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글/마종기

[스크랩] (스크랩) 마종기/항구에서

조용한ㅁ 2018. 1. 22. 23:41



 
* 항구에서 - 마종기

길고 황망한 객지 생활을 떠나
도착한 나라여.
어느새 저녁이 되어버린 나이에
지척이 어두운 장님이 되고
항구에는 해묵은 파도만 쌓여 있구나.

새벽 출항의 뱃머리들은
이제 다, 잘들 있거라.
고통은, 말 많은 사랑 중에서
사랑이 아니었던 것을
씻어버린다고 했지.

씻기고 찢어진 항해의 뒷길.
바람에 휩싸인 가로등 몇 개만
귀환을 기억해주는구나.
고통만이 희미하게 불빛이 되어
얼굴 없는 사랑을 비춰주고 있구나.


* 낚시질 - 마종기

낚시질 하다
찌를 보기도 졸리운 낮
문득 저 물 속에서 물고기는
왜 매일 사는 걸까

물고기는 왜 사는가
지렁이는 왜 사는가
물고기는 平生을 헤엄만 치면서
왜 사는가

낚시질 하다
문득 온 몸이 끓어오르는 대낮,
더 이상 이렇게 살 수 만은 없다고
중년의 흙바닥에 엎드려
물고기 같이 울었다

 
 
 
* 바람의 말 - 마종기

우리가 모두 떠난 뒤
내 영혼이 당신 옆을 스치면
설마라도 봄 나뭇가지 흔드는
바람이라고 생각지는 마.

나 오늘 그대 알았던
땅 그림자 한 모서리에
꽃 나무 하나 심어 놓으려니
그 나무 자라서 꽃 피우면
우리가 알아서 얻은 괴로움이
꽃잎 되어서 날아가 버릴 거야.

꽃잎 되어서 날아가 버린다.
참을 수 없게 아득하고 헛된 일이지만
어쩌면 세상 모든 일을
지척의 자로만 재고 살 건가.
가끔 바람 부는 쪽으로 귀 기울이면
착한 당신, 피곤해져도 잊지 마,
아득하게 멀리서 오는 바람의 말을.

 
* 허술하고 짧은 탄식 - 마종기

1
산소 근처의 이슬은
중천의 햇살에도
다 마르지 않았다.
고국같이 높은 하늘이
깨끗하게 가고 있구나.
아마 네가 살고 있는 곳.
너무 맑고 멀어서
가을에는 가슴이 더 시리구나.

2
며칠 전에는 네 묘지 근처에
내가 묻힐 작은 터를 미리 샀다.
가슴 펴고 고국에 묻히고 싶기야
너와 내가 같은 생각이었지만
혹시 나도 그 소원 이룰 수 없다면
차라리 네 근처가 나을 것 같아서,
책을 읽든, 술을 마시든,
아니면 그냥 싱겁게 싱글거리든,
다시 한번 네 가까이에 살고 싶어서.

3
꽃이 져야 열매가 보이듯
네가 가고 난 후에야
네 온기가 느껴지는구나.
네가 가고 난 후에야
네 친구가 보이는구나.
네가 가고 난 후에야
내가 얼마나 네게 기대고 살아왔는지!

4
그래, 길어야 십 년, 이십 년,
얼마나 세월이 빨리 지나가더냐.
그때 만나서 놀기로 하자.
그간에 어쭙잖게 너를 글쓰니까
네 인상이 오히려 흐려지는 것 같다.
이제는 더 이상 쓰지 않겠다.
그냥 내 가슴의 중심, 기억의 뜰에서
네 착한 성품과 시달린 혼 쉬게 하겠다.
내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내게 있어라.
그래, 길어야 십 년, 이십 년,
얼마나 세월이 빨리 지나가더냐.
 

 
 
* 별, 아직 끝나지 않은 기쁨 - 마종기

오랫동안 별을 싫어했다. 내가 멀리 떨어져 살고 있기 때문인
지 너무나 멀리 있는 현실의 바깥에서, 보였다 안 보였다 하는
안쓰러움이 싫었다. 외로워 보이는게 싫었다. 그러나 지난 여름
북부 산맥의 높은 한밤에 만난 별들은 밝고 크고 수려했다. 손이
담길 것같이 가까운 은하수 속에서 편안히 누워 잠자고 있는 맑
은 별들의 숨소리도 정다웠다.

사람만이 얼굴을 들어 하늘의 별을 볼 수 있었던 옛날에는 아
무데서나 별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빨리 지
나가는 요즈음, 사람들은 더이상 별을 믿지 않고 희망에서도 등
을 돌리고 산다. 그 여름 얼마 동안 밤새껏, 착하고 신기한 별밭
을 보다가 나는 문득 돌아가신 내 아버지와 죽은 동생의 얼굴을
보고 반가운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사랑하는 이여.
세상의 모든 모순 위에서 당신을 부른다.
괴로워하지도 슬퍼하지도 말아라
순간적이 아닌 인생이 어디에 있겠는가.
내게도 지난 몇 해는 어렵게 왔다.
그 어려움과 지친 몸에 의지하여 당신을 보느니
별이여, 아직 끝나지 않은 애통한 미련이여,
도달하기 어려운 곳에 사는 기쁨을 만나라.
당신의 반응은 하느님의 선물이다.
문을 닫고 불을 끄고
나도 당신의 별을 만진다.
 

* 눈 오는 날의 미사 - 마종기

하늘에 사는 흰 옷 입은 하느님과
그 아들의 순한 입김과
내게는 아직도 느껴지다 말다 하는
하느님의 혼까지 함께 섞여서
겨울 아침 한정 없이 눈이 되어 내린다.

