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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그림들/한국의화가 작품

장 욱진의 그림과 그의 수필

장욱진의 그림과 수필

수필:강가의 아틀리에

여름의 강가에서 부서진 햇빛의 파편들이 보석처럼 반짝인다.
수면 위에 떠도는 아지랑이를 타고 동화가 들려올 것 같다.
물장구를 치며 나체로 뛰노는 어린아이들의 모습에서
적나라한 자연을 본다. 


그리고 천진했던 어린 시절에의 향수가 감미롭고 서글프게
전신을 휘감는 것을 느낀다.
태양과 강과 태고의 열기를 뿜는 자갈밭,
대기를 치스치는 여름 강바람-
이런 것들이 나 역시 손색없는자연의 아들로 만들어 주는 것 같다.
이럴 때 나는 그림을 그리지 않아도 공허하지 않다.
자연의 침묵이 풍요한 내적 대화를 가능케 한다.



가족 1949 31.5*31.5cm  캔버스에 유채


그럴때 나는 물이 주는 푸른 영상에 실려 막걸리를 사랑해 본다.
취한다는 것, 그것은 의식의 마비를 위한 도피가 아니라
모든 것을 근본에서 사랑한다는 것이다.

악의 없이 노출되는 인간의 본성을 순수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모든 것을 사랑하려는 마음을 가짐으로써
이기적인 내적 갈등과 감정의 긴장에서 해방되는 것이다.
그리고 동경에 찬 아름다움의 세계와 현실 사이에 가로 놓인
우울한 함정에서 절망 대신에 긍정의 발판을 마련하려는 것이다.
그것은 절실한 정신의 휴식인 것이다.



가족 1988 27.5*35cm  캔버스에 유채


그렇다, 취하여 걷는 나의 인생의 긴 여로는 결코 삭막하지 않다.
그 길은 험하고 가시덤불에 쌓여 있지만
대기의 들장미의 향기가 충만하다.

새벽 이슬을 들이마시며 피어나는 들장미를 꺾어들고
가시덤불이 우거진 인생의 벌판을 방황하는 자유는
얼마나 아프고도 감미로운가!
의식의 밑바닥에 잔잔히 깔려 있는 허무의 서글픈 반주에 맞춰
나는 생의 환희를 노래한다.
   나는 고요와 고독 속에서 그림을 그린다.

자기를 한곳에 몰아 세워
감각을 다스려 정신을 집중해야 한다.
아무것도 욕망과 불신과 배타적 감정등을 대수롭지 않게 하며,
괴로움의 눈물을 달콤하게 해주는 마력을 간직한 것이다.



길 1975 22.8*30.5cm  캔버스에 유채


  
 회색빛 저녁이 강가에 번진다.
뒷산 나무들이 흔들리는 소리가 들린다.
강바람이 나의 전신을 시원하게 씻어 준다.
   석양의 정적이 저멀리 산기슭을 타고 내려와
수면을 쓰다듬기 시작한다.

저멀리 노을이 머지않아 달이 뜰 것이다.
   나는 이런 시간의 쓸쓸함을
적막한 자연과 누릴 수 있게 마련해 준 미지의 배려에 감사한다.
   
내일은 마음을 모아 그림을 그려야겠다.
   무엇인가 그릴 수 있을 것 같다.

   <1965. 8. 현대문학>




까치와 나무 1986



앞뜰 1983 24*33.5cm  캔버스에 유채
 

수필:마을

40년을 그림과 술로 살았다.
그림은 나의 일이고 술은 휴식이니까.
   사람의 몸이란 이 세상에서 다 쓰고 가야 한다.
산다는 것은 소모 하는 것이니까.

나는 내 몸과 마음을 죽을 때까지 그림을 그려 다 써버릴 작정이다.
남는 시간은 술을 마시고.
   옛말이지만 <고생을 사서 한다>는 모던한 말이 있다.
꼭 들어맞는다.
   그림과 술로 고생하는 나

 
 
 
그런 나의 뒤치다꺼리를 하는 내 처나
모두 고생을 하는 것이리라.
   그래도 좋은데 어떻거나.

 난 절대로 몸에 좋다는 일은 안한다.
평생 자기 몸 돌보다간 아무 일도 못한다. 다 써버려야지.



