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화나무중에서 으뜸은 단연코 화엄사 각황전 옆 흑매다. 조선 숙종 때 장육전이 있던 자리에 각황전을 지어 이를 기념하기 위해 계파선사가 매화나무를 심었으니 무려 300년이 훨씬 넘은 노령의 나무다.
매화는 홀로 피어야 품격이 있다. 매서운 추위를 견딘 매화는 향기도 그윽하다. 깊은 산속 나 홀로 핀 늙고 수척한 한 그루 매화. 아무도 봐주는 사람 없어도, 해마다 봄이 되면 어김없이 피었다 진다. 그 은은한 향기 냇물 따라 십리 밖까지 퍼진다. 벌 나비가 날아든다. 밤엔 달빛과 별빛이 꽃잎 위에 내려앉는다. 매화는 늙을수록 기품 있고 향기 가득한데, 인간은 왜 나이 먹을수록 추해지고 떼 지어 욕심만 많아질까...
흔히 홍매화는 이름과 달리 윗 사진과 같이 연분홍색을 띄는 것이 대부분이다. 빨간색의 매화도 있지만, 대부분 꽃잎이 첩첩이 겹쳐진 개량종 만첩매다. 만첩매는 꽃잎이 화려하게 달리긴 하지만, 매화 특유의 정갈한 맛은 크게 떨어진다.
하지만 화엄사의 흑매는 다르다. 여느 매화처럼 다섯개 꽃잎의 정갈한 모습이되 꽃잎의 색감은 피처럼 붉다. 그 어느 곳에서도 만나보지 못한 색감이다.
이 흑매는 나무 등걸이 고풍스럽고 자연스레 휜 모습이 마치 옛그림을 보는 듯 하다. 언제고 봄날에 가슴이 아프거든 화엄사를 찾아 흑매의 붉은 마음을 따보시라... 아프도록 아름다운 꽃을 보면 자연스레 아픔이 치유될지니... 언제든 봄날에 기쁨을 나눌 일이 있다면 화엄사에 들러 흑매와 같이 나누시라... 봄처럼 그대들도 충분히 아름다워질지니...
신라 불교의 중심 사상인 화엄의 근본 도량의 하나로 웅대한 지리산 남쪽 기슭에 위치한 유서깊은 명찰 화엄사! 신라 진흥왕 때 연기조사가 창건하였다고 전해지는데 다양한 역사와 문화유적을 간직하고 있는 사찰이다.
그윽한 노송 숲에 둘러싸여 독특하고도 경건한 분위기를 느끼게 해주는 천년 고찰 화엄사는 신라 불교의 중심 사상인 화엄의 근본 도량이다. 또한 건물 전체가 국보로 지정될 만큼 우아하고 당당한 바는 어떤 사찰도 따르지 못한다.
옛부터 신선들이 모여 사는 삼신산(三神山) 가운데 하나로 손꼽히기도 했던 지리산 남쪽 기슭에 위치하고 있는 이 사찰은 진흥왕 때 연기조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지는데, 실제로 불교 역사에 뚜렷한 흔적을 남긴 것은 통일신라시대인 8세기 이후부터이다.
80권의 [화엄경]을 사경(寫經)하는 작업을 주도하였던 연기조사와 그를 기리기 위해 자장율사가 세운 4사자 3층석탑! 그리고 의상대사가 이곳에 기거하면서 3층의 장륙전을 건립하고 사방 벽면에 둘렀다고 하는 화엄석경 등 일련의 불사로 인해 화엄사는 대도량의 기틀을 마련할 수 있었다. 또한 9세기에는 다양한 조각과 전통적인 형태의 서로 대비되는 동서 5층석탑을 세웠고, 의상의 화엄을 주축으로 하면서도 기신론과의 조화를 꾀하는 등 포용적인 관점을 지향하며 독창적인 면모를 이루어 왔다.
