한 집 한채로서 표현하였고 제자의 고마운 행동은 지조의 상징인 우뚝한 소나무로 표현하였으며 '너와 나'둘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의 무관심은 소나무와 집 이외에는 아무 것도 없는 겨울배경으로 표현하였다.

 

표현주의적 기법이며 필의가 간결하고 풍격이 높아 종래의 남종화<南宗畵>를 일신하고 새로운 경지를 개척한

신 남종문인 이후 과천(果川) 관악산 및 선친의 묘역에서 수도하며 여생을 보냈다. 그는 경학·음운학·천산학· 지리학 등에도 상당한 식견을 가지고 있으며, 불교학에 조예가 깊었다. 이와 같이 그의 학문은 여러 방면에 걸쳐 두루 통하였기  때문에  청나라의 거유들이 그를 가리켜 <해동제일통유(海東祭日通儒)>라고 칭찬하였다.

흥선 대원군 이하응에게는 추사가 외8촌 형님이었고 청년 대원군은 추사로부터 난을 치는 수업을 받은 사실은 잘 알려진 일이다.

 또한 예술에서도 뛰어난 업적을 남겨 시·서·화 일치사상에 입각한 고답적인 이념미(理念美)를 구현하려 하였다.

 학문에서는 실사구시(實事求是)를 주장하였고, 서예에서는 독특한 추사체(秋史體)를 대성시켰으며, 특히 예서·행서에 새 경지를 이룩하였다. 그는 함흥 황초령(黃草嶺)에 있는 신라 진흥왕 순수비(巡狩碑)를 고석(考釋)하고, 1816년에 김경연(金敬淵)과 북한산 비봉에 있는 석비가 조선 건국시 무학대사가 세운 것이 아니라 진흥왕 순수비이며, 진흥이란 칭호도 왕의 생전에 사용한 것임을 밝혀 그 전까지의 잘못을 시정하였다.  

 

그의 서체는 옹방강의 <한송불분론(漢宋不分論)>에 영향을 크게 받았으며 초기에는 명나라 동기창(董其昌)을, 후기에는 송나라 소식(蘇軾)과 당나라의 구양순(歐陽詢)의 서풍(書風)을 본받았다. 그는 역대 명필을 연구하고 그 장점을 모아서 독특한 추사체(秋史體)를 완성하였다. 이 밖에 전각(篆刻)은 청나라와 어깨를 겨누었는데, 별호만큼이나 전각을 많이 하여 서화의 낙관에 사용하였고 추사체가 확립되어감에 따라 독특한 추사각풍(秋史刻風)을 이룩하였다. 그러나 그는 문자향(文字香), 서권기(書卷氣)를 풍기는 높은 경지의 문인화만을 높게 평가하고, 당시 화단에 만연해 있던 진경산수화나 풍속화 등을 낮게 평가하였다. 이로써 모처럼 일어난 민족적인 화풍의 세가 꺾이고 다시금 전통적인 문인화풍으로 되돌아가게 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우리나라 역사상 예명(藝名) 을 남긴 사람들이 많지만 김정희만큼 그 이름이 입에 오르내린 경우도 드물다. 따라서 그에 대한 연구도 학문 예술의 각 분야별로 국내외 여러학자들 사이에서 일찍부터 이루어져왔다. 그 결과 그는 단순한 예술가 학자가 아니라 시대의 전환기를 산 신지식의 기수로서 새로운 학문과 사상을 받아들여 조선왕조의 구문화제체로부터 신문화의 전개를 가능하게 한 선각자로 평가된다.

 

《실사구시설》을 저술하여 근거 없는 지식이나 선입견으로 학문을 하여서는 안됨을 주장하였으며, 종교에 대한 관심도 많아 베이징[北京]으로부터의 귀국길에는 불경 400여 권과 불상 등을 가져와서 마곡사(麻谷寺)에 기증하기도 하였다. 70세에는 과천 관악산 기슭에 있는 선고묘(先考墓) 옆에 가옥을 지어 수도에 힘쓰고 이듬해에 광주(廣州) 봉은사(奉恩寺)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은 다음 귀가하여 71세를 일기로 1856년 10월 10일 작고하였다. 문집에 《완당집(阮堂集)》, 저서에 《금석과안록(金石過眼錄)》 《완당척독(阮堂尺牘)》 《담연제집(潭연濟集)》등이 있고, 작품에 《묵죽도(墨竹圖)》 《묵란도(墨蘭圖)》와 국보 제180호로 지정된 《세한도(歲寒圖)》등이 있다.

 

 

* 세한도 자제문(自題文) 문장 풀이

去年以晩學大雲二書寄來 今年又以藕耕文編寄來 此皆非世之上有

購之千萬里之遠 積有年而得之 非一時之事也

 

지난 해에 두 가지 晩學,大雲 책을 부쳐왔고, 금년에는 耕文編이라는 책을 부쳐왔는데, 이는 모두 세상에 흔히 있는 일이 아니요. 머나먼 천리 밖에서 구한 것이며, 여러 해를 거쳐 얻은 것이요, 일시적인 일이 아니다.

