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글/안도현

안도현의 시 모음

조용한ㅁ 2008. 3. 29. 01:43

너에게 묻는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洛東江



저물녘 나는 洛東江에 나가

보았다, 흰 옷자락 할아버지의 뒷모습을

오래 오래 정든 하늘과 물소리도 따라가고 있었다

그 때, 강은

눈앞에만 흐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비로소

내 이마 위로도 소리 없이 흐르는 것을 알았다

그것은 어느 날의 身熱처럼 뜨겁게,


어둠이 강의 끝 부분을 지우면서

내가 서 있는 자리까지 번져오고 있었다

없는 것이 너무 많아서

아버지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시고

낡은 木船을 손질하다가 어느 날

아버지는 내게 그물 한 장을 주셨다


그러나 그물을 빠져 달아난 한 뼘 미끄러운 힘으로

지느러미 흔들며 헤엄치는 銀魚떼들

나는 놓치고, 내 살아온 만큼 저물어 가는

외로운 세상의 江岸에서

문득 피가 따뜻해지는 손을 펼치면

빈 손바닥에 살아 출렁이는 강물


아아 나는 아버지가 모랫벌에 찍어 놓은

발자국이었다, 홀로 서서 생각했을 때

내 눈물 웅얼웅얼 모두 모여 흐르는

洛東江,

그 맑은 마지막 물빛으로 남아 타오르고 싶었다


풍산국민학교



고 계집애 덧니 난 고 계집애랑

나랑 살았으면 하고 생각했었다 1학년 때부터 5학년 때까지

목조건물 삐걱이는 풍금소리에 감겨 자주 울던 아이들

장래에 대통령 되고 싶어하던 그 아이들은

키가 자랄수록 젖은 나무그늘을 찾아다니며 앉아 놀았지만

교실 앞 해바라기들은 가을이 되면 저마다 하나씩의 태양을 품고

불타 올랐다 운동장 중간에 일본놈이 심어 놓고 갔다는

성적표만한 낙엽들을 내뱉던 플라타너스 세 그루

청소시간이면 나는 자주 나뭇잎 뒷면으로 도망가 숨어 있었다

매일 밤마다 밀린 숙제가 잠 끝까지 따라 들어오곤 하였다

붉은 리트머스 종이 위로 가을이 한창 물들어갈 무렵

내 소풍날은 김밥이 터지고 운동회날은 물통이 새고

그래 그날 주먹 같은 모래주머니 마구 던져대던 폭죽 터뜨리기

아아 그때부터였다 청군 백군 서로 갈라져

지금에 이르고 감추어 둔 비둘기와 오색 종이 가루를 찾기 위하여

우리가 저 높은 곳으로 돌멩이 같은 것을 던지기 시작한 것은

그런데 소식도 없이 기러기 기러기는 하늘에다 길을 내고

겨울이 오면 아이들은 변방으로 위문편지를 쓰다가

책상 위에 연필 깎는 칼로 휴전선을 그었다

그 부끄러운 흔적 지우지 못하고 6학년이 되었을 때

가슴속 따뜻한 고향을 조금씩 벗겨내며 처음으로

나는 도시로 가고 싶었다 그렇지만 날이 갈수록 고 계집애

고 계집애는 실처럼 자꾸 나를 휘감아 왔다



 서울로 가는 全琫準



눈 내리는 萬頃 들 건너가네

해진 짚신에 상투 하나 떠가네

가는 길 그리운 이 아무도 없네

녹두꽃 자지러지게 피면 돌아올거나

울며 울지 않으며 가는

우리 琫準이

풀잎들이 북향하여 일제히 성긴 머리를 푸네


그 누가 알기나 하리

처음에는 우리 모두 이름 없는 들꽃이었더니

들꽃 중에서도 저 하늘 보기 두려워

그늘 깊은 땅 속으로 젖은 발 내리고 싶어하던

잔뿌리였더니


그대 떠나기 전에 우리는

목 쉰 그대의 칼집도 찾아 주지 못하고

조선 호랑이처럼 모여 울어 주지도 못하였네

그보다도 더운 국밥 한 그릇 말아 주지 못하였네

못다 한 그 사랑 원망이라도 하듯

속절없이 눈발은 그치지 않고

한 자 세 치 눈 쌓이는 소리까지 들려오나니


그 누가 알기나 하리

겨울이라 꽁꽁 숨어 우는 우리 나라 풀뿌리들이

입춘 경칩 지나 수군거리며 봄바람 찾아오면

수천 개의 푸른 기상나팔을 불어제낄 것을

지금은 손발 묶인 저 얼음장 강줄기가

옥빛 대님을 홀연 풀어헤치고

서해로 출렁거리며 쳐들어 갈 것을


우리 聖上 계옵신 곳 가까이 가서

녹두알 같은 눈물 흘리며 한목숨 타오르겠네

琫準이 이 사람아

그대 갈 때 누군가 찍은 한 장 사진 속에서

기억하라고 타는 눈빛으로 건네던 말

오늘 나는 알겠네


들꽃들아

그날이 오면 닭 울 때

흰 무명띠 머리에 두르고 동진강 어귀에 모여

척왜척화 척왜척화 물결소리에

귀를 기울이라


빈 논



아버지

아버지의 논이 비었습니다

저는 추운 書生이 되어 돌아와 요렇게 엎드려

빈 논, 두려워 나가 보지도 못하고

껴안지는 더욱 못하고 쓸쓸한

한 편 시를 써 보려고 합니다

옛날 이 땅에서 당신이 그러하셨던 것처럼

참나무 가시나무 마른 억새풀

아궁이 가득 지펴 펄펄 끓는 쇠죽솥

쇠죽솥 같은 앞가슴

아직도 만들지 못하여서요,

저 죽은 논에 까무잡잡 살 없는 논에

물줄기도 비켜 가지 않게 불러들이고

그 흙물에 서늘히 발목을 적시고

눈 닿는 곳이 다 내 하늘이라

아버지 뼈가 이룬 몸 하나로 버티며 서 계셔도

아, 바로 아버지가 하늘이었지요

그때야말로 가난이 넉넉한 재산이었지요

오늘밤 아버지의 논에 누운 살얼음을 밟고

달이 둥실 뜨는 것을 아시는지요

달빛을 따라

이 궁핍한 밤에도 삽을 들고

성큼 성큼 논으로 나가시는 아버지

옛날 이 땅에서 당신이 그러하셨던 것처럼

스스럼없이 바지 활활 걷어 부치고

역사의 논물에 발을 담는 것도

거머리가 붙으면 이놈의 거머리 하며

철썩 젖은 종아리 아무 일 아닌 듯 때리는 것도

저는 겁나는 일이기만 한데

세상의 어둠 다 몰려와 난리를 치는

빈 논에 아버지 돌아오셨군요

아버지의 논바닥 저 깊은 곳에서

겨울에도 푸른 모들은 힘차게 꼼틀거린다고

제가 쓰는 시 이 부족한 은유로는

당신의 삶 끄트머리도 감당할 수 없음을 압니다

아버지

꿈에도 논에는 나오지 마라 하시지만


새벽밥



동트기 전에

죽은 듯이 누웠다가 문득

벌떡 일어나 먹는 밥

지난밤보다 더 큰 밤이 오기 전에

해야 할 일이 많은 사람

밥을 먹는다

새벽밥이여


혼자 먹는 밥

숨죽이며 먹는 밥

분명히 떠나 갈 사람이 먹는 밥이여

몸서리치며 먹는 밥이여


남몰래 신새벽에

그대 왜 홀연히 깨어 앉아

식구 없는 밥상을 앞에 하는가

따스함이랑 그리움이랑 기꺼이 눌러 죽이고

맨손으로 가자

돌아올 길을 생각하지 말자

끝내 닿아야 할 나라로 가는

아직은 춥고 어두운 길을 보는가


눈물도 없이 먹는다

새벽밥이여


조선 천지 이 집 저 집

벌떡 벌떡 일어나서

한 등씩 불 밝히고 밥 먹는 사람이여

그대 가르고 갈 바람 속에 놓인

시퍼런 한 그릇 밥

새벽밥이여



청진 여자



내가 사는 남쪽 나라

쓸쓸한 눈 내리면,

미군 없는 청진항에서

헌 자전거 한 대 빌어 타고

퍼붓는 눈발을 따라가서

어둠을 털어 내는 전등을 밝힌 집

백설기 같은 김이 하얗게 서린

유리문 열고 들어서면

갈탄 난로가 뜨거운 집

이름도 버리고 돈도 없이 왔노라고

내가 등 푸른 한 마리 정어리로

당신과 헤엄치고 싶다 말하면

동해 같은 자궁을 열어주는

사랑이라는 말보다 더 아름다운

청진 여자, 그녀와 하룻밤 자고 싶다

봄에 눈이 온다는

물 맑은 청진항 부근에서

꿈의 벌레 같은 눈송이들이

이부자리를 따뜻하게 적시는 밤

아내를 남쪽에 두고

나는 죄짓는 마음도 모르고

헝클어진 머리카락 미역냄새를 맡으면

부끄럼 없이 굵어지는 어깨와 팔뚝

한반도의 허리를 꼭 껴안듯이

더 깊은 신천지 속으로

힘차게 나를 밀어 넣으면

온 바다로 파도 치는

청진 여자, 그녀와 하룻밤 자고 싶다

내가 사는 남쪽 나라

쓸쓸한 눈 내리면,

모든 것을 다 주어야

비로소 하나 되는 날

그 설레이는 첫새벽에

동해 붉은 해 같은 아이를 낳아

넘치는 젖을 물리게 될 청진 여자여,

우리는 간섭받지 않는

부부가 되고 싶다.


