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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글/시

기차를 기다리며 / 천양희

기차를 기다리며 / 천양희

 

기차를 기다려보니 알겠다
기다린다는 것이 얼마나 긴 길인지
얼마나 서러운 평생의 평행선인지
기차를 기다려보니 알겠다
기차역은 또 얼마나 긴 기차를 밀었는지
철길은 저렇게 기차를 견디느라 말이 없고
기차는 또 누구의 생에 시동을 걸었는지 덜컹거린다
기차를 기다려보니 알겠다
기차를 기다리는 일이
기차만의 일이 아니라는 걸
돌이킬 수 없는 시간이며 쏘아버린 화살이며 내뱉은 말이
지나간 기차처럼 지나가버린다
기차를 기다려보니 알겠다
세상에는 얼마나 많은 기차역이 있는지
얼마나 많은 기차역을 지나간 기차인지
얼마나 많은 기차를 지나친 나였는지
한번도 내 것인 적 없는 것들이여
내가 다 지나갈 때까지
지나간 기차가 나를 깨운다
기차를 기다리는 건
수없이 기차역을 뒤에 둔다는 것
한순간에 기적처럼 백년을 살아버리는 것
기차를 기다려보니 알겠다
기차도 기차역을 지나치기 쉽다는 걸
기차역에 머물기도 쉽지 않다는 걸

 - 시집 <나는 가끔 우두커니가 된다> (창비, 2011.1)



차이를 말하다 / 천양희

 

    그날 당신은 다르다와 틀리다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고 말했지요 당신

생각에는 동의하지 않지만 다르다는 것은 인정한다고도 말했었지요 그

말 들은 날이 얼마였는데 어떤 일이든 절대적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니라

고 말하다니요 정도의 차이가 중요한 것이라고 말할 때마다 나는 또 몇

번이나 자기를 낮추는 것과 낮게 사는 것은 다른 것이라 생각했을까요

고독 위에 우두커니 서 있는 나를 당신은 독락당(獨樂堂)에 우뚝 세워놓았

습니다 오늘은 독수정(獨守亭)이 고독을 지킵니다 처음으로 즐기는 것이

지키는 것과 정도 차이라고 당신은 말합니다 내 의견에 한 의견을 슬쩍

올려놓고 보아요 그래도 다른 것은 다른 것이고 내 생각 깊은 자리 한 생

각 잠시 머뭇거려도 그 자리 다른 것은 다른 것이지요 저 자연스러움과

자유스러움의 차이 그 차이로 차별 없이 당신과 나는 당신과 나를 견뎠

겠지요 다르다와 틀리다 사이에서 한나절을 또 견디겠지요

 

 『2011오늘의 좋은시』푸른사상




놓았거나 혹은 놓쳤거나 / 천양희

 

내가 속해 있는 대낮의 시간

한밤의 시간보다 어두울 때가 있다

어떤 날은 어안이 벙벙한 어처구니가 되고

어떤 날은 너무 많은 나를 삼켜 배부를 때도 있다

 

나는 때때로 편재해 있고

나는 때때로 부재해 있다

세상에 확실한 무엇이 있다고 믿는 것만큼

확실한 오류는 없다고 생각한지 오래다

불꽃도 타오를 때 불의 꽃이라서

지나가는 빗소리에 깨는 일이 잦다

 

고독이란 비를 바라보며 씹는 생각인가

결혼에 실패한 것이 아니라 이혼에 성공한 것이라던

어느 여성 작가의 당당한 말이

좋은 비는 때를 알고 내린다고 내게 중얼거린다.

 

삶은 고질병이 아니라

고칠병이란 생각이 든다

절대로 잘못한 적 없는 사람은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사람 뿐이다

물에도 결이 있고 침묵에도 파문이 있다는 걸 미리 알았더라면

사람이 무서운건 마음이 있어서란 것도 미리 알았을 것이다

 

언제부터였나

시간의 넝쿨이 나이의 담을 넘고 있다

누군가가 되지 못해 누구나가 되어

인생을 풍문들 듯 산다는 건 슬픈 일이지

돌아보니 허울이 허울만큼 클 때도 있었다

놓았거나 놓친만큼 큰 공백이 있을까

손가락으로 그걸 눌러

나는 마침내 완전히 나를 쓰고야 말겠다

 


다행이라는 말 / 천양희

  

   환승역 계단에서 그녀를 보았다 팔다리가 뒤틀려 온전한 곳이 한군데도 없어 보이는 그녀와 등에 업힌 아기 그 앞을 지날 때 나는 눈을 감아버렸다 돈을 건넨 적도 없다 나의 섣부른 동정에 내가 머뭇거려 얼른 그곳을  벗어났다 그래서 더 그녀와 아기가 맘에 걸렸고 어떻게 살아가는지 궁금했는데 어느 늦은 밤 그곳을 지나다 또 그녀를 보았다 놀라운 일이 눈앞에 펼쳐졌다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그녀가 바닥에서 먼지를 툭툭 털며 천천히 일어났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흔들리지도 않았다 자, 집에 가자 등에 업힌 아기에게 백년을 참다 터진 말처럼 입을 열었다 가슴에 얹혀있던 돌덩이 하나가 쿵, 내려앉았다 놀라워라! 배신감보다는 다행이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 비난하고 싶지 않았다 멀쩡한 그녀에게 다가가 처음으로 두부 사세요 내 마음을 건넸다 그녀가 자신의 주머니에 내 마음을 받아넣었다 그녀는 집으로 돌아가 따뜻한 밥을 짓고 국을 끓여 아기에게 먹일 것이다 멀어지는 그녀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다 뼛속까지 서늘하게 하는 말, 다행이다

 

 

- 천양희 시집『나는 가끔 우두커니가 된다』(창비 2011)



단추를 채우면서 / 천양희

 

단추를 채워보니 알겠다

세상이 잘 채워지지 않는다는걸

단추를 채우는 일이

단추만의 일이 아니라는 걸

단추를 채워보니 알겠다

잘못 채운 첫 단추,첫 연애 첫 결혼 첫 실패

누구에겐가 잘못하고

절하는 밤

잘못 채운 단추가

잘못을 깨운다

그래, 그래 산다는 건

옷에 매달린 단추의 구멍찾기 같은 것이야

단추를 채워보니 알겠다

단추도 잘못 채워지기 쉽다는 걸

옷 한 벌 입기도 힘들다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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