 

且世之滔滔 惟權利之是趨 爲之費心費力如此 而不以歸之權利

乃歸之海外蕉萃枯稿之人 如世之趨權利者

 

더구나, 세상의 도도한 물결은 오직 권세와 이익의 옳음만을 따르는데, 그것을 위하여 마음을 소비하고 힘을 소비함이 이와 같아, 권력 있는 사람에게 주지 않고, 바다 밖의 한 초췌하고 메마른 사람에게 주었으니, 세상 사람들이 권세와 이익을 따르는 것과 같구나. <세상사람이 권력자를 추구하듯 나를 따라주는구나>

 

太史公云 以權利合者 權利盡以交疎 君亦世之滔滔中一人

其有超然自拔於滔滔 權利之外 不以權利視我耶 太史公之言非耶

 

태사공이 이르기를, 권세와 이익으로 합한 자는 권세와 이익이 다하면 교분이 성글어진다고 하였는데, 그대 또한 세상의 물결 속의 한 사람으로 초연히 스스로 도도한 물결에서  (몸을) 빼어 권세와 이익의 밖에 있으니 나를 보기를 권세와 이익으로써 하지 않는 것인가? 태사공의 말이 그른 것인가?

 

孔子曰 歲寒然後 知松栢之後凋 松栢是貫四時而不凋者

歲寒以前一松栢也 歲寒以後一松栢也 聖人特稱之於歲寒之後

今君之於我 由前而無加焉 由後而無損焉

 

공자가 말씀하시기를 '날이 차가워진 이후라야 소나무와 잣나무<또는 측백나무>가 늦게 시드는 것을 안다' 고 하였다. 松栢은 사철을 통하여 시들지 않는 것으로서, 세한 이전에도 하나의 송백이요. 세한 이후에도 하나의 송백이다. 성인이 특히 세한의 후에 그 것을 칭찬하였는데, 지금 그대는 전이라고 더함이 없고, 후라고 덜함이 없구나.

 

然由前之君 無可稱 由後之君 亦可見稱於聖人也耶

聖人之特稱 非徒爲後凋之貞操勁節而已 亦有所感發於歲寒之時者也

 

그러나 이전의 그대는 칭찬할 만한 것이 없거니와,

이후의 그대는 또한 성인에게 칭찬받을 만한 것 아닌가? 

성인이 특별히 칭찬한 것은 다만 늦게 시드는 정조와 경절을

위한 것뿐만이 아니고 또한 세한의 시절에 느끼는 바가 있었던 것이다.

 

烏乎 西京淳厚之世 以汲鄭之賢 賓客與之盛衰 如下비<丕+邑>榜門

迫切之極矣 悲夫 阮堂老人書

 

아! 西漢의 순박한 세상에 급암, 정당시 같은 어진 이에게도

빈객이 시세와 더불어 성하고 쇠하곤 하였으며, 하비의 방문같은 것은 박절이 극에 달하였구나. 슬프다!  완당노인 쓰다...

 

<참고 : 추사고택에서 배포하는 자료를 참고로 한, 마지막 구문의 풀이문>

 

아! 서한의 순박한 세상에 급암,정당시 같은 어진 이에게도

빈객이 시세와 더불어 성하고 쇠하곤 하였고...

 

이는 하규(下규)의 적공(翟公)이 대문에 방을 붙여  '一死一生에 사귀는 정을 알겠고, 一貧一富에 사귀는 모습을 알겠으며,

 一貴一賤ㅡ으로도  곧 사귀는 정을 알 수 있겠노라' 고 하였던

고사에서도 같은 것이었으니, 이렇듯 세상 인심의 절박함이

극에 도달한 것은 참  슬픈 일이로구나.라는 뜻

 

 

 ***黃庭堅(1045-1105) 字는 魯直, 號는 부翁 또는 山谷, 강서성 修水사람이다. 1067년에 進士, 國子監 敎 授.國史編修官이 되었다가 1094년 지방으로 좌천, 마지막에는 귀양가 宜州에서 죽었다. 저서 <山谷集>이 있다 황정견(黃庭堅)은 소식(蘇軾)과 함께 북송(北宋)을 대표하는 시인으로, 박학다식(博學多識)하여 독자적(獨自的)인 세계를 만들어 냈는데, 그의 독자적인 수법을 도가(道家)의 용어를 빌려 표현한 것이 "환골탈태(換骨奪胎)" 라는 말이다. "황정견은 "두보(杜甫)의 시를 일컬어 영단(靈丹)한 말로 쇠를 이어서 금을 이룸과 같다.

(黃庭堅稱杜甫詩 如靈丹一粒 點鐵成金)"라고 말했다."

 

그의 시는 고전주의적인 작풍을 지녔으며, 학식에 의한 전고(典故)와, 수련을 거듭한 조사(措辭)를 특색으로 한다. 강서파(江西派)의 시조로 꼽히며, 《예장황선생문집(豫章黃先生文集)》(30권)이 있다. 서(書)에서는 채양(蔡襄) ·소식(蘇軾) ·미불(米南宮)과 함께 북송(北宋)의 4대가(四大家)의 한 사람으로 일컬어진다. 글씨는 단정하지만 일종의 억양(抑揚)을 지녔으며, 활력있는 행초서(行草書)에 뛰어났다.