자동차가 있는 풍경 <1953> 39*30cm 캔버스에 유채
 

   술? 난 거의 덕소의 화실에 있다.
시내로 나오면 어지러워서 술을 먹을 수 없다.
   술먹는 것도 황송(?)한데 밥을 어떻게 먹으며,
안주는 미안해서 더욱 안 먹는다.
교만하게 반주 따위도 안한다.
   술의 청탁도 가리면 뭘하나?
요새 술이 나빠졌지만 어떻게 하나. 참아야지.



자화상 <1951> 14.8*10.8cm 종이에 유채
 

남들은 일하고 여가를 등산이나 낚시로 보내지만 나는 술로 보낸다.
그저 그림 그리는 죄밖에 없다.
그림처럼 정확한 내가 없다.
난 그림에 나를 고백하고 다 나를 드러내고 나를 발산한다.
그리고 그림처럼 정확한 놈이 없다.
내년봄에 전시회를 약속했더니 그림을 통 못그리겠다.
목적이나 가지면 짐스러워지고
그게 꼭 그림에 나타난단 말이야.
   <1973.12.8.조선일보>


나무와 집 <1988>  34.5*34.5cm 캔버스에 유채

 
나무와 새 <1957> 24*34cm 캔버스에 유채
 

수필:주도40년

대학에서의 월급봉투는 집사람의 조그마한 선물값을 치르면
하루를 더 지탱하기 어렵게 된다.
   어쩔수 없었던 외상술 어디서나 잘 주고 또한 잘 갚았다.
빚을 갚고 얻어 마시는 한 잔의 술은 즐겁기만 하였다.
돌아설때의 기분은 그지없이 흐뭇하였다.
이러한 흐뭇함은 그림의 아이디어와 함께
영원한 동반자로 나에게 존재했던 것이다.



마을 <1983>  25*34cm 캔버스에 유채
 

무엇이든 끝을 보고서야 시원해지는 것이 나의 벽이다.
미적지근한 술은 흥미없다.
막걸리가 좋고 소주, 고량주는 더욱 좋다.

가족들도 괴롭고 술집 주인도 괴롭고 나 역시 고되다.
이 괴로움과 고역은 최후의 남은 기력마저 불태우는 것이
전제로 하는 것이다.
생사의 갈림길에 스스로를 놓이게 할 때,
더 이상은 들어갈 수도 없고 지탱할 수도 없을때 KO되면서
완전휴식의 며칠을 가지게 된다.



새와 나무  <1973>  27.4*35cm 캔버스에 유채
 

 대학에서 떠난 1960년대의 10년간 무참히도 마시면서
주기적인 술의 행각은 계속되었다.
어린 딸들을 데리고 맨발로 고무신을 끌면서 번화가를 유유히 걷기도 하였다.
딸들이나 나나 부끄러움없이 날아다녔던 것은
너무나도 다행스러웠던 일이다.

   <일>, 10년간 너무나 적었던 그림의 양이지만,
아끼는 사람들에게 넘겨져 있는 것은 오히려 흐뭇하기만한 조각들이다.
덕소의 공부방은 고요하기도 하다.
부지런히 캔버스를 채워야지,
그러고는 꼭 한 잔의 술을 집사람한테 받아야지.
   정말로 주정(酒酊)에서 주도(酒道)를 알게되는 일은
삶의 길만큼이나 어려운가 보다.

    <1973.8.여성동아>

이 글은 주도(酒道) 40년에서 일부를 발췌한것입니다.





 

수필:새벽의 세계1

언제부터인진 몰라도 나에게는 이른 새벽의 산책이 몸에 붙었다.
   고요하고 맑은 대기를 마시며 어둑어둑한 한적한 길을 걷노라면
새들의 지저귐 속에 우뚝 우뚝 서있는 모든 물체의 이 씁쓸한 맛의 색채를 던져준다.
   이럴때처럼 싱싱한 나무들의 생명을 느껴본 일은 없다.
   저마다 구김살 없는 다른 꼴의 얼굴들로 소리 없이 웃으며
생생한 핏줄의 약동으로 속삭여주는 듯도 하다.
   시끄러운 잡음과 먼지를 뒤집어 쓰지 않은 싱싱한 새벽의 표정을
나는 영원히 닯고 싶은 것이다. 

 <1958.4.12. 경향신문> 



얼굴 40*30 195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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