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곡(小曲)1 / 황동규
당신 모습이 처음으로 내 마음 속에 자위떴을 때 나는 불 속에 서 있는 것 같았습니다 바위 위에 하나의 금이 기어가다 서듯 그렇게 서 있는 것 같았습니다 하나의 불길 속에
조용함이었습니다 타는 불 너무 환해 귀 속과 귀 밖이 구별 안 되는, 그러나 귀 열고 기다리는 뜰에 선 나뭇가지의 잎 하나하나가 귀처럼 뾰족 섰다가 재로 사그라지는 외로움......당신 모습이 처음으로 내 마음 속에 자위떴을 때
소곡 2 / 황동규
언젠가 흘러가는 강물을 들여다보다가 문득 그 속에 또 흘러가는 구름을 보았습니다
강물을 들여다보는 나를 들여다보는 당신 나를 흘러가게 하며 또 무엇인가 내 속에 흘러가게 하는, 흐르는 구름 속에 햇빛이 축포처럼 터지고, 허나 소리들이 모두 눈감고 숨죽이는 그런 마음을 다시 내 속에 띄우는 당신
소곡 3 /황동규
내 마음 안에서나 밖에서나
당신이 날것으로 살아 있었기 때문에
나는 끝이 있는 것이 되고 싶었습니다.
선창에 배가 와 닿듯이
당신에 가 닿고
언제나 떠날 때가 오면
넌지시 밀려나고 싶었습니다.
아니면 나는 아무것도 바라고 있지 않았던 것을.
창밖에 문득 후득이다 숨죽이는 밤비처럼
세상을 소리만으로 적시며
남몰래 지나가고 있었을 뿐인 것을.
소곡 4 / 황동규
그것은 첫눈 내린 저녁, 당신과 함께, 혹은 당신의 없음과 더불어, 들판에 나갔다가 놀랐습니다 새들이 높이 날아도 작아지지 않고 아무리 걸어도 마을이 가까워지지 않습니다
몸부림과 몸 사이의 거리
언제까지나 나는 걸어야 하는가 새들의 날개 뒤의 어두운 황혼, 그 황혼 속의 알맞은 돌아옴, 그 때까지 내 당신을 잊지 않음, 혹은 막막한 잊어버림, 그 깊이를...나는 들여다본다, 들여다본다, 깊이 없는 황당한 깊이를 나는 들여다본다, 꿈없이 걸으며, 원근법에서 막 해방된 세계를, 그 놀라움을
소곡 5 / 황동규
당신이 나에게 안도와 불안을 함께 주신 것은 나에게 기도가 있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혹 눈발이 드문드문 내리는 날 허전히 걸어갈 때에 그 의미는 마음 속에서 절박한 기쁨으로 바뀌어오는 것이었습니다 눈 내리는 속에서 바알갛게 불 밝힌 창을 바라보는 것, 새벽녘 캄캄히 꿈이 끝날 적쯤해서 人馬의 소리가 들려오는 것 허나 다음에는 항상 떨리는 마음 뿐이었습니다 그 떨림 지속되면, 이제는 告悔까지 가벼워지는, 그 가벼움 속에서 당신에게 다가가는 그런 길, 다가가는 내가 아무리 해도 보이지 않는
소곡 6 / 황동규
당신과 나 사이에 있는 것은 낯선 곳으로 이끄는 한 칠 벗겨진 이정표와도 같은 것을 강화나 강릉에서 같은 거리 같은 모습으로 서 있는 그것은 새 하나 날지 않는 어느 겨울날 오후
지금 옷 벗은 나무들 뒤로 걸어가며 보는 하늘, 빈 나뭇가지들이 박힌 겨울 하늘 어쩌면 지금까지 내 사랑해 온 것은 당신보다는 차라리 이 겨울 하늘의 침묵, 앞서 걸어도 뒤서 걷는 일이 되는, 지금 들어도 후에 없었던 말이 되는 이 막막함, 이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소곡 7 / 황동규
나의 마지막이 당신의 마지막처럼 될는지도 모른다는 것은 얼마나 내 마음을 다스롭혀온 일이었던가
당신에게 잠시 들어있던 그 체온
나의 마지막이 숲 속에서 잃어버린 길처럼 되든지, 어둠 속에 몸부림을 죽인 바다와 같이 되든지...그것은 모두 당신 몸 속에서 한 번 살다 나온 입김과도 같은 것이고, 그 때 나도 꿈꾸듯이 살아있던 것의 기쁘고 슬픈 온도를 당신에게 바칠 수 있을 것입니다
소곡 8 / 황동규
나의 이 기다림이 즐거운 약속과 같은 것으로 바뀌어질 때, 몇 번인가 연거푸 보는 연극의 마지막 막과 같은 것으로, 그것이 끝날 무렵 해서는 언제나 개선가 같은 것이 들려오곤 하였지만은, 또 강 언덕에 며칠 밤새 퍼붓는 눈보라와 같은 것으로 바뀌어질 때, 나는 지나가리, 숲 속에 겨울이 지나가듯이, 봄이 와 여기저기 황홀한 첫 꽃들을 여는 것을 남모르게 보다 슬그머니 지나가버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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