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환 기
한국 추상미술의 선구자 1913년 2월 27 일 ~ 1974년 7월 25일
산월 1962년
환기 미술관 소장
“내 고향은 전남 기좌도.
고향 우리 집 문간을 나서면 바다 건너 동쪽으로 목포 유달산이 보인다.
순하디 순한 마을 안산에는 아름드리 청송이 숨 막히도록 들어차 있고
옛날에 산삼도 났다지만 지금은 더덕이요, 복령, 가을이면 버섯이 무더기로 난다.
그저 꿈같은 섬이요
꿈속 같은 내 고향이다.”
- 수화 김환기 -
다른 하나는 물위에 내려앉은 고향의 달일까!
그리운 고향의 출렁임 같은 서정이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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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월 1958년
73 x 50 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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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1955년
42 x 51 cm
“종달새 노래하는 봄이여,
무엇인지 모를 잔뜩 그리워지는 내 고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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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 매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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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의 노래
1957년 162.4 x 130.1 cm
환기 미술관 소장
영원 시리즈는 파리 시절을 통해 그가 맺은 결실이었다.
달, 학, 사슴 등의 십장생에는 영원하고자 하는 한국인들의 꿈이 녹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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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제 V-66
1966년 177.5 x 126 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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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과 항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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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슴
1958년 64.5 x 81 cm
환기 미술관 소장
“내 예술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소. 여기 와서 느낀 것은 시(詩)의 정신이오.
예술에는 노래가 담겨야 할 것 같소.
거장들의 작품에는 모두가 강력한 노래가 있구려.
지금까지 내가 부르던 노래가 무엇이었다는 것을
나는 여기 파리에 와서 구체적으로 알게 된 겻 같소.
밝은 태양을 파리에 와서 알아진 셈이오.”
- 김환기. 1957.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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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V-66 1966년
환기 미술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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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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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호섬을 나르는 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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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아리
1950년 경 60 x 92cm
환기 마술관 소장
이조항아리
지평선 위에 항아리가 둥그렇게 앉아있다.
굽이 좁다 못해 둥실 떠 있다.
둥근 하늘과 둥근 항아리와
푸른 하늘과 흰 항아리와
틀림없는 한 쌍이다.
똑
닭이 앍을 낳듯이
사람의 손에서 쏙 빠진 항아리다.
- 김환기. 1946.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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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VII-65
1965년
환기 미술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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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과 매화와 새
1959년 100 x 65 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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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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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인생에 자연처럼 편안한 사람이 있다.
그의 아내 김향안(金鄕岸, 1916~2004.2.29)이다.
본명은 변동림으로 촉망받는 수필가이자 미술평론가였으며
천재시인 이상의 아내였기도 한 그녀를
김환기는 운명처럼 만났다.
김향안은 남편이었던 시인 이상(李箱)이 결혼 3개월 만에 사망한 후,
7년 뒤에 김환기를 만나 재혼을 한 것이다.
또한 화가 구본웅의 서이모(庶姨母)이기도 하다.
천상 미술 밖에 모르던 그를 이끌었던 것은 아내 김향안이었다.
김향안은 자신의 꿈을 접은 대신
김환기의 미술세계를 이해하고 완성시킨
30년의 세월을 같이한 최고의 파트너였다.
남편 김환기와 사별 후 서울 부암동에 환기미술관을 설립하는 등
수화를 미술사의 한 부분으로 만드는 데 많은 기여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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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ll-69 1969년
환기 미술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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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제 23-VII-71#218
1971년 211 x 291 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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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화와 항아리
1957년 53 x 38 cm
환기 미술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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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밤의 화실
1958년 98 x 79 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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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난열차
1951년 37 x 53 cm
"부산살이 3년에 밤마다 나는 꿈을 꾸었다.
내 살던 산장 뜨락에 산삼이 나고 더덕 순이 돋고...
이 꿈도 필시 쑥대밭이 된 서울 소식이 너무 귀에 익었던 까닭일 게다.
나도 천지가 쑥대밭이 된 세상을 살았다.
하늘을 보아도 산천을 바라와도 태양까지도 모두가 무심한 것들.
누구를 위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존재한 것들.
정말 3년 만에 나 살던 서울에 돌아와서 꽃가게 있음을 나는 몰랐다.