금강 하구에서



시도 사랑과 안 되는 날에는

친구야 금강 하구에 가 보아라

강물이 어떻게 모여 꿈틀대며 흘러왔는지를

푸른 멍이 들도록

제 몸에다 채찍 휘둘러

얼마나 힘겨운 노동과 학습 끝에

스스로 깊어졌는지를

내 쓸쓸한 친구야

금강 하구둑 저녁에 알게 되리

이쪽도 저쪽도 없이

와와 하나로 부둥켜안고

마침내 유장한 사내로 다시 태어나

서해 속으로 발목을 밀어 넣는 강물은

반역이 사랑이 되고

힘이 되는 것을

한꺼번에 보여줄 테니까

장항제련소 굴뚝 아래까지 따라온 산줄기를

물결로 어루만져 돌려보내고

허리에 옷자락을 당겨 감으며

성큼 강물은 떠나리라

시도 사랑과 안 되는 날에는

친구야 금강 하구에 가 보아라

해는 저물어가도 끝없이

영차영차 뒤이어 와 기쁜 바다가 되는 강물을

하루내 갈대로 서서 바라보아도 좋으리



벽시 5



우리 나라 모닥불 근처에는

사람이 있다


살아서

모여 있다

등짝은 외롭고 캄캄해도

그 가슴이 화끈거리는



똥차



두어 달에 한 번씩 학교에

똥차가 온다

햇볕이 변소 지붕에 골고루 널린 날을 택해

부릉부릉 운동장을 힘차게 질러온다

개도 안 먹는다는 선생 똥을

교과서나 공책 찢어 쓰윽 닦은 아이들 똥을

빨대로 콜라 빨 듯 시원히 바닥낸다

수업시간에도 냄새가 교실을 적시지만

우리 어디 제 코만 싸잡을 일이다냐

비우면서 그리하여 가득 채우는 일

대명천지에 똥차는 와서

진정 참다운 일

가르쳐주고 간다



모닥불



모닥불은 피어오른다

어두운 청과시장 귀퉁이에서

지하도 공사장 입구에서

잡것들이 몸 푼 세상 쓰레기장에서

철야농성한 여공들 가슴속에서

첫차를 기다리는 면사무소 앞에서

가난한 양말에 구멍난 아이 앞에서

비탈진 역사의 텃밭 가에서

사람들이 착하게 살아 있는 곳에서

모여 있는 곳에서

모닥불은 피어오른다

얼음장이 강물 위에 눕는 섣달에

낮도 밤도 아닌 푸른 새벽에

동트기 십분 전에

쌀밥에 더운 국 말아먹기 전에

무장 독립군들 출정가 부르기 전에

압록강 건너기 전에

배부른 그들 잠들어 있는 시간에

쓸데없는 책들이 다 쌓인 다음에

모닥불은 피어오른다

언 땅바닥에 신선한 충격을 주는

혹혹 입김을 하늘에 불어넣는

죽음도 그리하여 삶으로 돌이키는

삶을 희망으로 전진시키는

그날까지 끝까지 울음을 참아내는

모닥불은 피어오른다

한 그루 향나무 같다


이리중학교




어느 때묻지 않은 손이 닦아놓았나

유리창을 열면


군산선 화물열차가

바다에서 돌아오는 곳

운동장 앞으로는 목포 여수 서울로

호남선과 전라선이 달리는 곳

짓궂은 아이들이 그래서 기차길 옆 오막살이라 부르기도 하는

이리중학교, 꼭두새벽 도시락 싸서

나는 낡은 외투를 입고 출근하고

아이들은 무거운 가방을 데리고 등교한다


우리나라 모든 학교가 그러하듯이

월요일 아침이면 애국조회가 열리고

펄럭이는 태극기 아래

아무것도 모르는 가슴에 손을 대는

일제 치하 어린 학동 교장선생님이 그러하였듯이

분단 나라 젊은 국군 담임선생님이 그러하였듯이

측백나무처럼 오와 열을 맞추고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코끝이 맵고 발이 시린 겨울


이리중학교에서

누가 나를 선생님이라고 부르나

일주일에 스물네 시간 국정 국어교과서를 가르치는

한 달에 스무 시간 보충수업을 하는

조회 종례 때마다 지시사항을 전달하는

수업료 보훈성금 방위성금 불우이웃돕기성금

극기훈련비 수학여행비 졸업앨범비

날이면날마다 독촉을 하는

명찰 배지 실내화 두발검사를 하는

성적이 떨어지면 매를 들고 때리는

나를 아이들은 선생님, 하고 부른다


나는 분필밥 겨우 2년 먹었는데

나는 봉급날을 기다리는 가난한 월급쟁이인데

나는 넥타이도 제대로 맬 줄 모르는데

나는 배고픈 아이 라면 한번 못 사주었는데


이 유리창을 닦으며

모르는 사이에 하늘을 닦던 아이들 중에

먼 바다에 배 타고 고기 잡으러 간 아이는,

소작 얻은 황토밭에서 배추 뽑고 있는 아이는,

이리역 화약폭발 사고 때 하늘로 떠난 아이는,

그때 살아 남아 교문 앞을 손수레 끌고 바삐 지나는 아이는,

대학생이 되었다가 감옥에 간 아이는,

귀금속공장에서 하얗게 밤새는 재작년의 아이는,

추억의 동창회가 열려도 돌아올 줄 모르고


그 옛날 총각선생님 머리 위에는

눈이 내렸다

그 옛날에 졸업한 아이가 출세하는 동안

해진 출석부 끼고 계단을 오르내리면서

버드나무들이 톡톡 손가락 꺾는 소리를 들으면서

그러면 봄은 또 멀지 않으리라 믿으면서


그날 평교사를 위한 시를 쓰고 싶었다

겉보리라 불리던 김경회 수학선생님이

책상 속을 정리하고

40여년 교직생활을 그 서랍을 닫고

홀로 뒷모습을 보여주며 떠나시던 날

나는 숙직실 수돗가에서 얼굴을 씻고

까닭없이 새어나오려는 울음을 참았다


이리중학교야

나도 저 무명의 찬란한 길을 가리라

점심시간이면 김치 냄새가 우리를 적시는 교실에서,

손목과 발목이 굵어지는 운동장에서,

추운 아침에 서로 뿜어주는 입김 속에서,

모이면 횃불이 될 아이들의 수많은 눈빛 속에서,

이 뜨거운 조국의 한복판에서,

이리중학교에서


그대에게 가고 싶다



해 뜨는 아침에는

나도 맑은 사람이 되어

그대에게 가고 싶다

그대 보고 싶은 마음 때문에

밤새 퍼부어대던 눈발이 그치고

오늘은 하늘도 맨 처음인 듯 열리는 날

나도 금방 헹구어낸 햇살이 되어

그대에게 가고 싶다

그대 창가에 오랜만에 별이 들거든

긴 밤 어둠 속에서 캄캄하게 띄워 보낸

내 그리움으로 여겨다오

사랑에 빠진 사람보다 더 행복한 사람은

그리움 하나로 무장무장

가슴이 타는 사람 아니냐


진정 내가 그대를 생각하는 만큼

새날이 밝아오고

진정 내가 그대 가까이 다가가는 만큼

이 세상이 아름다워질 수 있다면

그리하여 마침내 그대와 내가

하나되어 우리라고 이름 부를 수 있는

그날이 온다면

봄이 올 때까지는 저 들에 쌓인 눈이

우리를 덮어줄 따뜻한 이불이라는 것도

나는 잊지 않으리


사랑이란

또 다른 길을 찾아 두리번거리지 않고

그리고 혼자서는 가지 않는 것

지치고 상처입고 구멍난 삶을 데리고

그대에게 가고 싶다

우리가 함께 만들어야 할 신천지

우리가 더불어 세워야 할 나라

사시사철 푸른 풀밭으로 불러다오

나도 한 마리 튼튼하고 착한 양이 되어

그대에게 가고 싶다



사랑한다는 것



길가에 민들레 한 송이 피어나면

꽃잎으로 온 하늘을 다 받치고 살 듯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오직 한 사람을 사무치게 사랑한다는 것은