그 눈송이 받아 입술을 적신다.
가장 아름다운 모형의 물이
오래 비어 있던 나를 채운다.
사방을 에워싸는 하느님의 문신,
땅에까지 내려오는 겸손한 무너짐,
눈 내리는 아침은 희고 따뜻하다.
 
 


 
* 박꽃 - 마종기

그날 밤은 보름달이었다.
건넛집 지붕에는 흰 박꽃이
수없이 펼쳐져 피어 있었다.
한밤의 달빛이 푸른 아우라로
박꽃의 주위를 감싸고 있었다.
―박꽃이 저렇게 아름답구나.
―네.
아버지 방 툇마루에 앉아서 나눈 한마디,
얼마나 또 오래 서로 딴 생각을 하며
박꽃을 보고 꽃의 나머지 이야기를 들었을까.
―이제 들어가 자려무나.
―네, 아버지.
문득 돌아본 아버지는 눈물을 닦고 계셨다.

오래 잊었던 그 밤이 왜 갑자기 생각났을까.
내 아이들은 박꽃이 무엇인지 한번 보지도 못하고
하나씩 나이 차서 집을 떠났고
그분의 눈물은 이제야 가슴에 절절이 다가와
떨어져 있는 것이 하나 외롭지 않고
내게는 귀하게만 여겨지네
 
 
* 그림 그리기 - 마종기

그림 그리기를 시작했다.
겨울같이 단순해지기로 했다.
창밖의 나무는 잠들고
形象의 눈은
헤매는 자의 뼈 속에 쌓인다.

항아리를 그리기 시작했다.
빈 들판같이 살기로 했다.
남아 있던 것은 모두 썩어서
목마른 자의 술이 되게 하고
자라지 않는 사랑의 풀을 위해
어둡고 긴 內面의 길을
핥기 시작했다.
 
 
 
 
 
* 축제의 꽃 - 마종기

가령 꽃 속에 들어가면
따뜻하다
수술과 암술이
바람이나 손길을 핑계 삼아
은근히 몸을 기대며
살고 있는 곳.

시들어 고개 숙인 꽃까지
따뜻하다
임신한 몸이든 아니든
혼절의 기미로 이불도 안 덮은 채
연하고 부드러운 자세로
잠들어버린 꽃

내가 그대에게 가는 여정도
따뜻하리라.
잠든 꽃의 가는 숨소리는
이루지 못한 꿈에 싸이고
이별이여, 축제의 표적이여,
애절한 꽃물이 만발하게
우리를 온통 함께 적셔주리라
 
 
* 담쟁이 꽃 - 마종기

내가 그대를 죄 속에서 만나고
죄 속으로 이제 들어가느니
아무리 말이 없어도 꽃은
깊은 고통 속에서 피어난다.

죄 없는 땅이 어느 천지에 있던가
죽은 목숨이 몸서리치며 털어버린
핏줄의 모든 값이 산불이 되어
내 몸이 어지럽고 따뜻하구나.

따뜻하구나, 보지도 못하는 그대의 눈.
누가 언제 나는 살고 싶다며
새 가지에 새순을 펼쳐내던가.
무진한 꽃 만들어 장식하던가.
또 몸풀 듯 꽃잎 다 날리고
헐벗은 몸으로 작은 열매를 키우던가.

누구에겐가 밀려가며 사는 것도
눈물겨운 우리의 내력이다.
나와 그대의 숨어 있는 뒷일도
꽃잎 타고 가는 저 생애의 내력이다.





 
* 우화의 강 - 마종기

사람이 사람을 만나
서로 좋아하면
두 사람 사이에 물길이 튼다

한 쪽이 슬퍼지면
친구도 가슴이 메이고
기뻐서 출렁거리면
그 물살은 맑게 빛나서
친구의 웃음소리가
강물의 끝에서도 들린다

처음 열린 물길은 짧고 어색해서
서로 물을 보내고
자주 섞여야겠지만
한 세상 유장한 정성의 물길이
흔할 수야 없겠지
넘치지도 마르지도 않는
수려한 강물이 흔할수야 없겠지

긴 말 전하지 않아도
미리 물살로 알아듣고
몇 해쯤 만나지 못해도
밤잠이 어렵지 않은 강
아무려면 큰 강이
아무 의미도 없이 흐르고 있으랴

세상에서 사람을 만나
오래 좋아하는 것이
죽고 사는 일처럼
쉽고 가벼울 수 있으랴

큰 강의 시작과 끝은
어차피 알 수 없는 일이지만
물길을 항상
맑게 고집하는 사람과 친하고 싶다

내 혼이 잠잘 때
그대가 나를 지켜보아 주고
그대를 생각할 때면
언제나 싱싱한 강물이 보이는
시원하고 고운 사람을 친하고 싶다


* 내가 만약 시인이 된다면 - 마종기

내가 한 십년
아무것도 안 하고 단지 詩만 읽고 쓴다면
즐겁겠지.
내가 겨울이 긴 산 속 통나무 집에서
장작이나 태우며 노래나 부른다면
즐겁겠지.
(18세기 城主의 食客이 되어
한 세월 광대짓하던 알 만한 중늙은이도
어느날 즐겁게 목이 부러져 죽고.)
당신에게 쌓이고쌓인 모든 발걸음이
이제는 다만 아픔으로 남을지라도
즐겁겠지.
십년쯤 후에는 그 흙이 여물어
내가 만약 질좋은 詩人이 된다면.


출처 : 파랑새야
글쓴이 : prs123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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