오, 삶의 즐거움이여, 아름다움을 바라고 의식하는 진실로 사람됨이여."
콩나물시루 같이 실려 가는 피난열차는 고단한 피난 행렬이지만
김환기는 그러한 각박한 상황을 천진하고 해학적으로 표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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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교
1954년 100 x 65 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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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아리와 매화
1956
“한 아름되는 백자 항아리를 보면 촉감이 동한다.
사람이 어떻게 흙에다 체온을 넣었을까?!“
-수화 김환기-
김환기 작품 속에 등장하는 달 항아리,
모두 소박하지만 어느 것 하나 같은 것이 없다.
여인과 함께 등장하는 달 항아리는 여인의 가슴처럼 보드랍고
동그란 얼굴처럼 포근하다.
김환기의 작품 속에서 달 항아리는
따스한 온기를 지닌 하나의 생명체로 다시 태어났다.
“나의 예술의 모든 것은 조선 백자항아리에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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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새 두마리
1962년
환기 미술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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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항아리와 날으는 새
1958년
파리 시절(1956~1959) 3년 동안
김환기가 완성시킨 것은 우리의 서정이었다.
그는 파리 시절을 통해 자신의 예술세계를 확인 했고
우리민족의 노래를 찾아냈다.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파리에서 개인전을 가졌던 김환기.
“김환기 그는 한국인이다.
그의 그림은 그의 민족을 상징하는 시적인 감정을 지니고 있다.
그의 예술은 현재적인 동시에 전통적이다.”
- 르 뺑뜨르(Le Perntre) 195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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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별 1964년
환기 미술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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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의 소리 4-1-1966
1966년 178 x 128 cm
환기 미술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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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제 12-V-70#172
1970년 236 x 173 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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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아리
1964년 84 x 169 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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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
1950년 경
환기 미술관 소장
환기의 불루라면 누구든지 그 아름다운 파란색에 넋을 잃게 된다.
작가의 마음을 상징하는 색채는 아니었을지...
이 푸른색은 고향의 바다이자 유난히 푸른 한국의 하늘색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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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만개의 점 04-VI-73#316
1973년
263 x 205 cm
뉴욕 시기 대표작인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10만개의 점’ 등은
하늘의 별, 사랑, 인간의 인연을 은유하는 푸른 점들이 화폭을 뒤덮은 전면화로,
수화 김환기 작업의 백미로 꼽힌다.
‘이점들은 정신을 갈아 앉혀주는 서정성이 있다.‘
-아트 뉴스(Art News) 로렌스 캠불(Rowrence Cambel) 1971년 9월호-
‘둥근 점을 조그만 사각형으로 둘러싼 그의 솜씨는 무한히 그칠 줄 모른다.’
-The New York Times의 존 캐너디(John Canady) 1971년 10월2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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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아리와 매화가지
1956년
환기 미술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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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의_노래
금방이라도 학이 날고 물고기가 헤엄치고
사슴이 뛸 것만 같은 ‘영원’의 소재들은
그가 파리 시절을 통해 깨달은 자긍심 우리민족의 노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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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아리와 꽃가지
78 x 100 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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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와 달 1948년
캔버스에 유채 73 x 61cm
환기미술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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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화와 달
파리 생활(1956 ~ 1959)
“나는 동양 사람이요 한국 사람이다.
내가 아무리 변모한다 하드라도 내 이상의 것은 할 수가 없다.
세계적이라면 가장 민족적이어야 하지 않을까.
예술이란 강렬한 민족의 노래인 것 같다.
파리라는 국제경기장에 나서니 우리의 하늘이 역력히 보였고
우리의 노래가 강력히 들려 왔다.”
-수화 김환기-
시대와 유행에 민감했던 당시 다른 예술가들과는 달리
김환기가 정작 파리에서 발견한 것은 한국인으로서의 자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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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아리
1957년 88 x 143 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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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의 편지에 이른 아침부터 뻐꾸기가 울어댄다 했다.
뻐꾸기 노래를 생각하며 종일 푸른 점을 찍었다.”
그의 일기에서 느낄 수 있듯이
조국의 자연과 가족과 친구와 제자들을 생각하면서
종일 점을 찍어나간 그의 작품의 내면의 세계.