이 세상 전체를 비로소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차고 맑은 밤을 뜬눈으로 지새우며

우리가 서로 뜨겁게 사랑한다는 것은

그대는 나의 세상을

나는 그대의 세상을

함께 짊어지고

새벽을 향해 걸어가겠다는 것입니다


찬밥



가을이 되면 찬밥은 쓸쓸하다

찬밥을 먹는 사람도

쓸쓸하다


이 세상에서 나는 찬밥이었다

사랑하는 이여


낙엽이 지는 날

그대의 저녁 밥상 위에

나는

김 나는 뜨끈한 국밥이 되고 싶다



 우리가 눈발이라면



우리가 눈발이라면

허공에서 쭈빗쭈빗 흩날리는

진눈깨비는 되지 말자

세상이 바람 불고 춥고 어둡다 해도

사람이 사는 마을

가장 낮은 곳으로

따뜻한 함박눈이 되어 내리자

우리가 눈발이라면

잠 못 든 이의 창문 가에서는

편지가 되고

그이의 깊고 붉은 상처 위에 돋는

새 살이 되자



저물 무렵



저물 무렵 그 애와 나는 강둑에 앉아서

강물이 사라지는 쪽 하늘 한 귀퉁이를 적시는

노을을 자주 바라보곤 하였습니다

둘 다 말도 없이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지만

그 애와 나는 저무는 세상의 한쪽을

우리가 모두 차지한 듯 싶었습니다

얼마나 아늑하고 평화로운 날들이었는지요

오래오래 그렇게 앉아 있다가 보면

양쪽 볼이 까닭도 없이 화끈 달아오를 때도 있었는데

그것이 처음에는 붉은 노을 때문인 줄로 알았습니다

흘러가서는 되돌아오지 않는 물소리가

그 애와 내 마음속에 차곡차곡 쌓이는 동안

그 애는 날이 갈수록 부쩍 말수가 줄어드는 것이었고

나는 손 한 번 잡아주지 못하는 자신이 안타까웠습니다

다만 손가락으로 먼 산의 어깨를 짚어가며

강물이 적시고 갈 그 고장의 이름을 알려주는 일은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자랑이었습니다

강물이 끝나는 곳에 한없이 펼쳐져 있을

여태 한 번도 가보지 못한 큰 바다를

그 애와 내가 건너야 할 다리 같은 것으로 여기기 시작한 것은

바로 그 때부터였습니다

날마다 어둠도 빨리 왔습니다

그 애와 같이 살 수 있는 집이 있다면 하고 생각하며

마을로 돌아오는 길은 늘 어찌나 쓸쓸하고 서럽던지

가시에 찔린 듯 가슴이 따끔거리며 아팠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애와 나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입술을 포개었던 날이 있었습니다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 애의 여린 숨소리를

열 몇 살 열 몇 살 내 나이를 내가 알고 있는 산수 공식을

아아 모두 삼켜버릴 것 같은 노을을 보았습니다

저물 무렵 그 애와 나는 강둑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 때 우리가 세상을 물들이던  어린 노을인 줄을

지금 생각하면 아주 조금 알 것도 같습니다



연애 편지



스무 살 안팎에는 누구나 한번쯤 연애 편지를 썼었지

말로는 다 못할 그리움이여

무엇인가 보여주고 싶은 외로움이 있던 시절 말이야

틀린 글자가 없나 수없이 되읽어 보며

펜을 꾹꾹 눌러 백지 위에 썼었지

끝도 없는 열망을 쓰고 지우고 하다 보면

어느 날은 새벽빛이 이마를 밝히고

그때까지 사랑의 감동으로 출렁이던 몸과 마음은

종이 구겨지는 소리를 내며 무너져 내리곤 했었지

그러나 꿈속에서도 썼었지

사랑을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잃어도 괜찮다고

그런데 친구, 생각해보세

그 연애 편지 쓰던 밤을 잃어버리고

학교를 졸업하고 타협을 배우고

결혼을 하면서 안락을, 승진을 위해 굴종을 익히면서

삶을 진정 사랑하였노라 말하겠는가

민중이며 정치며 통일은 지겨워

증권과 부동산과 승용차 이야기가 좋고

나 하나를 위해서라면

이 세상이야 썩어도 좋다고 생각하면서

친구, 누구보다 깨끗하게 살았노라 말하겠는가

그 스무 살 안팎에 쓰던 연애 편지는 그렇지 않았다네

남을 위해서 자신을 버릴 줄 아는 게

사랑이라고 썼었다네

집안에 도둑이 들면 물리쳐 싸우는 게

사랑이라고 썼었다네

가진 건 없어도 더러운 밥은 먹지 않는 게

사랑이라고 썼었다네

사랑은 기다리는 게 아니라

한 발자국씩 찾으러 떠나는 거라고

그 뜨거운 연애 편지에는 지금도 쓰여 있다네





연탄 한 장



또 다른 말도 많고 많지만

삶이란

나 아닌 그 누구에게

기꺼이 연탄 한 장 되는 것


방구들 선득선득해지는 날부터 이듬해 봄까지

조선팔도 거리에서 제일 아름다운 것은

연탄차가 부릉부릉

힘쓰며 언덕길 오르는 거라네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알고 있다는 듯이

연탄은, 일단 제 몸에 불이 옮겨 붙었다 하면

하염없이 뜨거워지는 것

매일 따스한 밥과 국물 퍼먹으면서도 몰랐네

온 몸으로 사랑하고 나면

한 덩이 재로 쓸쓸하게 남는 게 두려워

여태껏 나는 그 누구에게 연탄 한 장도 되지 못하였네


생각하면

삶이란

나를 산산이 으깨는 일

눈 내려 세상이 미끄러운 어느 이른 아침에

나 아닌 그 누가 마음놓고 걸어갈

그 길을 만들 줄도 몰랐었네, 나는


모항으로 가는 길



너, 문득 떠나고 싶을 때 있지?

마른 코딱지 같은 생활 따위 눈 딱 감고 떼어내고 말이야

비로소 여행이란,

인생의 쓴맛 본 자들이 떠나는 것이니까

세상이 우리를 내버렸다는 생각이 들 때

우리 스스로 세상을 한번쯤 내동댕이쳐 보는 거야

오른쪽 옆구리에 변산 앞바다를 끼고 모항에 가는 거야


부안읍에서 버스로 삼십 분쯤 달리면

객지밥 먹다가 석삼 년만에 제 집에 드는 한량처럼

거드럭거리는 바다가 보일 거야

먼데서 오신 것 같은데 통성명이나 하자고,

조용하고 깨끗한 방도 있다고,

바다는 너의 옷자락을 잡고 놓아주지 않을지도 모르지

그러면 대수롭지 않은 듯 한 마디 던지면 돼

모항에 가는 길이라고 말이야

모항을 아는 것은

변산의 똥구멍까지 속속들이 다 안다는 뜻이거든


모항 가는 길은 우리들 생이 그래왔듯이

구불구불하지, 이 길은 말하자면

좌편향과 우편향을 극복하는 길이기도 한데

이 세상에 없는 길을 만드는 싸움에 나섰다가 지친 너는,

너는 비록 지쳤으나

승리하지 못했으나 그러나, 지지는 않았지

저 잘난 세상쯤이야 수평선 위에 하늘 한 폭으로 걸어두고

가는 길에 변산 해수욕장이나 채석강 쪽에서 잠시

바람 속에 마음을 말려도 좋을 거야

그러나 지체하지는 말아야 해

모항에 도착하기 전에 풍경에 취하는 것은

그야말로 촌스러우니까

조금만 더 가면 훌륭한 게 나올 거라는

믿기 싫지만, 그래도 던져버릴 수 없는 희망이

여기까지 우리를 데리고 온 것처럼

모항도 그렇게 가는 거야


모항에 도착하면

바다를 껴안고 하룻밤 잘 수 있을 거야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하냐고 너는 물어오겠지

아니, 몸에다 마음을 비벼 넣어 섞는 그런 것을

꼭 누가 시시콜콜 가르쳐 줘야 아나?