 


 

 




 

 

    

   


 

추사 김정희 초상(허필련 작)

      

    김정희(1786-1856)는 증조모가 옹주였던 명문가의 자손이다. 병조판서 김노경의 장남으로 태어났는데 태기가 있자 그의 모친이 전염병을 피해 예산으로 내려왔다.

    그가 모친의 뱃속에 있을 때 팔봉산의 초목이 시들고 우물까지 마르더니 아기가 태어나자 산천초목이 다시 생기가 돌고 우물에서 물이 솟았다고 하고, 세 살 때부터 글씨를 썼다고 한다.

    김정희는 후사가 없던 큰아버지 김노영의 양자로 들어가 어린 시절을 보내고 젊어서는 청나라를 왕래하며 옹방강 등과 사귀며 그들로부터 금석문의 감식법과 서법을 익혔다. 추사 김정희의 또 다른 호 완당은 당시 옹방강에게서 해동 제일의 문장이란 칭찬과 함께 지어 받은 것이다.

    그는 북학파의 거두 박제가의 제자가 되어 실학에 대한 학문을 전수 받았고, 금석학 연구에 몰두하여 북한산의 진흥왕순수비를 발견하며 조선에 금석학파를 성립시켰다.

 

    1819년 30대 초반에 문과에 급제하고 예조참의, 병조참판, 성균관 대사성을 지내며 순탄하게 벼슬길을 걷다가 부친이 비인 현감(현재 충남 서천)을 지내면서 김우영을 파직시켰는데 그 일로 안동 김씨의 탄핵을 받아 김정희는 고금도로 귀양을 갔다. 순조의 배려로 귀양에서 풀렸으나 헌종이 즉위하면서 안동 김씨가 다시 득세하자 1840년 제주도 정포에 다시 유배된다. 부친인 김노경은 그 해 사약을 받고 죽었고 김정희는 영의정을 지내던 친구 조인영의 도움으로 죽음은 면하고 제주도 서쪽 백 리 거리의 외딴 집에서 8년간 유배되고 그는 권력의 무상함을 뼈저리게 느끼고 오로지 학문과 예술에만 정진한다.

 

    이 때 죽음도 불사하고 찾아준 사람이 소치 허유와 역관 이상적이었다.

    허유는 김정희가 가장 아끼던 제자로 죽음도 불사하고 두 번이나 스승을 찾아 그림과 시 그리고 글씨를 배우고 갔다. 훗날 허유는 그때의 심정을 "가슴이 매어지고 눈물이 앞을 가리었다"고 술회했다.

    그는 한국 남종화를 일으킨 서민적이고 지성적인 화가로 아들인 허형, 손자인 허건, 조카인 허백련으로 화풍이 이어졌다. 그는 스승으로부터 "압록강 동쪽으로 소치를 따를 자가 없다"는 칭찬과 함께 호를 받았다. 이들의 작품과 흔적은 진도 운림산방을 찾으면 자세히 볼 수 있다.

 

    김정희는 헌종 말년(1848)에 제주도 귀양에서 풀려났다. 하지만 1851년 친구인 권인돈의 일에 연루되어 66세 노인으로 함경도 북청으로 다시 유배되었다가 2년 만에 풀려났지만 다시는 벼슬길에 오르지 못하고 부친의 묘가 있던 과천의 한 절에 은둔하며 학문에 몰두하다 71세의 일기로 생을 마친다. 현재 그의 묘는 추사고택의 왼쪽 산자락에 있고 묘 앞에는 밑동에서 세 줄기가 올라와 비스듬히 구부러진 반송이 서 있는데 혼탁한 세태에 김정희의 고졸한 예술 정신을 일깨우는 듯

 

 

 

秋史추사 金正喜

김정희의 작품

 

 

 
                                        국화향기 가득한 국립중앙박물관.

 

조선시대  한류스타 김정희

“글씨에서 회화를 보고, 그림에서 글을 읽어보세요” 추사

 

 

가을 남자 추사(秋史)가 왔다.

 

가을에 떠난(10월 10일졸) 조선시대 한류 스타 추사가 우리 곁에 돌아왔다.

김정희 탄생 150주년을 맞이하여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추사 김정희 특별전이 열리고 있다.

글씨의 달인. 글씨의 마술사. 추사체의 창시자 김정희 특별전은 11월 19일까지 열린다.


한자 종주국 중국을 한자(漢字) 하나 가지고 흔들어 놓은 조선인.

판에 박은 듯 한 왕희지 글씨에 식상해 있던 중국인들의 눈을 휘둥그러지게 한 장본인이

김정희다.  스승 박제가와 친분이 있던 당대의 청나라 거유 옹방강을 자신의 팬으로

만들어 버렸으니 분명 한류 스타임에는 틀림없다.