“내가 그리는 선, 하늘 끝에 더 갔을까, 내가 찍은 점,
저 총총히 빛나는 별만큼이나 했을까.
눈을 감으면 환히 보이는 무지개보다 더 환해지는 우리강산...“
그가 찍어내는 점, 그가 그려나가는 선이 무심코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하나 의미를 되새긴 것이란 것,
그것은 다름 아닌 그리움이란 것을 일기는 말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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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제20-llll-70 #167
197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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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아리와 매화
1954년 46 x 53 cm
환기 미술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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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비가 오락가락 날이 이러면 제작을 시작하고 싶지도 않고,...
방 안을 약간 정리하고 남녘 창 문지방에 책상을 놓고 지금 편지를 쓰오.
쓰다가 붓을 멈추고 마당을 내다보면
노랗고 빨갛고 또 무슨 빛깔의 꽃들이 우중(雨中)에 피어 있오.
........(생략)
이럴 때 내 곁에 너 있으면 오죽 좋을까.
비 내리는 정원을 둘이서 내다보고 있으면 오죽이나 좋을까.
아내에게 주는 편지 7월28일
먼저 파리에 가서 있는 김향안 여사에게 보낸 편지의 일부이다.
뭉클하게 전해오는 애틋한 그리움...시를 읽는 것 같다.
참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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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아리
1956년
환기 미술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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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VII-71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1970 코튼에 유채
292 x 216 cm
“내가 그리는 선, 하늘 끝에 더 갔을까?
내가 찍은 점은 저 총총히 빛나는 별 만큼이나 했을까?
눈을 감으면 환히 보이는 무지개보다 더 환해지는 우리 강산...“
1970년 1월 뉴욕 - 수화 김환기-
“그림에는 노래가 담겨져야 합니다.
그 노래는 민족의 노래입니다.”
한국 추상미술의 거장
그가 노래한 것은 한국의 아름다움이었다.
가장 한국적이면서도 가장 세계적인 작가이다.
가장 한국적인 정서를 담고 있으면서도 세계인들이 공감하는 작가이다.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뉴욕 시대에 제작한 점화들이다.
화면을 가득 채운 채 살아 숨 쉬는 듯한 수많은 색 점들.
이 수많은 점들 가운데 어느 하나가 나 자신을 내려다보고
이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어느 누군가가 그 하늘의 무수한 별들 중에 한 별을 쳐다본다.
조국에 대한 그리움, 나와 자연과의 관계,
더 나아가 나 자신과 세상과의 관계를 표현한 것은 아닐지...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 등의
어떤 철학적인 명상의 단계에 이르렀음을 느낄 수 있다.
화폭 가득히 채운 수많은 점들,
점 하나하나에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울림을 전하는 이 그림은
김환기의 친구인
시인 이산(怡山)김광섭의 시‘저녁에’의 한 구절에서 따온 타이틀이기도 하다.
고국을 떠난 지 7년 만에 새로운 작품으로 자신의 존재를 알린 계기로
1971년 신설된 한국일보 주최의 한국미술대상전에서 대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이 큰 점화는 진로를 찾지 못하고 침체되어 있던 한국미술계에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시는 그림이 되고 그림은 노래가 되었다.
김환기 생가
국가지정 중요 민속 문화재 제 251호
전남 신안군 안좌면 안좌서부길 38-1
이곳은 수화 김환기(樹話 金煥基, 1913~1974) 화백이 태어난 곳으로
그의 유년기와 청년기 작품 활동이 이루어졌던 곳이다.
20세기 초반 전통가옥이 근대로 들어서면서 사회의 변화에 따라
실용적으로 변용되어 가는 모습을 잘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이기도 하다.
김환기는 전라남도 신안군 기좌면(현 안좌면)에서
안좌도 지역의 지주였던 김상현씨의 1남 4녀 중 넷째로 태어났다.
김환기는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미술 공부를 하기위해
고향을 떠나 동경으로 유학길에 오른다.
1933년(21살)에 동경 일본 대학 예술학원 미술부에 입학하여
<아방가르드>조직에 참여하는 등,
귀국한 1930년대 후반 경부터 가장 전위적인 활동의 하나였던
추상미술을 시도, 한국의 모더니즘을 이끌었다.
나무를 좋아해서 수화(樹話)라고 호를 지었다는 화가 김환기.
