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by Maia Zabrinsky (Australia)
인기척 / 이병률
한 오만 년쯤 걸어 왔다며
내 앞에 우뚝 선 사람이 있다면 어쩔테냐.
그 사람 내 사람이 되어
한 만 년쯤 살자고 조른다면 어쩔테냐.
후닥닥 짐 싸들고 큰 산 밑으로 가 아웅다웅 살테냐.
소리소문 없이 만난 빈 손의 인연으로
실개천 가에 뿌연 쌀뜨물 흘리며 남 몰라라 살테냐.
그렇게 살다, 그 사람이 걸어왔다는 오만 년이
오만 년 세월을 지켜온 지구의 나무와,
무덤과, 이파리와, 별과, 짐승의 꼬리로도
다 가릴 수 없는 넓이와 기럭지라면,
그때 문득 죄지은 생각으로
오만 년을 거슬러 혼자 걸어갈 수 있겠느냐.
아침에 눈뜨자마자, 오만 개의 밥상을 차려
오만 년을 노래 부르고, 산 하나를 파내어
오만 개의 돌로 집을 짓자 애교 부리면
오만 년을 다 헤아려 빚을 갚겠느냐.
미치지 않고는 배겨날 수 없는 봄날,
마알간 얼굴을 들이 밀면서
그늘지게, 그늘지게 사랑하며 살자고
슬쩍슬쩍 건드려 온다면 어쩔 테냐. 지친
오만 년 끝에 몸 풀어헤친 그 사람 인기척이
코앞인데, 살겠느냐. 말겠느냐..?
그때 내가 본 것을 생각하면 나는 눈이 맵다
길 위에서 그는 홀로였으나 외롭지 않았다. 스무 살 되던 해 이미 매혹의 대상으로 타자기와 카메라를 우선 삼았으므로. 그리고 그는 행복했다. 길에서 만난 사람들 속에 웃고 있는 제 자신을 사진 속의 어렴풋한 추억으로나마 오래오래 간직할 수 있었으니까. 또한 그는 고마웠다. 길에서 만난 사람들과의 인연을 고아낸 글 속에서 나날이 어른이 되어가는 제 자신을 확인할 수 있었으니까. 지금 이 순간에도 또 어딘가로 가기 위해 지도 위에 서성대는 제 자신의 어쩔 수 없음은 바로 이 ‘길’, 영혼과 몸의 무한한 그 열림 때문이리라.
끌림은 목차도 없고 페이지도 매겨져 있지 않다. 그냥 스르륵 펼치다가 맘에 드는 장에 멈춰 서서 거기부터가 시작이구나, 읽어도 좋고 난 종착지로부터 출발할 거야, 하는 마음에서 맨 뒷장부터 거꾸로 읽어나가도 좋다. 여행이 바로 그런 거니까. 그러다 발견하게 될 카메라 노트, 짧지만 울림이 깊은, 마음 속 여행지마다 나만 알도록 살짝 꽂아둔 기억의 푯말들!
여행가방에 쏙 들어옴직한 작은 사이즈의 책 크기도 그렇거니와 오돌도돌 책 표지를 장식한 남미 시인의 시 구절을 점자처럼 만져보는 재미, 표지 한 꺼풀을 벗겨 초콜릿으로 발라놓은 듯한 속표지를 만났을 때의 저도 모를 탄성들, 이 책을 읽는 재미임에 분명할 것이다. 또한 이 책에 끌려 정호승 ? 신경숙 ? 이소라 씨가 덧댄 또 다른 ‘끌림’들은 우리를 제2, 제3의 끌림으로 안내하기에 충분하리라. 그만큼 따스하고 도탑다는 얘기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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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소개
이병률 -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시인이며, 현재 MBC FM '이소라의 음악도시'의 작가 일을 하고 있다. 펴낸 시집으로「당신은 어딘가로 가려 한다」가 있다.
책 표지 글
이병률 시인에게는 꼭 가보고 싶은, 가지 않으면 아니 될 '마음의 나라'가 있나 보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시인이라는 이름 하나만 배낭처럼 걸치고 50여 개국을 정처 없이 떠돌았을까. 장미향이 나는 1온스의 향수를 얻기 위해서는 1톤의 장미가 필요하다는데, 그는 1온스의 장미향이 간절했던 것일까. 이 책은 여행자의 가슴속에 눈물처럼 남아 결코 사라지지 않는 순간의 순간만을 담은 책이다. 그래서 실은 산문집이라기보다는 시집이며, 바다라기보다는 소금이며, 육체라기보다는 영혼이다. 당신은 이 책을 통해 왜 인생이 여행에 비유되는지, 당신의 인생이 어디쯤 어느 곳에서 미소를 띠거나 울음을 삼키며 여행하고 있는지 저절로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다 읽고 책장을 덮었을 때, 이 책은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결국 사람이 머물 곳은 사람의 마음뿐이며, 사람이 여행할 곳은 사람의 마음뿐이라고. - 정호승 · 시인
병률은 나그네 같다. 늘 어딘가로 가고 있다. 놀라운 건 그런 병률이 일상에서는 누구와 견줄 바없이 지극히 성실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가 길 위의 인간이라는 사실을 깜빡 잊을 때가 있다. 지금은 아니지만 여행자 병률과 함께 2년쯤 한 동네에 같이 살았다. 그가 빈번하게 카메라를 짊어지고 먼 길을 떠났으므로 나는 그가 비워두고 간 빈집 식물에 물을 주러 갔다. 두 달 만에 혹은 보름 만에 병률이 돌아와 보여줬던 사진과 들려준 이야기들이 이 책이 되었을 것이다. 돌아오자마자 곧 떠날 계획을 세웠던 그 마음의 일부도 여기 한데 담겨 있으리라. 나 같은 정주자들에겐 닫힌 문을 밀어볼 때와 같이 설레고 반가운 일이다. - 신경숙 · 소설가
한 장을 읽고 그 다음 장을 읽고 다시 아까 봤던 앞장으로 돌아가 내가 읽어낸 게 맞는지 짚어본 다음 조금 전에 읽었던 곳을 또다시 읽는다. 참고서 보듯이 꼼꼼히 읽게 되는 너의 글이 좋다. 나이에 어울리는 주름과 눈빛을 가지고 있지만 너는 아직도 너무 수줍다. 그 여릿함으로 오랜 시간 가다듬어 보여준 네 마음을 단 한 줄도 다치게 하고 싶지 않다. 모르겠다. 내가 그렇게까지 조심스럽게 네 글을 대하는 걸 네가 원하지 않을 수도 있겠다. 어쩌면 너는 너의 글보다 그렇게까지 예민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그건 내 예민함 때문에라도 그러고 싶다. 책에 글과 함께 실린 네가 찍은 사진들을 보면서 나였어도 그곳의 그 시간, 그 모습을 담아 왔을 거라 생각하며 참 너무 나 같아서 보다가 웃다가 울었다. 이렇게 나를 닮은 사람을 찾아냈을 때의 뭉클함 때문에도 삶은 살아진다. 좋다. 책도 너도 또 나조차도. - 이소라 · 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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