 


                                            추사 김정희의 연습장.

 

이번 전시회에는 그동안 도록으로만 공개되었던 잔서완석루'(殘書頑樓)가 처음 공개되었다.

왕희지의 글씨가 곱고 단정한 글씨라면 추사의 글씨는 자유분방하다.

어린아이 같은 짖궂음속에 천진함이 있고 이야기가 있다.

또한 글씨 속에 힘이 있다. 우악스러운 힘이 아니라 한 획 한 획에 강약이 있다.


추사의 글씨를 글씨로만 바라보면 추사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놓친다.

그림 같은 글씨. 글씨 같은 그림. 추사의 글씨에는 회화가 있다.

한자(漢字)를 통달하고 상형문자를 석파한 자만이 거닐 수 있는 신선의 경지가

추사의 글씨에 녹아 있다.

 


                       잔서완석루

 

 

잔(殘)자와 서(書)자의 사이에 있는 공간을 보자. 이는 글씨를 쓰는 자신만의 공간이다.

석(石)자는 무한한 우주공간으로 열려있다.

추사는 글씨를 쓸 때 한자 한자 쓰기에 앞서 전체 속에 한 글자를 생각했다.


그렇다고 전체를 위하여 한 글자를 희생시키지도 않았다.

오히려 한 글자 한 글자에 독창적인 생명력을 불어 넣었다.

여기에서 추사 김정희만이 구사할 수 있는 회화미가 나온다. 이것이 추사체의 독보성이다. 

 


 전시장 내부

 

김정희 40대에 추사체가 완성되자 국풍체 글씨만 고집하던 조선의 선비들이 경악했다.

규격화 된 글씨만 접하던 중국의 학자들이 충격을 받았다.

붓 한 자루로 대륙을 흔들어 버리자 덩달아 일본에서도 떴다.

한, 중, 일 동양 3국에 우뚝 선 스타가 된 것이다. 어쩜 최초의 한류스타 일런지 모른다.


김정희 글씨가 대륙에 휘날리자 대국이랍시고 거만하기 짝이 없는 중국의 학자와 정치가들이 빳빳하던 목을 꺾었다. 오가는 사신을 통하여 너도나도 추사 김정희 글씨 받기를 간청했다.

그들의 손에 들어간 추사의 글씨는 가보로 모셔졌다.

 


           김정희 종가 벼루와 붓.

 

  추사 김정희는 붓과 벼루를 중요하게 생각했다.  주문이 쇄도한다고 교만하거나 소홀하지

않았다. 한 폭의 글씨를 쓰기위하여 많은 정성과 노력을 기울였다.

이번 전시회에 선보인 편지에는 이런 내용도 있다.

 ‘아천정 세 글자는 쓰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처음 원본에 쓴 것은 마음에 들지 않아 없앴습니다.

  두 번째로 쓴 글씨 역시 마음에 들지 않아 또 없앴습니다. 이것은 세 번째로 쓴 것입니다.’


글씨의 달인 추사 김정희가 세 글자를 쓰면서 세 번이나 다시 썼다니

그 프로 정신에 고개가 저절로 수그러진다. 역시 대가를 웃도는 달인이며 프로다.

 

추사의 난그림

 

이번 전시회의 최고 인기는 역시 세한도다. 관람객들의 줄이 끊이지 않는다.

교과서를 비롯한 많은 매체에 소개되어 눈에 익은 작품이다.

20여개의 댓글(발문)이 줄줄이 달려있다.

그림과 발문을 포함하여 총 길이 13m에 이르는 두루마리는 이번 전시의 압권이다.

 

국보 180호로 지정되어 있는 세한도는 그의 나이 59세에 그린 작품이다.

1829년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아가 성균관 대사성과 이조참판을 역임하다

윤상도의 옥사에 연루되어 제주도에 귀양가 있을 때,

그를 잊지 않고 찾아온 역관 이상적에게 그려준 그림이다.


황량한 들판에 이즈러진 집 한 채. 허리가 굽었지만 푸름을 잃지 않은 노송.

곧게 뻗어 올라간 세 그루의 잣나무. 간결한 터치에 여백이 많지만 꽉 찬 느낌이다.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는 그림이다.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 얘기가 듣고 싶어

발걸음을 멈추게 하는 그림이다. 그림에서 말을 듣고 싶어 하는 묘한 그림이다.

 


              국보 180호 세한도

 

歲寒然後知松柏之後凋也(세한연후 지송백지후조)

세한도 옆에 김정희가 써놓은 발문(跋文)이다.

 '날이 차가워진 다음에야 소나무 잣나무가 늦게 시듦을 안다'라는 구절은

논어 자한편(子罕篇)에서 따온 글귀라고 밝히며 은연중에 자신의 심중을 표출하고 있다.

송백과 같은 기상. 그것은 추사 김정희가 평생을 추구한 이상 일런지 모른다.


조선시대 한류스타 추사 김정희는 21세기 인터넷시대 스타처럼 댓글에서도 원조다.

세한도에는 스스로 달아 놓은 댓글(발문)도 있지만 수많은 댓글이 달려있다.