대개의 절은 대웅전을 중심으로 가람을 배치하지만, 이 절은 각황전이 중심을 이루어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을 주불(主佛)로 공양한다. 주요 문화재로는 국보 제12호인 석등(石燈), 국보 제35호인 4사자3층석탑(四獅子三層石塔), 국보 제67호인 각황전이 있으며, 보물 제132호인 동오층석탑(東五層石塔), 보물 제133호인 서오층석탑, 보물 제300호인 원통전전 사자탑(圓通殿前獅子塔), 보물 제299호인 대웅전이 있다. 부속 암자로는 구층암(九層庵), 금정암(金井庵), 지장암(地藏庵)이 있다. (구층암(九層庵)에 대해서는 따로 포스팅 할 생각이다)
서툴게 놓인 돌길을 따라 천황문을 지나면 고택의 단정한 정원을 찾은 느낌이 든다. 인위적 질서를 강조한 여느 가람들이 갖는 싱겁고 건조한 느낌과는 달리 화엄사는 오히려 그런한 질서들이 수려하고 지존한 화엄의 세계를 펼친 듯하여 저절로 고개가 숙여지지 않을 수가 없다.
화엄사 각황전은 다포식 건물에 2층 공포로 짜여져 있으나 안에서 보면 하나의 층으로 이루어져 내외 모두 장엄하고 웅장한 느낌을 준다. 마치 덕수궁의 석어당 건축물과 흡사한 느낌이 든다. 외부 단청은 거의 벗겨져 오히려 묘한 자연미를 연출하지만 내부 단청은 그 정교함이 여전히 살아 있다.
각황전에 오르는 계단 입구에는 오층석탑 하나가 서 있다. 엄밀하게 말하면 대우전 앞에 있는 동오층석탑과 쌍을 이루는 서오층석탑이다. 장식이 없고 단순한 동오층석탑에 비해 정교한 양각으로 이루어진 조각들이 분명한 차별성을 보여주는 탑이다. 특히 기단부 부분에는 12지신상이 배치되어 있어 흔치 않은 예를 보여주고 있다.
각황전앞 석등은 높이 6.4미터의 세계최고를 자랑하는 것으로 대가람을 밝히는 석등답게 크기나 조각이 시원스럽고 화려하다. 조금이라도 작거나 조촐했다면 각황전의 위세에 누를 끼칠수도 있었지만 오히려 더욱 당당한 모습이 믿음직스럽게 느껴진다.
하기야 석등은 각황전에 비해 연배가 한참 올라가므로 석등의 규모에 맞게 각황전이 지어졌는지도 모르겠다. 웅장한 절이 고운 느낌을 갖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구나 오래된 고찰의 신비감과 후대의 질서가 조화를 이루기란 상극의 한계를 벗어나지 않는 다음에야 불가능한 게 일반적이다. 새것은 옛것을 배우고 새것에게 자리를 양보할 줄 아는 미덕을 발휘한다면 화엄사는 장엄한 고찰의 위용을 잃지 않을 것이다.
화엄사 경내에는 특이한게 두가지 있는데 각황전 옆 하도 붉게 피어 해질녘 빛에 보면 검은색이 감도는 듯 해서 흑매라는 명칭이 붙은 홍매와 사자가 입을 벌린 모습이 네 마리 모두 다른 4사자3층석탑이다.
마침 화엄사를 찾았을 때 흑매가 만개해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절 건물과 어찌 그리 잘 어울리는지 절로 감탄이 흘러나왔다. 역시 매화는 떼로 집단으로 피우기 보다는 고고하게 홀로 피어 주변 경관들과 어울리는 것이 한결 멋스럽다. 특히 기와의 고풍스러운 색조와 잘 어울린다.
4사자3층석탑의 형태는 크게 벌린 녀석부터 아예 입을 다문 녀석까지 다양한 입모양을 볼 수가 있는데 왜 그렇게 표현했을까? 아마도 인간의 희노애락을 표현한 것이 아닐까? 결코 말을 많이 한다고 하여 자기 속을 모두 표현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말을 많이 함으로 인해 더 많은 갈증을 느끼고 더 큰 공허함만을 느낄 뿐이다. 입을 다문 사자의 모습을 보고 또 한번 삶을 배울 수도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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