김환기는 우리나라 모더니즘의 제1세대 화가로
한국의 고전적 소재를 추상적 조형언어로 양식화하여
한국미술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한 화가로
동양의 직관과 서양의 논리를 결합하여 한국적 특성과 현대성을 겸비한
뛰어난 작품들을 선보였다.
그의 예술은 56년부터 59년까지 약 3년간의 파리 시대와
제 7회 상파울로 비엔날레에 한국대표로 참가하여
회화부분의 명예 상을 수상한 해인 63년부터
작고한 74년에 이르는 뉴욕시대가 가장 왕성한 활동을 했던 시기이다.
파리 시대와 서울시대를 포함한 50년대까지
그의 예술은 엄격하고 결제된 조형성 속에
한국의 고유한 산, 달, 학, 매화, 백자와 같은 동양적인 소재를
서양적 기법으로 더욱 밀도 높고 풍요로운 표현으로
한국적 정서를 아름답게 구현한 구상작품부터
60년대 후반 뉴욕 시대에는 점, 선 면 등 상징화한 추상 작품까지.
순수한 조형적 요소를 보다 보편적이고 내밀한 서정의 세계로 심화시켰다.
뇌출혈로 1974년 7월 12일에 수술을 받고
그 후 의식불명으로 12일간 있다가 7월 25일에 생을 마감했다.
그의 나이 61세의 아까운 삶이다.
1992년 그의 부인인 김향안 여사가 서울 부암동에 환기미술관 건립하였고
마침 김환기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전을 1913년 6월9일까지 개최하고 있다.
생전에 유화 기준으로 3000여점의 작품을 남긴 김환기는
이중섭(500여점 이하 추정), 박수근(200여점 추정) 등
동시대 작가들에 비해 일단 작업량에 있어 비교가 안 된다.
평생을 미술만을 생각하며 살았던 김환기.
그는 떠났지만 그가 평생을 바친 예술혼과 열정은
우리들의 가슴 속에 그대로 살아있다.
그가 세상에 남긴 한국의 서정은
이제 우주의 울림이 되어 영원을 노래하고 있다.
마치 죽음을 예견한 듯 사망 한 달 전에 남긴 말이다.
“죽을 날도 가까워 왔는데 무슨 생각을 해야 하나,
꿈은 무한하고 세월은 모자라고...“
끝이 없었던 그의 예술혼과 열정이다.
< 여행단상 >
한 두 시간이나 잤을까!
거의 뜬 눈으로 밤을 새우다시피 하곤 캄캄한 새벽길을 헤치고 집을 나섰다.
가슴 뛰는 설레임이 먼저 앞서 달음질 치고...
내가 꿈만 같은 그 곳, 화가 김환기가 태어난 곳인
안좌도라는 섬을 간다!
안좌도라니..!
섬 여행을 좋아하는 나는 그 이름만으로도 가슴이 뛰었다.
때 묻지 않은 조그만 섬이면,
통통배 타고 건너는 섬이면 더 좋을 텐데...!
어디일까? 내 생각이 미치지 못하는 멀고 먼 아득한 섬,
꿈속의 섬, 동경의 섬이었다.
심해에 많은 보물이 묻혀있다는 목포의 신안군,
그 신한군의 압해도 송공선착장에서 배를 타고
암태도의 신석에 있는 오도 선착장으로 향했다.
그 낯선 섬 이름만으로 행복했다.
배의 제일 뒤에 자리를 잡고 바다를 향해 난간에 기대섰다.
생각보다 바람이 매서울 정도로 차지만 내가 배를 타는 이유인 걸 어쩌랴.
서서히 멀어지는 아담한 마을을 뒤로하고
세차게 소용돌이치며 굽이치다 물보라 뿜어대며 하얗게 부서지는 물길!
배 뒷전에서 뿜어내는 하얀 물길은 긴 곡선을 그리며 따라오다 멀리에서 점점 사라졌다.
계속 따라오는 하얀 물길을 끼룩끼룩 갈매기 몇 마리가 날아왔다.
아! 새우깡을 잊었구나! 미안해! 얼마나 후회를 했는지...
외딴 섬이라 없을 것만 같아
보따리 속에 끼어 넣었던 소중한(^^) 맥주 한 캔을 따고 mp3을 꽂았다.