세한도와 함께 전시된 당대 학자들의 발문은 요즈음 식으로 해석하면 댓글이다.

발문을 읽어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송백은 굳게 지키는바가 있어 범속한 나무들과 어울리지 않고

바위사이에 몸을 숨긴지 오래 되어 부여잡고 당겨도 아무도 오르지 못하네

돌이켜 완당 노인을 생각해보면 비범한 기상으로 푸른 절벽에 올라

문하의 뛰어난 제자들과 도의와 문장을 닦았지

우옹 이상적이 북경 가는 날 완당이 정신의 뿌리를 그려주자

소중히 싸서 만 리를 달려가 북경의 명사들과 시를 지어 읊으니

글씨의 아름다움이 마치 아름다운 달을 보는 듯하다.

ㅡ갑인년 춘정월에 후학 김준학


꿩이 집을 안 짓는 것은 그 빼어남이 싫음이요

꾸밈이 없음은 소중한 것을 아는 바라

둥지가 천년이 되면 마침내 쓰임새를 얻고

지인(至人)은 번민 없이 높은 산을 우러러 봐

맑음과 흐림을 조화롭게 얻고 봉황을 화합하게 해

그 아래 거문고 타며 선왕(先王)의 도를 즐겨 군자의 도를 말했으니 더할 것이 없구나

ㅡ조진조

 


             자작시 수선화

 

몸은 곤궁하나 도(道)는 변함이 없네

북경에 사신이 오고 글과 술로 잔치가 열리자

나에게 보여주는 새한도 추운 숲 한 조각.

봄날 화려함을 뽐내는 복사꽃 배꽃은 어디 갔을까?

푸름이 동심(겨울날의 쓸쓸하고 처절한 마음)을 품고

꿋꿋이 서리와 눈에 굴하지 않네

번영과 쇠퇴를 다루지 말진저

서로 만날 수 있을지 알 수 없어

먼저 이 시로 인사 하노라

ㅡ오현 조무견


화려한 꾸밈은 윗사람의 즐거움을 모으지만 고졸한 모습은 세상과 어울리지 못 하네

바위틈에서 자신만의 모습을 지키고 있으면 무리의 따돌림을 당하지

김군(김정희)은 비범한 학자. 하늘높이 우뚝 솟은 절벽

바름과 순함. 높음과 맑음. 하나의 기질로 통틀어 갖추었네

화창한 봄날 꽃이 필 때 어찌 모든 꽃이 함께하지 않았겠는가

바람과 서리가 한번 사납게 몰아치자 푸르름이 무리 중에 도드라지네

ㅡ풍계분(馮桂芬)

 

150년 전에도 댓글 문화가 있었다


시들지 않은 푸름을 좋아하여 나무가 비범한 절조를 지키나니

자신의 신세를 먼 상상에 실어 세한도에 변치 않은 모습을 그렸네

해외(중국)에도 세월의 변화는 매한가지 성장하고 변화함에 대의를 우러러 보네

온갖 초목이 있어 꽃필 때는 아름다움을 다투지만 꽃필 때는 잠간 사이에 끝나고

오싹한 얼음과 눈 속에서 괴로움을 참고 스스로 지탱 하네

때를 만남에 늦음과 이름이 있으니 남이 알아주지 않는다고 걱정하지 말고

서로 소나무와 잣나무를 사랑하며 백년을 기약해보세

ㅡ요복증(嬈福增)


전에 서유자에게 해외(조선)에서 온 완당이라는 이름을 들었네

가져온 비장의 책은 동영(조선)에서 빛나던 것

속된 귀가 잠시 소영을 듣는 듯.

을사년 초에 문을 활짝 열고 손님을 맞았는데

완당의 고제자(장요손)가 공물을 바치러 북경에 왔네

내가 완당의 친구임을 알고 가져온 그림을 펼쳐

동영(겨울에도 푸른 송백을 가리킴)을 보여주네

도도한 대해의 남쪽. 완당의 마음을 위로하노라

ㅡ장목(張穆)

 


                                       추사 김정희가 사용했던 인장

 

추사 김정희가 독보적인 서체를 창조하고 동양 3국에 우뚝 설수 있었던 것은

젊은 시절(24세)중국에 건너가 옹방강, 조강 등 당대의 청나라 학자들과 교유하며

경학과 금석학을 치열하게 공부했던 것이 커다란 자양분이 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추사 김정희는 서예는 물론 시, 서화, 금석학의 대가의 반열에 올랐다.

이는 타고난 천재성만이 아니다.

벼루 열 개를 구멍 내고 천 자루의 붓을 닳아 없앤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하늘이 높고 푸르다. 추사(秋史)와 딱 어울리는 계절이다.

이 좋은 계절에 150년 전 한류 스타를 만나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다.

무르익어가는 가을과 함께 김정희의 작품을 감상하며 고졸한 조형미를 느껴보는 것도

또 하나의 수확일 것이다.







