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화가
1917 .2월 25일 출생 - 2002년 5월 23일.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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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년 평양에서 태어난 박고석은
1939년 일본대학 예술학부 미술과를 졸업했다.
1946년 동경 팔척 화랑에서 도시풍경을 주제로 한 첫 개인전을 시작으로
1994년 현대화랑에서의 개인전 등 여러 차례의 개인전을 가졌다.
- ① 박고석 作 '노적몽' ② 박고석 作 '도봉산' ③ 사진작가 강문구가 1974년 설악산에서 찍은 고(故) 박 화백의 모습 '두가현' 제공
1940년 동경에서 격조(格調)전 창립 동인전에 3회 출품,
1952년 기호전 창립전 동인전,
1967년에서 1976년까지 구상전 창립 동인전 등 몇 차례의 동인전에 참가했다.
1960년 국전 추천작가 및 1984년 대한민국 문화예술상 수상,
1987년 대한민국 은관문화훈장을 수상했다.
산(山)의 화가라 불리는 박고석은 반 아카데미즘의 계열에 속했던 작가로
1950년대 모던아트협회의 창립으로 모더니즘 계열의 작업을 고수했다.
1970년대 들어와서 주로 산을 모티브로 한 그림을 그려 왔는데,
대상에 대한 느낌을 속도감 있는 붓질과 감동적인 물감의 흔적을
재빨리 화면에 쏟아 부어 산이 갖는 어떤 내밀한 정서를 표출한다.
*평론-
오광수(미술 평론가)는
박고석 선생을 흔히 '山의 화가'라고 합니다.
70년대에 들어서면서 주로 산을 모티브로 한 그림을... 지점에
도달해 있기 때문입니다. 박고석 선생은 그의 이름만큼이나 소박하고도...
날개(김용호 시집,1956년)(장정:박고석화백)-
김용호/대문사/1956(초판)/145쪽
르네상스 다방의 일원이었던 서양화가 박고석 화백이
친구 이중섭 화백을 화장하며 남긴 말
이덕성 지음/박고석 그림 1954
박고석님의 소품 스케치水彩畵 ‘제주도 성판악’ 23.5X17.7 1971작<김정소장>
1973-77년사이 박고석님 얼굴스케치<김정그림>
범일동 1951 캔버스에 유채 39.3x51.4cm
문경새재 1978
<산의 화가>였던 박고석 선생이
1970년대에 그린 <도봉산>이다.
(선생이 24년후인 1994년에 다시 그린 <도봉산>이다)
월간지 신동아 1965년 3월호 표지화
박고석의 '소'
박고석선생은 묘하게도 나의 결혼 이후부터 작품제작에 발동이 걸리시는듯 했다.
그러시다가 다시 또 한 동안 조용하셨다.
이유는 건강이 나빠진데다 무리를 하신듯 했다.
담배를 좋아 하셔서 권연보다는 시가를 좋아 하셨다.
왜냐하면 시가는 피우는 맛이 강하고 실감 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한번 감기가 걸리시면 한참을 힘들어 하신다.
70년대 중반부터 심한듯 했다.
가끔 개래를 뱉으신다.
독한 시가 때문이다.
생활을 하다보면 연락못하고 사는 경우가 많다.
연락해야지 하고 몇 달 몇 년이 지나가는 일은 누구나 비슷하다.
나역시 박선생하고 연락을 자주 못하고 지냈다.
그러다가 1973년 부터는 조선일보 주최 학생미술대회에 심사건으로
자주 뵈는 기회가 많았다.
이 미술대회는 조선일보사 주최로 ‘청소년의 꿈을 길러주자’ 는 취지로 시작 된것이다. 여기에는 박고석 이승만 우경희 김영주가 주축이고
그외 장욱진 등이 심사에 참여해왔다.
나도 처음에는 홍종명선생과 같이 예심을 몇 년 참여하다가 본심을 하게됬고,
막내둥이 심사위원으로 활동하면서 박선생을 자주 만나게 됬었다.
심사가 있는 날은 매동초등학교 강당에서 하루 종일한다.
가끔 중간 휴식시간에 “소월이가 조선일보 정주(평양근교)지국을 했는데,
신문이 자꾸 정간 당하니 지국 꼴이 엉망이라...
그래서 소월은 할 일 없이 노상 산마루에 누워서 창가나 부르고 글도 쓴거야”
원로인 이승만화백의 재담은 계속된다.
“그때 마침 조선일보 김억기자가 들렀다가 소월이 쓴 시를 보고
신문에 게재된 이후 굉장한 시인이 된거죠”
옆에있던 우경희선생왈 “난 일본 학병으로 끌려가다보니 동남아까지 갔었지요.
그바람에 미술을 중단하게 됬고....”
이때 박고석 선생왈 “중솝이랑 내가 한 방에서 구림을 구릴적에 장난도 많이 해서......” 하시며 청년시절 평양에서 이중섭과 지내던 얘기도 하신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의 얘기를 다 기록 했었으면 좋았을걸... 아쉽다.
아이들 그림 심사장에서 선발 하시는 기준도 박고석은 순수하고
심플한 표현을 뽑으셨고, 결국 ‘그런 그림이 좋은 그림이며
오래 갈수 있는 그림’이라고 하신다.
박선생은 음식도 가리지 않고 다 잘드시는데 특히 생선초밥에 정종을 좋아하셨다.
나중엔 초밥은 안 드시고 정종 술만 연거푸 드시는 경향이 있고,
술이 취해 갈 수록 말 수는 적고 조용히 담배는 많이 태우신다.
여자관계는 생략한다.
솔직히 여자 싫어하는 남자는 없다.
대셍 그림을 그리실땐 휘젓는식의 여러번 빠른선으로 형상을 묘사하는
그림을 그리신다.
평소 말이 없는 스타일이다.
그러나 정의나 정당성에 벗어난 일에 대하여는 주장을 분명히 하신다.
또한 약자 편에 용감하게 나설 수 있는 의로운 분으로도 볼 수 있다.
오광수씨가 지적했듯이 “이름 만큼이나 소박하고도 묵직한
옛 돌에 비유되는 인품” 이셨다.
나의 인생에 중요한 20대를 잘 이끌어 주신 박고석님.
그당시 갈팡질팡했던 나의 진로를 무게있게 잡아주셨기 때문에 여기까지 온 것이다. 말 보다는 옳은 행동을 더 좋아하셨던 큰 인품 이셨다.
지금도 나는 큰 삼촌같은 친근한 느낌이다.
24년전 건강이 안좋으실 때 나는 명륜동 자택으로 문병을 갔지만,
부인께서 면회 거절이어서 못뵜다.
병이 심해지셔 설악산 근처 속초에도 은거 요양하셨지만,
병세는 호전되질 않아 고생을 하셨다.
병명은 전립선 계통으로 알지만, 그 역시 자세한 내용은 묻혀있다.
2002년 5월23일 85세로 별세 하셨다.
훌륭하신 스승이자 원로화가이신 큰 별이 떠나신 것이다. / 서양화가 김 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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