걱정하지마, 모항이 보이는 길 위에 서기만 하면

이미 모항이 네 몸 속에 들어와 있을 테니까




내게 땅이 있다면

거기에 나팔꽃을 심으리

때가 오면

아침부터 저녁까지 보랏빛 나팔소리가

내 귀를 즐겁게 하리

하늘 속으로 덩굴이 애쓰며 손을 내미는 것도

날마다 눈물 젖은 눈으로 바라보리

내게 땅이 있다면

내 아들에게는 한 평도 물려주지 않으리

다만 나팔꽃이 다 피었다 진 자리에

동그랗게 맺힌 꽃씨를 모아

아직 터지지 않은 세계를 주리


겨울밤에 시쓰기



연탄불 갈아 보았는가

겨울 밤 세 시나 네 시 무렵에

일어나기는 죽어도 싫고, 그렇다고 안 일어날 수도 없을 때

때를 놓쳤다가는

라면 하나도 끓여 먹을 수 없다는 생각을 하고는

벌떡 일어나 육십촉 백열전구를 켜고

눈 부비며 드르륵, 부엌으로 난 미닫이문을 열어 보았는가

처마 밑으로 흰 눈이 계층상승욕구처럼 쌓이던 밤


나는 그 밤에 대해 지금부터 쓰려고 한다

연탄을 갈아본 사람이 존재의 밑바닥을 안다,

이렇게 썼다가는 지우고

연탄집게 한번 잡아 보지 않고 삶을 안다고 하지 마라,

이렇게 썼다가는 다시 지우고 볼펜을 놓고

세상을 내다본다, 세상은 폭설 속에서

숨을 헐떡이다가 금방 멈춰 선 증기기관차 같다

희망을 노래하는 일이 왜 이렇게 힘이 드는가를 생각하는 동안

내가 사는 아파트 아래 공단 마을

다닥다닥 붙은 어느 자취방 들창문에 문득 불이 켜진다

그러면 나는 누군가 자기 자신을 힘겹게도 끙, 일으켜 세워

연탄을 갈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이리수출자유지역 귀금속공장에 나가는 그는

근로기준법 한줄 읽지 않은 어린 노동자

밤새 철야작업 하고 왔거나

술 한 잔 하고는 좆도 씨발, 비틀거리며 와서

빨간 눈으로 연탄 불구멍을 맞추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다 타버린 연탄재 같은 몇 장의 삭은 꿈을

버리지 못하고, 부엌 구석에 차곡차곡 쌓아두고

연탄냄새에게 자기 자신이 들키지 않으려고

그는 될수록 오래 숨을 참을 것이다

아아 그러나, 그것은 연탄을 갈아본 사람만이 아는

참을 수 없는 치욕과도 같은 것

불현듯 나는 서러워진다

그칠 줄 모르고 쏟아지는 눈발 때문이 아니라

시 몇 줄에 아둥바둥 매달려 지내온 날들이 무엇이었나 싶어서

나는 그 동안 세상 바깥에서 세상 속을 몰래 훔쳐보기만 했던 것이다


다시, 볼펜을 잡아야겠다

낮은 곳으로 자꾸 제 몸을 들이미는 눈발이

오늘밤 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이불이 되었으면 좋겠다, 라고

나는 써야겠다, 이 세상의 한복판에서

지금 내가 쓰는 시가 밥이 되고 국물이 되도록

끝없이 쓰다 보면 겨울 밤 세 시나 네 시쯤

내 방의 꺼지지 않은 불빛을 보고 누군가 중얼거릴 것이다

살아야겠다고, 흰 종이 위에다 꼭꼭 눌러

이 세상을 사랑해야겠다고 쓰고 또 쓸 것이다





연탄불 갈아 보았는가

겨울 밤 세 시나 네 시 무렵에

일어나기는 죽어도 싫고, 그렇다고 안 일어날 수도 없을 때

때를 놓쳤다가는

라면 하나도 끓여 먹을 수 없다는 생각을 하고는

벌떡 일어나 육십촉 백열전구를 켜고

눈 부비며 드르륵, 부엌으로 난 미닫이문을 열어 보았는가

처마 밑으로 흰 눈이 계층상승욕구처럼 쌓이던 밤


나는 그 밤에 대해 지금부터 쓰려고 한다

연탄을 갈아본 사람이 존재의 밑바닥을 안다,

이렇게 썼다가는 지우고

연탄집게 한번 잡아 보지 않고 삶을 안다고 하지 마라,

이렇게 썼다가는 다시 지우고 볼펜을 놓고

세상을 내다본다, 세상은 폭설 속에서

숨을 헐떡이다가 금방 멈춰 선 증기기관차 같다

희망을 노래하는 일이 왜 이렇게 힘이 드는가를 생각하는 동안

내가 사는 아파트 아래 공단 마을

다닥다닥 붙은 어느 자취방 들창문에 문득 불이 켜진다

그러면 나는 누군가 자기 자신을 힘겹게도 끙, 일으켜 세워

연탄을 갈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이리수출자유지역 귀금속공장에 나가는 그는

근로기준법 한줄 읽지 않은 어린 노동자

밤새 철야작업 하고 왔거나

술 한 잔 하고는 좆도 씨발, 비틀거리며 와서

빨간 눈으로 연탄 불구멍을 맞추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다 타버린 연탄재 같은 몇 장의 삭은 꿈을