 

[답사] 추사(秋史) 김정희선생고택(金正喜先生古宅) 탐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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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9/22 현재)"


사)서울문화사학회의 제260회 답사지로 충남 예산군 지역 유적지중,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에 있는 김정희선생고택 전경 입니다. 조선후기
위대한 실학자이며 서예가인 추사 김정희(1786∼1856) 선생은 북학파인 박제가의
제자로서 중국 청나라 고증학의 영향을 받아 실사구시에 입각한 학문을 연구하였습니다.
24세 때에는 아버지를 따라 중국 청나라에 가서 고증학과 금석학 서체 등을 배웠으며,
순조 16년(1816)에 북한산 진흥왕 순수비를 고증하여 밝혀 내었습니다.특히 서예에 뛰어나
추사체를 이룩하였고 묵화에도 조예가 깊어 많은 작품을 남기었습니다. 이곳에는 추사의
옛집을 비롯하여 김정희의 묘, 화순옹주와 남편인 김한신의 합장무덤이 있고, 그 옆으로
정조(재위 1776∼1800)가 내린 열녀정문, 백송(천연기념물 제106호) 기념관 등이 있습니다.  


 

 

 

 

 

 

 

 

 

 

 

 

 

 

 

 

 

 

 

 

 

 

 

 

 

 

 

 

 

 

 

 

 

 

 

 

 

 

 

 

 

 



김정희선생유적(金正喜先生遺蹟)  


-종    목 충청남도 기념물 제24호   

-지 정 일 1980.10.23 

-소 재 지 충남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 799외 13필 


조선 후기 학자인 추사 김정희(1786∼1856)의 유적으로 추사고택과 이 일대를 말한다. 이곳에는 추사의 옛집을 비롯하여 화순옹주와 남편인 김한신의 합장무덤이 있고, 그 옆으로 정조(재위 1776∼1800)가 내린 열녀정문, 백송(천연기념물 제106호), 김정희의 무덤이 있다.



김정희는 북학파인 박제가의 제자로서 중국 청나라 고증학의 영향을 받아 실사구시에 입각한 학문을 연구했다. 24세 때에는 아버지를 따라 중국 청나라에 가서 고증학과 금석학·서체 등을 배웠으며, 순조 16년(1816)에 북한산 진흥왕 순수비를 고증하여 밝혀내었다. 헌종 6년(1840)에 윤상도 옥사사건에 연루되어 제주도에 9년간 유배생활을 하면서 그동안 연구해 온 추사체를 완성하였다. 유배생활에서 돌아와 아버지 무덤이 있는 과천에서 학문과 예술에 몰두하다가 생을 마쳤다.



이곳은 조선후기 위대한 실학자이며 서예가인 추사 김정희(1786∼1856) 선생의 유적지이다. 선생은 순조 9년(1809)에 생원이 되고 그 후 규장각 대표 충청우도 암행어사, 헌종 2년(1836)대사성 이조참판에 이르렀다. 선생은 일찍이 청국을 통하여 국제문화를 호흡하고 금석학 및 고증학을 깊이 연구 국학의 문을 열었다. 특히 서예에 뛰어나 추사체를 이룩하였고 묵화에도 조예가 깊어 많은 작품을 남기었다. 유적지내에는 고택, 화순옹주 홍문, 백송, 김정희묘 등이 있다.

 




김정희선생고택(金正喜先生古宅)<안채.사랑채>


-종    목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43호     

-지 정 일 1976.01.08

-소 재 지 충남 예산군 신암면 추사고택로 261 

-수량/면적  2동

-관리자(관리단체) 예산군관광시설사업소 추사고택담당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실학자이며 서예가인 추사 김정희(1786∼1856)의 옛 집이다. 안채와 사랑채 2동짜리 건물로 조선 영조(재위 1724∼1776)의 사위이자 김정희의 증조할아버지인 김한신에 의해 지어진 집이라고 한다. 건물 전체가 동서로 길게 배치되어 있는데, 안채는 서쪽에 있고 사랑채는 안채보다 낮은 동쪽에 따로 있다. 사랑채는 남자 주인이 머물면서 손님을 맞이하던 생활공간인데, ㄱ자형으로 남향하고 있다. 각방의 앞면에는 툇마루가 있어 통로로 이용하였다.

 

안채는 가운데의 안마당을 중심으로 사방이 막힌 ㅁ자형의 배치를 보이고 있다. 살림살이가 이루어지던 안채는 문을 들어서면 바로 보이지 않도록 판벽을 설치하여 막아놓았다. 대청은 다른 고택들과는 달리 동쪽을 향하였고 안방과 그 부속공간들은 북쪽을 차지하고 있다.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집이며, 지형의 높낮이가 생긴 곳에서는 사람 인(人)자 모양의 맞배지붕으로 층을 지게 처리하였다.


▶김정희묘(金正喜墓) -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88호



조선 후기의 실학자이자 서화가인 추사(秋史) 김정희(1786∼1856)의 묘이다.