나의 배 여행은 언제나처럼 이렇게 시작된다.
한 모금을 마시니 환한 웃음이 절로 나고
두 모금을 마시니 온 세상이 눈부시다.
내 목을 미끌어지듯 절로 넘어 가는 세 모금 째는
온 세상이 내 가슴에서 뛰논다.
가슴을 쿵쿵 울리는 음악과 알딸딸한 취기...계속 따라오는 하얀 물길..
볼을 스치는 싱그러운 바람, 넓게 트인 하늘, 반짝이는 물결,
그림 같은 먼 섬들... 아! 행복하다!
우리는 ’천사의 다리(Angel Bridge)‘를 걷기 시작했다.
안좌도의 두리에서 시작하여 박지도를 거쳐 반월도까지
약1.5km에 가까운 거리의 긴 바닷길, 어림잡아 2시간이 걸린다는 먼 거리였다.
정갈하게 곱게 놓인 그 긴, 겨우 두 사람이 스쳐 지나칠 정도의
좁은 나무다리에 올라서니
썰물로 다 빠져버린 바다가 한눈에 가득 들어왔다.
이게 바다라니..!
온 세상이 짙은 회색의 갯벌로
가도 가도 끝이 없이 펼쳐져 있는 광경에 놀라울 뿐이었다.
간혹 깊게 골이 패인 갯벌엔 넓고 좁은 실개천을 이루며 바닷물이 흐르고 있고
눈부신 햇살에 갯벌이 반짝이며 반사를 하는 진풍경!
자연이 만들어 놓은 이 경이로운 광경은 분명 다른 세상이었다.
아담한 박지도를 연계한 다리가 다시 반월도로 이어졌다.
드디어 곱고 소담스런 반월도에 왔다.
젊은 사람은 모두 뭍으로 나가서
마을 청년회장이 허리가 구부정한 78세라는 반월도.
예전엔 그래도 인구가 250명이었는데 이제는 100명밖에 살지 않는 반월도.
학교라고는 초등학교가 하나 있긴 한데
그나마도 안좌도 부속 초등학교로
고작 학생 한 명에 선생님이 또한 한 명이랬다.
이 딴 세상의 순박하고 평화로운 섬 마을,
가득히 내려앉은 찬란한 햇살에 붉은 동백꽃이 더 붉게 눈부셨다.
다시 돌아가야 하는 길,
나는 천사을 다리를 다시 걸어서 돌아가는 줄 알았는데...
반월도 선착장까지 가서 배를 타야하기 때문에
다른 길로 가야한다는 말에 나는 크게 낙심했다.
“어머! 그래요!? 다시 다리로 안 가나요?”
지금쯤은 그 넓은 갯벌 위를 푸른 바닷물이 출렁일 텐데...
바다 위를 걷는 기분으로 천사의 다리를 다시 걷고 싶었던 나였으니까...
줄곧 우리에게 설명을 하며 같이 따라오시던
김환기 선양사업회에 간여하시고 미술사학 박사이신 분이
내 낙담에 오히려 반색을 하며 참 친절하게 도와주셨다.
“아직은 밀물 때가 아닌데...어쩌지요?
배 시간은 정해있으니 기다릴 수는 없고...
아! 그럼 미리 가셔서 오셨던 곳에서 다시 그 다리를 걸어 보시면 될 것 같네요.
그땐 다소나마 물이...“
옆에 있던 군청에서 나온 직원이 거들었다.
피곤하신 분을 위해서 트럭을 준비했는데 그걸 타고 가라고 권하는 것이었다.
햇살이 이렇게 좋은데 걷는 것도 참 좋겠는데...하면서도
“트럭!?^^ 그래! 내가 언제 트럭이라는 걸 타보랴!”
무언가 발동이 걸렸다!^^
파란 하늘색의 이륜구동의 조그만 트럭이었다.
“서있으면 안 되나요?^^” 또 시작이었다!
괜찮단다! 즐겁게 웃는다들...^^
나 같은 사람이 몇 명 더 있어서 우린 더 신이 났다,
짐 싣는 뒷자리에 올라 앞을 향해 서니
세상을 굽어보는 것만 같아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꼬불꼬불 휘어진 좁은 해변 길을 이 트럭이 통쾌하게 달리기 시작했다.