버리지 못하고, 부엌 구석에 차곡차곡 쌓아두고

연탄냄새에게 자기 자신이 들키지 않으려고

그는 될수록 오래 숨을 참을 것이다

아아 그러나, 그것은 연탄을 갈아본 사람만이 아는

참을 수 없는 치욕과도 같은 것

불현듯 나는 서러워진다

그칠 줄 모르고 쏟아지는 눈발 때문이 아니라

시 몇 줄에 아둥바둥 매달려 지내온 날들이 무엇이었나 싶어서

나는 그 동안 세상 바깥에서 세상 속을 몰래 훔쳐보기만 했던 것이다


다시, 볼펜을 잡아야겠다

낮은 곳으로 자꾸 제 몸을 들이미는 눈발이

오늘밤 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이불이 되었으면 좋겠다, 라고

나는 써야겠다, 이 세상의 한복판에서

지금 내가 쓰는 시가 밥이 되고 국물이 되도록

끝없이 쓰다 보면 겨울 밤 세 시나 네 시쯤

내 방의 꺼지지 않은 불빛을 보고 누군가 중얼거릴 것이다

살아야겠다고, 흰 종이 위에다 꼭꼭 눌러

이 세상을 사랑해야겠다고 쓰고 또 쓸 것이다



나의 경제



구두를 신으면서 아내한테 차비 좀, 하면 만원을 준다

전주까지 왔다 갔다 하려면 시내버스가 210원 곱하기 4에다

더하기 직행버스비 870원 곱하기 2에다

더하기 점심 짜장면 한 그릇값 1,800원 하면

좀 남는다 나는 남는 돈으로 무얼 할까 생각하면서

벼랑 끝에 내몰린 나의 경제야, 아주 나지막하게

불러본다 또 어떤 날은 차비 좀, 하면 오만 원도 준다

일주일 동안 써야 된다고 아내는 콩콩거리며 일찍 들어와요 하지만

나는 병천이형한테 그동안 술 얻어먹은 것 염치도 없고 하니

그런 날 저녁에는 소주에다 감자탕이라도 사야겠다고 생각한다

또 며칠 후에 구두를 신으면서 아내한테 차비 좀, 하면

월말이라 세금 내고 뭐 내고 해서 천 원짜리 몇 뿐이라는데

사천 원을 받아들고 바지주머니 속에 짤랑거리는 동전이 얼마나 되나

손을 슬쩍 넣어 본다 동전테가 까끌까끌한 게 많아야 하는데

손톱 끝이 미끌미끌하다 나는 갑자기 쓸쓸해져서

오늘 점심은 라면으로나 한 끼 때울까 생각한다

또 그 다음 날도 구두를 신으면서 아내한테 차비 좀, 하면

대뜸 한다는 말이 뭐 때문에 사는지 모르겠다고

유경이 피아노학원비도 오늘까지 내야 한다고 아내는

운다, 나는 슬퍼진다 나는 도대체 아무 생각도 나지 않는다

어제도 그랬다 길 가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가

새끼들 데리고 요즘 어떻게 먹고 사느냐고, 근심스럽다는 듯이

나의 경제를 훤히 들여다보고 있다는 듯이 물었을 때

나는 그랬다 살아보니까 살아지더라, 잘 먹고 잘 산다고

그게 지금은 후회된다 좀더 고통의 포즈를 취할 것을

이놈의 세상 팍 갈아엎어 버려야지, 하며 주먹이라고 좀 쥐어볼 것을

아니면, 나는 한 달에 전교조에서 나오는 생계보조비를

31만원이나 받는다 현직에 계신 선생님들이 봉급에서 쪼개 주신 거다

그래 자기 봉급에서 다달이 만원을 쪼개 남에게 준다는 것

그것 받을 때마다 받는 사람 가슴이 더 쓰린 것

이것이 우리들의 이데올로기다 우리들의 사상이다

이렇게 자랑이라도 좀 떠벌이면서 그래서

입으로만 걱정하는 친구놈 뒤통수나 좀 긁어줄 것을

나의 경제야, 나는 내가 자꾸 무서워지는구나

사내가 주머니에 돈 떨어지면 좁쌀처럼 자잘해진다고

어떻게든 돈 벌 궁리나 좀 해 보라고 어머니는 말씀하시지만

그까짓 돈 몇 푼 때문에 친구한테도 증오를 들이대려는

나 자신이 사실은 더 걱정이구나 이러다가는 정말

작아지고 작아지고 작아져서 한 마리 딱정벌레나 되지 않을지

나는 요즘 그게 제일 걱정이구나




삶이 참 팍팍하다 여겨질 때, 손님 두어 사람만 와도

신발 벗어두는 곳이 좁아 신발들끼리 엎치락뒤치락 난장판일 때

어린 아들은 떼쓰며 울고 돈은 떨어져 술상 차리기도 곤란해지면

아내는 좀더 넓은 평수로 이사 갔으면 좋겠다고

쌀을 안치다가도 파를 다듬다가도 좀더 넓은 평수, 평수 하는데

팍팍하다 못해 삶이 더는 앞으로 나아갈 것 같지 않을 때

나는 전에 살던 집을 생각하고 그곳으로 가고 싶어진다


단칸 셋방에서 딸아이 하나 낳아 기저귀 갈아주던 때

먼데서 친구가 오면 아이 들쳐업고 아내는 친정 가서 자고

내 친구하고 밤늦도록 술 마시고 깬 다음날 아침에는

부엌에서 술국 끓이는 냄새가 꿈결인 듯 스며들던 집

식구가 단촐한지라 변소 푸고 나서도 오물세를 조금만 내고

주인집 인터폰 옆에 딩동딩동 소리 나는 벨 하나 대문에 달고

내가 늦게 귀가할 때마다 미안해하며 누르던 집

송학동 굴다리 지나 붕어빵 굽던 구멍가게 지나 목욕탕 지나

월부로 냉장고 한 대 살 수 없을까 자주 힐끔 들여다보던

금성대리점 지나면 일년에 삼십만원 사글셋집

십만원짜리 마라톤 4벌식 타자기 한 대 있으면 참 좋겠는데

다음 달 보충수업비 받아서 사버릴까 생각하던

주인집으로 전화가 걸려오면 마루를 살짝살짝 밟고 가서

통화를 끝내고는 우리도 전화 한 대 있으면 참 좋겠는데

다음다음 달 보너스 받으면 사버릴까 도란도란거리던

형광등 불빛이 비추던 밤이 깊던 그 집에서

나는 신규발령장 인주가 마르지 않은 중학교 국어 선생

자전거 타고 퇴근해 그 집에서 고추전 부쳐먹고 싶어진다


나는 또 대학 다닐 때 자취하던 집을 잊을 수가 없다

거기에 내 청춘의 입맞춤 자국이 묻어 있어서가 아니라

아버지가 우체국 소액환으로 열심히 하거라, 보내준 생활비를

술값으로 다 날리고 반찬거리 떨어져 슈퍼아줌마한테 자주

외상 달아놓던 라면 끓이다가 심심찮게 폭삭 엎어버리고 말던

지금 생각해 보면 늘 배고프고 하루종일 쓸쓸한 집

일 년에 한 번 꼴로 이불보따리에 책 몇 권, 전기밥솥 싣고

옮겨 다니던 지금은 주소도 알 수 없는 그 자취집, 그 하숙집들

그 시원찮은 빨래들이며 하이타이 냄새 나는 세월들

일찍도 아기 지운 친구의 애인들에게 미역국 끓여주던 기억

십이월마다 찾아오던 통지 없는 신춘문예 낙선의 기억

계엄군한테 직싸게 얻어맞고 빨간약 발라대던 기억

아픔도 없이 머리끝에서부터 발끝까지 아프던 기억

나는 저 혼자 돌아가는 레코오드판처럼 거기서 잘도 살았다


지금 호적에 등재된 내 본적 경기도 여주군 흥천면 대당리

주소만 봐도 나는 가슴이 아프다 우리 아버지

평생 사실 줄 알고 경상도에서 이주해 가서 지은 집

울타리가 없어 집 안 가득 바람이 많던, 팀스피리트 훈련 때는

근동에 전투기가 총알을 쏟아 붓고 갔다는 소문이 들리던 집

추운 날 마당에서 세수하고 문고리 잡으면 손이 쩍쩍 달라붙고

변소간에 앉아 있으면 엉덩이가 정말 쪼개질 것 같던

겨울방학 때 가면 일년 동안 동생들이 키운 염소를 잡아

창고에 매달아 놓고 구워 먹고 볶아 먹고 고아도 먹던 집

어머니는 그 노랑내 나는 국물이 보약 된다고 훌훌 마시라고

나는 안 마신다고 내빼서는 밤새 들판에 내린 삐라를 줍던

개학하고 학교에 내면 표창장도 주고 공책도 준다는

교과서 두께의 책삐라를 주워 똥도 닦고 코도 풀면

아버지는 종이가 그렇게 없느냐고, 말없이 군불을 지피시던 집

나는 그곳을 한번도 내 고향이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지만

면소재지 차부에서 버스를 내리면 뭉클한 게 있고

방학 끝나 차 타러 마을 빠져 나오면 또 가슴이 미어지던 집

아버지 배추 농사로 번 돈으로 시집을 사 읽으면서

그 어둠침침한 공부방 메주 뜨는 냄새가 되고 싶어진다


경기도로 피난 가듯 가기 전에 내 밑에 동생과 나는

가겟집 아이였다, 한겨울에 칠성사이다 달라고 조르다가 매맞고

내복 바람으로 쫓겨나서는 언 유리창에 대고 싹싹 빌던

한참 까불 때는 숟가락 잡고 둘이서 콩쿨대회도 열었지마는

토닥토닥 다투다 손톱자국이라도 생기면 어머니는 화가나

옆집 누구네처럼 엄마 없는 자식 되고 싶냐고, 우리는

별수 없이 또 싹싹 비고는 라면땅 한 봉지씩 나눠 먹던 집

연탄불 꺼진 날 솜이불 덮어쓰고 개구리같이 쪼그리고 있으면

동생과 내 입김으로 서로 훈훈해져서 금세 잠들고 말던 집

셋째와 넷째가 태어나도록 우리 여섯 식구는 이사도 안가고

그 단칸방에서 살았는데 예천농고 농구선수였다는 아버지

주무실 때 두 다리 쭉 뻗는 걸 한번도 못 보았으며

그래서 이불이 천막 같아서 잠잘 때마다 무릎이 서늘하던 집

그 무렵 찍은 흑백사진은 빛 바래거나 파리똥 앉았지만

나는 좋았다 나 시험지 백 점 받아오면 짜장면집에도 갔었다


그 이전에는 어디서 살았나, 이것은 내가 잘 모르는 일

나중에 자라서 알았지만 봉창 달린 예천 큰댁 작은방에서

나는 태어났다는데 솜털이 원숭이 새끼같이 보송보송한 것이

어른 손바닥 크기만한 것이 방 하나를 다 차지했었다는데

퉤퉤 쓴 침 뱉듯 육군 병장 제대하고 돌아온 집

조카들이 바글바글 울 때 마음놓고 술 한 잔 하고 싶을 때

그때부터 젊은 우리 아버지도 지금의 나처럼

물을 긷다가도 배추를 씻다가도 좀더 넓은 집, 넓은 집 하는

아내의 목소리를 들었을지 모른다 그리하여 지금의 나처럼

삶이 참 팍팍하다, 앞으로 나아갈 것 같지 않다 여겨질 때

옛날 살던 집으로 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흙벽에 시래기 몇 두름 마르는 서러운 겨울 한낮

호박죽 끓던 가마솥 앞에서 군침 꿀꺽 삼키며

그 뜨끈하고 걸쭉한 호박죽을 기다리던

수숫대같이 키 큰 한 소년을 오래 오래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겨울 강가에서



어린 눈발들이, 다른 데도 아니고

강물 속으로 뛰어 내리는 것이

그리하여 형체도 없이 녹아 사라지는 것이

강은,

안타까웠던 것이다

그래서 눈발이 물위에 닿기 전에

몸을 바꿔 흐르려고

이리저리 자꾸 뒤척였는데

그때마다 세찬 강물 소리가 났던 것이다

그런 줄도 모르고

계속 철없이 철없이 눈은 내려,

강은,

어젯밤부터

눈을 제 몸으로 받으려고

강의 가장자리부터 살얼음을 깔기 시작한 것이었다



3월에서 4월 사이



산서고등학교 관사 앞에 매화꽃 핀 다음에는

산서주조장 돌담에 기대어 산수유꽃 피고

산서중학교 뒷산에 조팝나무꽃 핀 다음에는

산서우체국 뒤뜰에서는 목련꽃 피고

산서초등학교 울타리 너머 개나리꽃 핀 다음에는

산서정류소 가는 길가에 자주 제비꽃 피고


山에 대하여



山은 저 홀로 푸르러지지 않는다네

한 山이 그 빛깔 흐려지며 그 너머 山에게 자기를 넘기면

그 빛깔 흐려진 山이 또 빛깔 흐려지며 그 너머 山에게 자기를 넘긴다네


山은 또한 저 홀로 멀리 사라지지 않는다네

한 山이 한 山을 받아 앞에 선 山에게 짙어진 빛깔 넘기면

그 山은 또 그 앞에 선 山에게 더 짙어진 빛깔 넘기고

그 빛깔 넘겨받은 山은 그 앞에 선 山에게 더더욱 짙어진 빛깔 넘긴다네


소나무 푸른 것은

우리 동네 앞산

우리 동네 앞산은

소쩍새를 키운다네



사랑



여름이 뜨거워서 매미가

우는 것이 아니라 매미가 울어서

여름이 뜨거운 것이다


매미는 아는 것이다

사랑이란, 이렇게

한사코 너의 옆에 붙어서

뜨겁게 우는 것임을


울지 않으면 보이지 않기 때문에

매미는 우는 것이다


그리운 여우



이렇게 눈 많이 오시는 날 밤에는

나는 방에 누에고치처럼 동그랗게 갇혀서

희고 통통한 나의 세상 바깥에 또 다른 세상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그 세상에도 눈이 이렇게 많이 오실 것인데 