순조 19년(1819) 문과에 급제하여 암행어사 등 여러 관직을 거치면서 헌종 2년(1836) 성균관 대사성에 올랐다. 그러나 윤상도의 옥사사건에 연루되어 헌종 6년(1840)에 제주도로 9년간 유배되었다가 헌종 말년에 귀양에서 풀렸다. 제주도에 지내면서 그 동안 연구해 온 추사체를 완성하였다. 철종 2년(1851) 친구인 영의정 권돈인의 일에 연루되어 또 다시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되었다가 2년 만에 풀려 돌아왔다. 그 뒤 아버지 묘소가 있는 과천에 지내면서 학문과 예술에 몰두하다가 생을 마쳤다.

묘지는 충청남도 예산에 있는 추사의 옛 집에서 약 200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으며, 2단으로 만들어져 있다. 묘 앞에는 상석이 놓여 있고, 오른쪽에는 비석이 세워져 있다.

추사고택 주변에 증조부 월성위 김한신과 화순옹주의 묘소가 자리하고 있고 고조부인 김흥경묘 추사묘 등이 있다. 추사묘는 추사고택에서 200여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으며, 구릉 2단으로 정지한 후 안치되어 있다. 묘앞에는 상석이 놓여 있고 묘의 바로 오른쪽 앞에는 비석이 세워져 있는데 장방형의 화강석재 대좌위에 오석의 비신이 올려져 있고 오석위에는 옥개형 이수를 올렸다. 비신의 전면(前面)에는 "완당선생경주김공휘정희묘"(阮堂先生慶州金公諱正喜墓)라고 각서되어 있고 나머지 3면에는 비문이 적혀있다.


▶김정희필 세한도 (金正喜筆 歲寒圖) 


-종    목 국보  제180호  

-지 정 일 1974.12.31

-소 재 지 서울 용산구  서빙고로 137, 국립중앙박물관 (용산동6가) 

-소유자(소유단체) 손창근

-관리자(관리단체) 국립중앙박물관


추사 김정희(1786∼1856)는 실학자로 청나라 고증학의 영향을 받아 금석학을 연구하였으며 뛰어난 예술가로 추사체를 만들었고 문인화의 대가였다. 이 작품은 김정희의 대표작으로 가로 69.2㎝, 세로 23㎝의 크기이다. 이 그림은 그가 1844년 제주도에서 귀양살이를 하고 있을 때 그린 것으로 그림의 끝부분에는 자신이 직접 쓴 글이 있다. 이 글에서는 사제간의 의리를 잊지 않고 북경으로부터 귀한 책들을 구해다 준 제자 이상적의 인품을 소나무와 잣나무에 비유하며 답례로 그려 준 것임을 밝히고 있다.


한 채의 집을 중심으로 좌우에 소나무와 잣나무가 대칭을 이루고 있으며, 주위를 텅 빈 여백으로 처리하여 극도의 절제와 간략함을 보여주고 있다. 오른쪽 위에는 세한도라는 제목과 함께 ‘우선시상’, ‘완당’이라 적고 도장을 찍어 놓았다. 거칠고 메마른 붓질을 통하여 한 채의 집과 고목이 풍기는 스산한 분위기가 추운 겨울의 분위기를 맑고 청절하게 표현하고 있다. 마른 붓질과 묵의 농담, 간결한 구성 등은 지조 높은 작가의 내면세계를 보여 주고 있다. 인위적인 기술과 허식적인 기교주의에 반발하여 극도의 절제와 생략을 통해 문인화의 특징을 엿볼 수 있는 조선 후기 대표적인 문인화로 평가되고 있다.

 

▶김정희선생필적암각문(金正喜先生筆蹟岩刻文) 


-종    목 충청남도 기념물 제151호   

-지 정 일 1998.12.24

-소 재 지 충남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 산73-5

-소유자(소유단체) 화암사


충남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 202에 있는 오석산 화암사(烏石山華巖寺) 는 조계종 제7교구 수덕사(修德寺)의 말사로 조선 영조 28년(AD1752) 왕의 부마인 월성위(月城尉)김한신(金漢藎)이 절을 중창했습니다. 이 때 절을 중창한 김한신이 추사의 증조부였으며, 중창주 김한신은 영조 때 영의정을 지낸 김흥경(金興慶)의 아들로써 영조의 둘째딸 화순옹주(和順翁主)를 부인으로 맞았으나 자식이 없어 형님의 아들 이주(毗柱)를 양자로 들였습니다. 다행이 이주는 네 아들을 두었고, 그 중 넷째 아들 노경(魯敬)이 추사를 낳았습니다.


열 살까지 고향에서 자란 추사에게 증조할아버지가 세운 화암사는 그의 놀이터에 속했습니다. 대웅전 뒤에 깎아지른 바위가 병풍처럼 펼쳐져있어 그대로 병풍바위라고 부르기도 하고 모습이 특이하다고 하여 화암(華巖)이라고도 부르며, 이 바위의 이름이 곧 절의 이름이 된 것입니다.


