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매
마종기
비엔나 오페른 링의 시월 저녁.
걸어가는 가늘고 낮은 바람 사이로
한 나그네가 다른 나그네를 알아본다.
철새도 아닌 새들까지 다 어디로
부산하게 떼지어 날아 가버리는 시간,
아무 이야기라도 눈자위를 적시고 마는
낯모를 골목길을 오래 헤매면서도
나는 아무런 설명이 필요하지 않았다
어느덧 꽃과 나비의 세월 다 지나고
마지막 떠나는 새들에게 먹히기 위해
더 진한 색깔로 하나씩 열매를 장식하는
그림자도 지워버린 나무의 지혜여
천하가 도도히 헛것으로 향해 간다는
음침한 소문 속에서도 열매를 익힌다.
혹은 환갑을 한두 해 남긴 김광규 시인이
혼자 장바구니 든 채 고개 숙이고 걸어가는
오페른 링의 길고 미지근한 저녁 미소가
내게는 하나도 외로워 보이지 않았다
외로워 보이지 않았다, 열매의 땀방울이여,
욕심을 버리려고 몸을 터는 이 계절의 나무,
부를 수 있는 이름은 영원한 이름이 될 수 없고
보이는 몸은 영원한 몸이 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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