여우 한 마리가, 말로만 듣던 그 눈도 털도 빨간 여우 한 마리가

나를 홀리려고 눈발 속을 헤치고

네 발로 어슬렁어슬렁 산골짜기를 타고 내려 올 것이라 생각하고

그 산길에는 마을로 내려갈 때를 놓친 산수유 열매가 어쩌면 붉어져 있기도 했을 터인데

뒤도 안 돌아보고 여우 한 마리가, 우리 집 마당에까지 와서

부르르 몸 흔들어 깃털에 쌓인 눈을 털며

이 집에 사람이 있나, 없나 기웃거릴 것이라 혼자 생각하고

메주 냄새가 나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사타구니 속에 두 손을 집어넣고 쪼글쪼글해진

그리하여 서늘하기도 한 불알을 한참을 주물러 보는 것인데

그러면 나도 모르게 불끈 무엇이 일어서는 듯한 생기와 함께

나는 혹시나 여우 한 마리가,

배가 고파서 마을로 타박타박 힘없이 걸어 내려 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사람 소리 하나 안 나는 뒤꼍에서

두리번두리번 먹을 것이 없나 하고 살피다가

일찍 군불 지펴 넣은 아랫방 아궁이 가에 잠시 쭈그리고 앉았다가

산 속에 두고 온 어린것들을 생각하고는

여우 한 마리가, 혹시라도 마른 시래기 걸린 소도 없는 외양간 뒷벽에

눈길을 주다가 코를 벌름거리며

그 코끝에는 김나는 이슬 몇 방울이 묻어 있기도 할 것인데

아 글쎄 그 여우 한 마리가, 아는 척도 하지 않는 사람들이 야속해서

세상을 차듯 뒷발로 땅바닥을 더러 탁탁 쳐보기도 했을 터인데

먹을 것은 없고

눈은 지지리도 못난 삶의 머리끄덩이처럼 내리고

여우 한 마리가, 그 작은 눈을 글썽이며

그 눈 속에도 서러운 눈이 소문도 없이 내리리라 생각하고 나는

문득 몇 해 전이던가 얼음장 밑으로 빨려 들어가 사라진

동무 하나가 여우가 되어 나 보고 싶어 왔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자리를 차고 일어나 방문을 확 열어제껴 보았던 것인데

눈 내려 쌓이는 소리 같은 발자국 소리를 내며

아아, 여우는 사라지고-----

여우가 사라진 뒤에도 눈은 내리고 또 내리는데

그 여우 한 마리를 생각하며

이렇게 눈 많이 오시는 날 밤에는

내 겨드랑이에도 눈발이 내려앉는지 근질근질거리기도 하고

가슴도 한없이 짠해져서 도대체가 잠을 이룰 수가 없었던 것이다




열심히 산다는 것



산서에서 오수까지 어른 군내버스비는

400원입니다


운전사가 모르겠지, 하고

백원짜리 동전 세 개하고

십원짜리 동전 일곱 개만 회수권 함에다 차르륵

슬쩍, 넣은 쭈그렁 할머니가 있습니다


그걸 알고 귀때기 새파랗게 젊은 운전사가

있는 욕 없는 욕 다 모아

할머니를 향해 쏟아 붓기 시작합니다

무슨 큰 일 난 것 같습니다

30원 때문에


미리 타고 있는 손님들 시선에도 아랑곳없이

운전사의 훈계 준엄합니다 그러면,

전에는 370원이었다고

할머니의 응수도 만만찮습니다

그건 육이오 때 요금이야 할망구야, 하면

육이오 때 나기나 했냐, 소리 치고

오수에 도착할 때까지

훈계하면, 응수하고

훈계하면, 응수하고


됐습니다

오수까지 다 왔으니

운전사도, 할머니도, 나도, 다 왔으니

모두 열심히 살았으니!





섬, 하면

가고 싶지만


섬에 가면

섬을 볼 수가 없다

지워지지 않으려고

바다를 꽉 붙잡고는

섬이, 끊임없이 밀려드는 파도를 수평선 밖으로

밀어내느라 안간힘 쓰는 것을

보지 못한다


세상한테 이기지 못하고

너는 섬으로 가고 싶겠지

한 며칠, 하면서

짐을 꾸려 떠나고 싶겠지

혼자서 훌쩍, 하면서


섬에 한번 가 봐라, 그 곳에

파도 소리가 섬을 지우려고 밤새 파랗게 달려드는

민박집 형광등 불빛 아래

혼자 한번

섬이 되어 앉아 있어 봐라


삶이란 게 뭔가

삶이란 게 뭔가

너는 밤새도록 뜬눈 밝혀야 하리


우주



잠자리가 원을 그리며 날아가는 곳까지가

잠자리의

우주다


잠자리가 바지랑대 끝에 앉아 조는 동안은

잠자리 한 마리가

우주다





외로움



시 쓰다가

날선 흰 종이에 손 벤 날

뒤져봐도

아까징끼 보이지 않는 날



바닷가 우체국



바다가 보이는 언덕 위에

우체국이 있다

나는 며칠 동안 그 마을에 머물면서 

옛 사랑이 살던 집을 두근거리며 쳐다보듯이

오래오래 우체국을 바라보았다

키 작은 측백나무 울타리에 둘러싸인 우체국은

문 앞에 붉은 우체통을 세워 두고

하루 내내 흐린 눈을 비비거나 귓밥을 파기 일쑤였다

우체국이 한 마리 늙고 게으른 짐승처럼 보였으나

나는 곧 그 게으름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내가 이 곳에 오기 아주 오래 전부터

우체국은 아마

두 눈이 짓무르도록 수평선을 바라보았을 것이고

그리하여 귓속에 파도 소리가 모래처럼 쌓였을 것이었다

나는 세월에 대하여 말하지만 결코

세월을 큰소리로 탓하지는 않으리라

한 번은 엽서를 부치러 우체국에 갔다가

줄지어 소풍 가는 유치원 아이들을 만난 적이 있다

내 어린 시절에 그랬던 것처럼 

우체통이 빨갛게 달아오른 능금 같다고 생각하거나

편지를 받아먹는 도깨비라고

생각하는 소년이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러다가 소년의 코밑에 수염이 거뭇거뭇 돋을 때쯤이면

우체통에 대한 상상력은 끝나리라

부치지 못한 편지를

가슴 속 주머니에 넣어 두는 날도 있을 것이며

오지 않는 편지를 혼자 기다리는 날이 많아질 뿐

사랑은 열망의 반대쪽에 있는 그림자 같은 것

그런 생각을 하다 보면

삶이 때로 까닭도 없이 서러워진다

우체국에서 편지 한 장 써 보지 않고

인생을 다 안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또 길에서 만난다면

나는 편지 봉투의 귀퉁이처럼 슬퍼질 것이다

바다가 문 닫을 시간이 되어 쓸쓸해지는 저물녘

퇴근을 서두르는 늙은 우체국장이 못마땅해할지라도

나는 바닷가 우체국에서

만년필로 잉크 냄새 나는 편지를 쓰고 싶어진다

내가 나에게 보내는 긴 편지를 쓰는

소년이 되고 싶어진다

나는 이 세상에 살아 남기 위해 사랑을 한 게 아니었다고

나는 사랑을 하기 위해 살았다고

그리하여 한 모금의 따뜻한 국물 같은 시를 그리워하였고

한 여자보다 한 여자와의 연애를 그리워하였고

그리고 맑고 차가운 술을 그리워하였다고

밤의 염전에서 소금 같은 별들이 쏟아지면

바닷가 우체국이 보이는 여관방 창문에서 나는

느리게 느리게 굴러가다가 머물러야 할 곳이 어디인가를 아는

우체부의 자전거를 생각하고

이 세상의 모든 길이

우체국을 향해 모였다가

다시 갈래갈래 흩어져 산골짜기로도 가는 것을 생각하고

길은 해변의 벼랑 끝에서 끊기는 게 아니라

훌쩍 먼바다를 건너기도 한다는 것을 생각한다

그리고 때로 외로울 때는

파도 소리를 우표 속에 그려 넣거나  

수평선을 잡아 당겼다가 놓았다가 하면서

나도 바닷가 우체국처럼 천천히 늙어 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고래를 기다리며