 이 바위군의 편편한 면 한가운데에 추사의 친필 각자인 詩境(시경)이란 두 글자와 그 아래에 天竺古先生宅(천축고선생댁)이란 글귀가 새겨져 있습니다. 그리고 이 곳에서 500여m 떨어진 곳에 ‘소봉래(小蓬來)’라는 글귀가 있으며, 이 글귀 밑으로 ‘추사제(秋史題)’라 쓴 작은 글씨도 보입니다. 작은 사찰입니다만 조선의 명필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의 가문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으며 지금도 추사체(秋史體)를 연구하는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월성위김한신묘(月城尉金한신墓)-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89호  


추사 김정희 선생의 증조부(曾祖父)인 김한신(金漢藎)은 1720(숙종 46년) 영의정(領議政) 김흥경(金興慶) 아들로 태어나 13세때에 영조(英祖)의 차녀 화순옹주(和順翁主)와 결혼하여 월성위(月城尉)로 봉해졌다. 추사선생 일문(一門)을 흔히 월성김문(月城金門)으로 부르는 것은 여기에서 비롯된다.


벼슬은 오위도총부도총관(五衛都摠府都摠官) 제용감제조(濟用監提調)에 이르렀다. 글씨를 잘 썼으며 시문에 능하였다. 시호는 정효공(貞孝公)이다. 김한신(金漢藎)이 38세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자 화순옹주(和順翁主)는 애도(哀悼)의 정(情)이 극에 달하여 곧 부군을 따라 세상을 떠나셨다. 옹주는 부마의 묘에 합장(合葬)되었다.


▶화순옹주홍문 (和順翁主紅門)-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45호     


화순옹주의 정절을 기리는 열녀문이다. 추사 김정희의 증조할머니이자 조선 영조(재위1724∼1776)의 둘째딸인 화순옹주는 남편인 김한신이 3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자 그 슬픔을 이기지 못하여 음식을 입에 대지 않았다. 아버지 영조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슬픔을 이겨내지 못한 옹주는 결국 세상을 떠났다. 영조는 남편에 대한 옹주의 정절을 칭찬하면서도 자신의 뜻을 따르지 않은데 대한 아쉬움 때문에 열녀문을 내리지 않았다. 지금의 열녀문은 훗날 정조(재위 1776∼1800)가 내린 것이다.  옹주는 조선(朝鮮) 왕조(王朝)의 왕실에서 나온 유일한 열녀라고 한다.

 

묘막터는 원래 53칸의 큰 건물이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불에 타서 없어지고 주춧돌만 남아있다. 앞면 8칸·옆면 1칸 규모이며 근래에 담장을 설치하였다.



▶예산 용궁리 백송(禮山 龍宮里 백송) - 천연기념물  제106호  


백송은 나무껍질이 넓은 조각으로 벗겨져서 흰빛이 되므로 백송 또는 백골송(白骨松)이라고도 한다. 중국이 원산지로서 조선시대에 중국을 왕래하던 사신들이 가져다 심은 것이라고 전한다.


예산의 백송은 나이가 약 200살 정도로 추정되며, 높이 14.5m, 가슴높이 둘레 4.77m이다. 줄기가 밑에서 세 갈래로 갈라져 있는데 두 가지는 죽고 한 가지만 남아 빈약한 모습이다. 나무껍질은 거칠고 흰색이 뚜렷하며, 주변의 어린 백송들과 함께 자라고 있다. 이 나무는 추사 김정희 선생이 조선 순조 9년(1809) 10월에 아버지 김노경을 따라서 중국 청나라 연경에 갔다가 돌아올 때 백송의 종자를 필통에 넣어가지고 와서 고조부 김흥경의 묘 옆에 심었던 것이라고 전해진다. 김정희 선생의 서울 본가에도 영조(재위 1724∼1776)가 내려 주신 백송이 있어 백송은 김정희 선생 일가의 상징처럼 여겨지고 있다.


예산의 백송은 희귀하고 오래된 소나무로서 생물학적 보존가치가 클 뿐만 아니라, 중국과의 교류관계와 당시 사람들이 백송을 귀하게 여겼던 풍습을 알 수 있는 문화적 자료로서의 가치가 크므로 천연기념물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수령(樹齡)은 200년이며, 나무의 크기는 높이가 14.5m, 가슴높이의 둘레가 4.77m이다. 수관폭은 12m 정도로 발달해 있다.


백송은 중국원산의 소나무과의 일종인데 이 백송은 용궁리 동네에 살고 있는 김씨의 선조 묘지 앞에 서 있다. 수고 14.5m쯤 되고 원래 지표면 부근에서 줄기가 3갈래로 갈라져 있었으나 지금은 하나만 살아남아 있다.


▶북한산 진흥왕순수비지(北漢山 眞興王巡狩碑址)-사적 제228호

▶서울 북한산 신라진흥왕순수비(서울 北漢山新羅眞興王巡狩碑) - 국보 제3호

▶서귀포 김정희유배지(西歸浦 金正喜流配址) -사적 제487호 

▶김정희 종가 유물(金正喜 宗家 遺物) -보물 제547호 

▶추사 김정희 서신(秋史 金正喜 書信) - 경기도유형문화재  제244호 


                            [국악명상모음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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