아니, 내가 달렸다! 하늘을 날듯이...^^
몰아치는 바람이 내 뛰는 가슴만큰이나 세차서
모자며 옷깃을 벗길 듯이 잡아 흔들고 햇살은 찬란하게 눈부셨다.
흥분에 들뜬 나는 참질 못하고 걸어가시는 일행들에게
“안녕하세요?^^ 야-호오우-!” 힘껏 소리치며 손을 흔드니
모두들 함박웃음으로 손짓하는데 그냥 하얀 이빨만 눈에 가득 들어왔다!^^
아무도 모르리라,
눈부신 햇살 속에
발가벗고 맨살로 부비며 딩구는 이 순수한 마음을..
나는 푸르른 하늘 저 끝에서 힘차게 펄럭이는 환희의 깃발이었다.
세상은 나를 위해 눈부셨고 나를 위해 노래했다.
어이 거역할 수 있으랴!
맥박이 뛰는 이 자연의 섭리를...!
세상은 이렇게 나를 향해 눈부시게 빛났다.
미리 도착한 나는 다시 천사다리로 뛰듯이 갔다.
물이 얼마나 들어왔을까, 지금쯤은 출렁이려나...
작은 섬을 만들면서, 긴 길을 지우면서
저 멀리서부터 소리 없이 서서히 들어차기 시작하는 밀물을 나는 보았다!
푸른 물위에 떠 있는 반월도로 가는 천사의 다리가 멀리서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이 밀물처럼 밀려오는 감격을 감히 내가 그렇게 누렸다.
그늘진 휴식 공간이 있었건만
나는 느릿느릿 햇살을 받으며 거닐다 한가한 길가 둑에 그냥 걸터앉았다.
다리를 아래로 편하게 내려뜨리고
아무것도 깔지 않고 맨땅 길바닥 위에...그냥 그렇게 하고 싶었다.
저 멀리 천사의 다리 밑으로 바닷물이 서서히 밀려들어 푸른 물빛이 아름다웠고
소담한 반월도가 나를 보고 따뜻하게 웃고 있었다.
상쾌한 바람은 나의 가슴을 헤집고 들어와 폐부까지 스며들고
눈부신 햇살은 전신을 애무하듯 나를 따뜻하게 품어 안았다.
이 가득히 감도는 고요한 정취에 취해버린 나는
눈을 감고 가만히 얼굴을 드니
포근한 햇살이 내 볼을 쓰다듬으며 입맞춤을 했다.
음악의 깊고 은은한 떨림은 내 온 전신을 타고 그리움처럼 번졌다.
이 고요히 흔들리는 고즈넉한 낭만.
꿈꾸며 사랑하며 떠도는 혼자만의 행복임을...
가슴에 가만히 차오르는 이 가득한 마음,
소중히 껴안는 사랑인 것을...!
나는
바람의 딸이었고
눈부신 태양의 딸이었고
사랑으로 가득한 이 아름다운 대지,
자연의 딸이었다.
2013. 4. 18. 편집. 글 songbird
반월도가 저리도 곱고 소담하다.
나를 내려놓고 아쉬운 듯 부끄러운 듯 배시시 웃으며 살금살금 돌아가는 어여쁜 천사섬.
배 이름이 천사섬이다.
떠다니는 어여쁜 섬이다.
천사!
천사의 다리.
신안군에 속해있는 섬이 1004개라는 의미의 千四!
부르기도 듣기도 어여뻤던 정말 천사(天使) 같은 이름이다.
김환기의 얼이 배여 있는 곳,
그의 영혼이 살아 숨 쉬는 영원한 고향 안좌도!
천사(千四)의 심장인 안좌도는
햇살과 바람...온 동네가 모두가 예술이었다.
읍동벽화거리에는 김 환기의 대표작들이
개인집 담벽, 교회 담벽, 거리의 벽... 등
여기저기에 그려져 있어 문화마을을 이루고 있었다.
김환기의 숨결이 고스란히 느껴지던 꿈같은 그 곳을 내가 다녀온 것이다.
내 발길이 머문 압해도, 암태도, 팔금도, 박지도, 반월도, 자은도, 안좌도...
생각만 해도 가슴이 다시 설레어 오는 그리운 이름들.
섬은 바다에 핀 꽃이다.
내 가슴에 가득히 핀 잊지 못할 꽃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