고래를 기다리며

나 장생포 바다에 있었지요

누군가 고래는 이제 돌아오지 않는다, 했지요

설혹 돌아온다고 해도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고요,

나는 서러워져서 방파제 끝에 앉아

바다만 바라보았지요

기다리는 것은 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기다리고, 기다리다 지치는 게 삶이라고

알면서도 기다렸지요

고래를 기다리는 동안

해변의 젖꼭지를 빠는 파도를 보았지요

숨을 한 번 내쉴 때마다

어깨를 들썩이는 그 바다가 바로

한 마리 고래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요




오래 된 우물



뒤안에 우물이 딸린 빈집을 하나 얻었다


아, 하고 소리치면

아, 하고 소리를 받아 주는

우물 바닥까지 언젠가 한 번은 내려가 보리라고

혼자서 상상하던 시절이 있었다

우물의 깊이를 알 수 없었기에 나는 행복하였다


빈집을 수리하는데

어린것들이 빗방울처럼 통통거리며 뛰어다닌다

우물의 깊이를 알고 있기에

나는 슬그머니 불안해지기 시작하였다

오래 된 우물은

땅 속의 쓸모 없는 허공인 것


나는 그 입구를 아예 막아 버리기로 작정하였다

우물을 막고 나서는

나, 방안에서 안심하고 시를 읽으리라

인부를 불러 메우지 않을 바에야 미룰 것도 없었다

눈꺼풀을 쓸어 내리듯 함석으로 덮고

쓰다 만 베니어 합판을 덧씌우고

그 위에다 끙끙대며 돌덩이를 몇 개 얹어 눌렀다


그리하여

우물은 죽었다


우물이 죽었다고 생각하자

나는 갑자기 눈앞이 캄캄해졌다

한때 찰박찰박 두레박이 내려올 때마다

넘치도록 젖을 짜 주던 저 우물은

이 집의 어머니,

별똥별이 지는 밤하늘을 밤새도록 올려다보다가

더러는 눈물 글썽이기도 하였을

저 우물은

이 집의 눈동자였는지 모른다


나는 우물의 눈알을 파먹은 몹쓸 인간이 되어

소리친다

아, 하고 소리쳐도

아, 하고 소리를 받아 주지 않는

우물에다 대고


모과나무



모과나무는 한사코 서서 비를 맞는다

빗물이 어깨를 적시고 팔뚝을 적시고 아랫도리까지

번들거리며 흘러도 피할 생각도 하지 않고

비를 맞는다, 모과나무

저 놈이 도대체 왜 저러나?

갈아입을 팬티도 없는 것이 무얼 믿고 저러나? 

나는 처마 밑에서 비 그치기를 기다리고 있다가

모과나무, 그가 가늘디가는 가지 끝으로

푸른 모과 몇 개를 움켜쥐고 있는 것을 보았다

끝까지, 바로 그것, 그 푸른 것만 아니었다면

그도 벌써 처마 밑으로 뛰어들어 왔을 것이다


숭어회 한 접시



눈이 오면, 애인 없어도 싸드락싸드락 걸어갔다 오고 싶은 곳

눈발이 어깨를 치다가 등짝을 두드릴 때

오래 된 책표지 같은 群山, 거기

어두운 도선장 부근


눈보라 속에 발갛게 몸 달군 포장 마차 한 마리

그 더운 몸 속으로 들어가고 싶은 거라

갑자기, 내 안경은 흐려지겠지만

마음은 백열 전구처럼 환하게 눈을 뜰 테니까


세상은 혁명을 해도

나는 찬 소주 한 병에다

숭어회 한 접시를 주문하는 거라

밤바다가, 뒤척이며, 자꾸 내 옆에 앉고 싶어하면

나는 그날 밤바다의 애인이 될 수도 있을 거라


이미 양쪽 볼이 불콰해진

바다야, 너도 한 잔 할래?

너도 나처럼 좀 빈둥거리고 싶은 게로구나


강도 바다도 경계가 없어지는 밤

속수무책, 밀물이 내 옆구리를 적실 때


왜 혼자 왔냐고,

조근조근 따지듯이 숭어회를 썰며

말을 걸어오는 주인 아줌마, 그 굵고 붉은 손목을

오래 물끄러미 바라보는 거라

나 혼자 오뎅 국물 속 무처럼 뜨거워져

수백 번 엎치락뒤치락 뒤집혀 보는 거라





바깥으로 뱉어 내지 않으면 고통스러운 것이

몸 속에 있기 때문에

꽃은, 핀다

솔직히 꽃나무는

꽃을 피워야 한다는 게 괴로운 것이다


내가 너를 그리워하는 것,

이것은 터뜨리지 않으면 곪아 썩는 못난 상처를

바로 너에게 보내는 일이다

꽃이 허공으로 꽃대를 밀어올리듯이


그렇다 꽃대는

꽃을 피우는 일이 너무 힘들어서

자기 몸을 세차게 흔든다

사랑이여, 나는 왜 이렇게 아프지도 않는 것이냐


몸 속의 아픔이 다 말라버리고 나면

내 그리움도 향기 나지 않을 것 같아 두렵다


살아 남으려고 밤새 발버둥을 치다가

입안에 가득 고인 피,

뱉을 수도 없고 뱉지 않을 수도 없을 때

꽃은, 핀다.


양철 지붕에 대하여



양철 지붕이 그렁거린다, 라고 쓰면

그럼 바람이 불어서겠지, 라고

그저 단순하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삶이란,

버선처럼 뒤집어 볼수록 실밥이 많은 것


나는 수없이 양철 지붕을 두드리는 빗방울이었으나

실은, 두드렸으나 스며들지 못하고 사라진

빗소리였으나

보이지 않기 때문에

더 절실한 사랑이 나에게도 있었다


양철 지붕을 이해하려면

오래 빗소리를 들을 줄 알아야 한다

맨 처음 양철 지붕을 얹을 때

날아가지 않으려고

몸에 가장 많이 못자국을 두른 양철이

그 놈이 가장 많이 상처 입고 가장 많이 녹슬어 그렁거린다는 것을

너는 눈치채야 한다


그러니까 사랑한다는 말은 증발하기 쉬우므로

쉽게 꺼내지 말 것

너를 위해 나도 녹슬어 가고 싶다, 라든지

비 온 뒤에 햇볕 쪽으로 먼저 몸을 말리려고 뒤척이지는 않겠다, 라든지

그래, 우리 사이에는 은유가 좀 필요한 것 아니냐?


생각해 봐

한쪽 면이 뜨거워지면

그 뒷면도 함께 뜨거워지는 게 양철 지붕이란다


아주 작고 하찮은 것이



아주 작고 하찮은 것이

내 몸에 들어올 때가 있네


도꼬마리의 까실까실한 씨앗이라든가

내 겨드랑이에 슬쩍 닿는 민석이의 손가락이라든가

잊을 만하면 한번씩 찾아와서 나를 갈아엎는

치통이라든가

귀틀집 처마 끝에서 떨어지는 낙숫물 소리라든가

수업 끝난 오후의 자장면 냄새 같은 거


내 몸에 들어와서

아주 작고 하찮은 것이

마구 양푼 같은 내 가슴을 긁어댈 때가 있네


사내도 혼자 울고 싶을 때가 있네

고대광실 구름 같은 집이 아니라

구름 위에 실컷 웅크리고 있다가

때가 오면 천하를 때릴 천둥 번개소리가 아니라

아주 작고 하찮은 것이

내 몸에 들어오면

나는 견딜 수 없이 서러워져

소주 한잔 마시러 가네


소주, 아주 작고 하찮은 것이

내 몸이 저의 감옥인 줄도 모르고

내 몸에 들어와서

나를 뜨겁게 껴안을 때가 있네




시인


나무 속에

보일러가 들어 있다 뜨거운 물이

겨울에도 나무의 몸 속을 그르렁그르렁 돌아다닌다


내 몸의 급수 탱크에도 물이 가득 차면

詩, 그것이 바람난 살구꽃처럼 터지려나

보일러 공장 아저씨는

살구나무에 귀를 갖다대고

몸을 비벼 본다


도둑들




생각해 보면, 딱 한 번이었다

내 열 두어 살쯤에 기역자 손전등 들고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서 푸석하고 컴컴해진 초가집 처마 속으로 잽싸게 손을 밀어 넣었던 적이 있었다


그날 밤 내 손끝에 닿던 물큰하고 뜨끈한 그것,

그게 잠자던 참새의 팔딱이는 심장이었는지, 깃털 속에 접어 둔 발가락이었는지, 아니면 깜박이던 곤한 눈꺼풀이거나 잔득잔득한 눈곱 같은 것이었는지,

어쩔 줄 모르고 화들짝 내 손끝을 세상 밖으로 밀어내던, 그것 때문이었다


나는 사다리 위에서 슬퍼져서 한 발짝 내려 갈 엄두도 내지 못하고, 그렇다고 허공을 치며 소리 내어 엉엉 울지도 못하고, 내 이마 높이에 와 머물던 하늘 한 귀퉁이에서 나대신 울어주던 별들만 쳐다보았다

정말 별들이 참새같이 까맣게 눈을 떴다 감았다 하면서 울던 밤이었다


네 몸 속에 처음 손을 넣어 보던 날도 그랬다

나는 오래 흐른 강물이 바다에 닿는 순간 멈칫 하는 때를 생각했고

해가 달의 눈을 가려 지상의 모든 전깃불이 꺼지는 월식의 밤을 생각했지만,

세상 밖에서 너무 많은 것을 만진

내 손끝은, 나는 너를 훔치는 도둑은 아닌가 싶었다

네가 뜨거워진 몸을 뒤척이며 별처럼 슬프게 우는 소리를 내던 그 밤이었다


낭만주의 




저 변산반도의 사타구니 곰소항에 가면

바다로부터 등 돌린 폐선들,

나는 그 낡은 배들이 뭍으로 기어오르고 싶어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뭣이? 바다가 지겹다고?

나는 시집을 내고 받은 인세를 모아서

바다에 발 묶인 배 한 척을 샀던 것이다


세상에, 아직도 시를 읽는 사람이 있나, 하고

너는 마치 고장난 엔진처럼 툴툴거리겠지

하지만 말이야, 배를 천천히 뭍으로 올려놓는 순간,

그 어둡던 바다도 배도 단번에 환해졌단다

그때 덩달아 끼룩끼룩 울어 준 것은 갈매기들이었고


너는 이해할 수 없다고, 바다만 바라보겠지

나는 배를 데리고 갈 방도를 생각하느라

20년 동안이나 끙끙대며 시를 쓴 것 같다

배를 분해해서 옮기는 일은 재미가 없을 테고

트럭 짐칸에다 배를 통째로 태우는 건 더 우스꽝스런 짓이지


그래서 밀고 가기로 한 것이다

귓불이 연하고 빨간 아이들이 조기떼처럼 재잘대며 배를 따라 왔던 거야

생각해 봐, 여러 개의 손들이 한꺼번에 배를 민다고 생각해 봐

배도 힘이 났던 거야


국도를 타고 가다가

지치면 미끄러운 보리밭으로도 가고.....

배를 밀고 가는 나를 보았다면, 너는

시계를 들여다보며 핑계를 대거나, 미친 짓이라며 손가락질했겠지

나는 배를 잠시 멈추고 네 귓구멍이 뻥 뚫리도록 뱃고동을 울려 주었을 거야

詩를 읽는 시간에 자신을 투자할 줄 모르는 인간하고는

놀지 않겠다, 절교다, 하고 말이야


나는 장차 배를 밀어 산꼭대기에 올려놓을 것이다

무엇 때문에 배를 산꼭대기로 밀고 올라가느냐고?

다 알고 있겠지만, 나는 시인이거든

내가 항해사였다면 배를 데리고 수평선을 꼴깍, 넘어갔을 거야



빗소리 듣는 동안




1970년대 편물점 단칸방에 누나들이 무릎 맞대고 밤새 가랑가랑 연애 얘기하는 것처럼

비가 오시네


나 혼자 잠든 척하면서 그 누나들의

치맛자락이 방바닥을 쓰는 소리까지 다 듣던 귀로, 나는

빗소리를 듣네


빗소리는

마당이 빗방울을 깨물어 먹는

소리


맛있게, 맛있게 양푼 밥을 누나들은 같이 비볐네

그때 분주히 숟가락이 그릇을 긁던 소리

빗소리


삶은 때로 머리채를 휘어 잡히기도 하였으나

술상 두드리며 노래 부르는 시간보다

목 빼고 빗줄기처럼 우는 날이 많았으나


빗소리 듣는 동안......


연못물은 젖이 불어

이 세상 들녘을 다 먹이고도 남았다네

미루나무 같은 내 장딴지에도 그냥, 살이 올랐다네


헛것을 기다리며




이제는 나를 사로잡고 있는 것이 그 무엇 무엇이 아니라

그 무엇 무엇도 아닌 헛것이라고, 써야겠다


고추잠자리 날아간 바지랑대 끝에 여전히 앉아 있던 고추잠자리와,

툇마루에서 하모니카를 불다가 여치가 된 외삼촌과,

문득 어둔 밤 저수지에 잉어 뛰던 소리와,

우주의 이마를 가시로 긁으며 떨어지던 별똥별과,

나는 아무 것도 아니라고 생각했을 때 새털구름처럼 밀려오던 자잘한 슬픔들을


내 문법 공책에 이제는 받아 적어야겠다

그 동안 나는 헛것을 피해 여기까지 왔다

너의 눈을 재 속에 숨은 숯불의 눈으로 보지 못하고,

너의 말을 처마 끝에 달린 풍경의 귀로 듣지 못하고,

너의 허벅지를 억새밭머리 바람의 혀로 핥지 못하였다


그래 여우라면, 사람의 키를 훌쩍 뛰어넘어

혼을 빼고 간을 빼먹는 네가 여우라면 오너라

나는 전등을 들지 않고도 밤길을 걸어

그 허망하다는 시의 나라를 찾아가겠다

너 때문에 뜨거워져 하나도 두렵지 않겠다


아무 것도 아닌 것에 대하여




속을 보여주지 않고 달아오르는 석탄난로

바깥에는 소리 없이 내리는 눈


철길 위의 기관차는 어깨를 들썩이며

철없이 철없이도 운다

사랑한다고 말해야 사랑하는 거니?

울어야 네 슬픔으로 꼬인 내장 보여줄 수 있다는 거니?


때로 아무 것도 아닌 것 때문에

단 한 번 목숨을 걸 때가 있는 거다

침묵 속에도 뜨거운 혓바닥이 있고

저 내리는 헛것 같은 눈, 아무 것도 아닌 저것도 눈송이 하나 하나는

제각기 상처 덩어리다, 야물게 움켜 쥔 주먹이거나


문득

역 대합실을 와락 껴안아 핥는 석탄난로

기관차 지나간 철길 위에 뛰어내려 치직치직 녹는 눈



살구나무 발전소




살구꽃......

살구꽃.....


그 많고 환한 꽃이

그냥 피는 게 아닐 거야


너를 만나러 가는 밤에도 가지마다

알전구를 수천, 수만 개 매어 다는 걸 봐


생각나지, 하루종일 벌떼들이 윙윙거리던 거,

마을에 전기가 처음 들어오던 날도

전깃줄은 그렇게 울었지


그래,

살구나무 어디인가에는 틀림없이

살구꽃에다 불을 밝히는 발전소가 있을 거야


낮에도 살구꽃......

밤에도 살구꽃......


아버지의 런닝구




황달 걸린 것처럼 누런 런닝구

대야에 양잿물 넣고 연탄불로 푹푹 삶던 런닝구

빨랫줄에 널려서는 펄럭이는 소리도 나지 않던 런닝구

白旗 들고 항복하는 자세로 걸려 있던 런닝구

어린 막내아들이 입으면 그 끝이 무릎에 닿던 런닝구

아침부터 저녁까지 지게를 많이 져서 등판부터 구멍이 숭숭 나 있던 런닝구

너덜너덜 살이 해지면 쓸쓸해져서 걸레로 질컥거리던 런닝구

얼굴이 거무스름하게 변해서 방바닥에 축 늘어져 눕던 런닝구

마흔 일곱 살까지 입은 뒤에 다시는 입지 않는 런닝구



느티나무 여자




평생 동안 쌔빠지게 땅에 머리를 처박고 사느라

자기 자신을 한 번도 들여다보지 않았다


가을 날, 잎을 떨어뜨리는 곳까지가

삶의 면적인 줄 아는

저 느티나무


두 팔과 두 다리로 허공을 헤집다가 

자기 시간을 다 써 버렸다

그래도 햇빛이며 바람이며 새들이 놀다 갈 시간은

아직 충분히 남아 있다고, 괜찮다고,

애써 성성한 가지와 잎사귀를 흔들어 보이는


허리가 가슴둘레보다 굵으며

관광버스 타고 내장산 한 번 다녀오지 않은

저 다소곳한 늙은 여자


저 늙은 여자도

딱 한 번 뒤집혀보고 싶을 때가 있었나 보다

땅에 박힌 머리채를 송두리째 들어올린 뒤에,

최대한 길게 다리를 쭉 뻗고 누운 다음,

아랫도리를 내주고 싶을 때가 있었나 보다


그걸 간밤의 태풍 탓이라고 쉽게 말하는 것은

인생을 절반도 모르는 자의

서툴고 한심한 표현일 뿐

[출처] 안도현 시|작성자 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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