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글/김 용 택

시 모음

조용한ㅁ 2009. 5. 23. 14:02

우리는


우리는 서로 없는 것같이 살지만
서로 꽉 차게 살아
어쩌다 당신 모습 보이지 않으면
내 눈길은 여기저기
당신 모습 찾아 헤메입니다
강 건너 우리 밭가 감잎 사이
텃밭 옥수수잎 사이에
어른어른 호박꽃만 피어나도
내 가슴은 뛰고
바람에 꽃잎같이 설레입니다

우리는 날이면 날마다
얼굴 맞대고 살아도
당신이 보고 싶고
밤이면 밤마다 살 맞대고 잠들어도
이따금 손 더듬어 당신 손 찾아
내 가슴에 얹고
나는 안심하며 잠듭니다

내 곁에 늘 꽃 피는 당신
내 마음은 당신한테 머물러 쉬며
한 세월이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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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이 많아서


꽃이 많아서 슬픈 봄이네요
풀 속에 무리무리 고개 들고
그만그만한 키로
바람도 없이 벙글어 어느 한 꽃이 쓰러지면
함께 쓰러져 풀꽃들
서로서로 향기로 배고프고
배고픈 향기로 꽃들은 더욱 선명하네요
강변 가득히 깔린 꽃들이 보기 싫어서
외면하지만 마음은 거기 가 있습니다
누가 지금 저 꽃을 꽃이라 하겠습니까
누가 있어 저 꽃을 꽃이라 말하면
꽃이라고 대답하겠습니까


시집<누이가 날이 저문다>.열림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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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좋은 당신


어느 봄날
당신의 사랑으로
응달지던 내 뒤란에
햇빛이 들이치는 기쁨을 나는 보았습니다.
어둠 속에서 사랑의 불가로
나를 가만히 불러 내신 당신은
어둠을 건너온 자만이 만들 수 있는
밝고 환한 빛으로 내 앞에 서서
들꽃처럼 깨끗하게 웃었지요.
아,
생각만 해도

좋은
당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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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한송이


간절하면
가 닿으리
너는
그 끝에 눈이 부시게 서 있으니
열렬한 것들은

꽃이 되리
꽃과 사랑을 기다리는
길고 지루한 날들
네가 내게준
은빛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너의 향기로운 환한 집에 내가 아무도 몰래 숨었은;
네 손에 쥐어진 꽃을 던지고
아, 열렬하게 돌아서서 너는 내게 안기었네
이 세상을 다 삼키고
이 세상
끝에
새로 핀

한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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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진강 5
-삶

이 세상
우리 사는 일이
저물 일 하나 없이
팍팍할 때,
저무는 강변으로 가
이 세상을 실어 오고 실어 가는
저무는 강물을 바라보며
팍팍한 마음 한 끝을
저무는 강물에 적셔
풀어 보낼 일이다.
버릴 것 다 버리고
버릴 것 하나 없는
가난한 눈빛 하나로
어둑거리는 강물에
가물가물 살아나
밤 깊어질수록
그리움만 남아 빛나는
별들같이 눈떠 있고,
짜내도 짜내도
기름기 하나 없는
짧은 심지 하나
강 깊은 데 박고,
날릴 불티 하나 없이
새벽같이 버티는
마을 등불 몇 등같이
이 세상을 실어 오고 실어 가는
새벽 강물에
눈곱을 닦으며,
우리 이렇게
그리운 눈동자로 살아
이 땅에 빚진
착한 목숨 하나로
우리 서있을 일이다
달이 떴다고 전화를 주시다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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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진강 15
-겨울, 사랑의 편지


산 사이
작은 들과 작은 강과 마을이
겨울 달빛 속에 그만그만하게
가만히 있는 곳
사람들이 그렇게 거기 오래오래
논과 밭과 함께
가난하게 삽니다.
겨울 논길을 지나며
맑은 피로 가만히 숨 멈추고 얼어 있는
시린 보릿잎에 얼굴을 대보면
따뜻한 피만이 얼 수 있고
따뜻한 가슴만이 진정 녹을 수 있음을
이 겨울에 믿습니다.
달빛 산빛을 머금으며
서리 낀 풀잎들을 스치며
강물에 이르면
잔물결 그대로 반짝이며
가만가만 어는
살땅김의 잔잔한 끌림과 이 아픔
땅을 향한 겨울 풀들의
몸 다 뉘인 이 그리움
당신,
아, 맑은 피로 어는
겨울 달빛 속의 물풀
그 풀빛 같은 당신
당신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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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 2


바람없이 눈이 내린다
이만큼 낮은 데로 가면 이만큼 행복하리
살며시 눈감고
그대 빈 마음 가장자리에
가만히 앉는 눈

곧 녹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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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여자네 집


가을이면 은행나무 은행잎이 노랗 게 물드는 집
해가 저무는 날 먼데서도 내 눈에 가장 먼저 뜨이는 집
생각하면 그리웁고 바라보면 정다웠던 집
어디 갔다가 늦게 집에 가는 밤이면
불빛이, 따뜻한 불빛이 검은 산속에 깜박깜박 살아 있는 집
그 불빛 아래 앉아 수를 놓으며 앉아 있을
그 여자의 까만 머릿결과 어깨를 생각만 해도
손길이 따뜻해져오는 집
살구꽃이 피는 집
봄이면 살구꽃이 하얗게 피었다가
꽃잎이 하얗게 담 너머까지 날리는 집
살구꽃 떨어지면 꽃잎이 일으킨 물결처럼 가 닿고 싶은 집
샛노란 은행잎이 지고 나면
그 여자
아버지와 그 여자
큰 오빠가
지붕에 올라가
하루종일 노랗게 지붕을 이는 집
노란 초가집
어쩌다가 열린 대문 사이로 그 여자네 집 마당이 보이고
그 여자가 마당을 왔다갔다하며
무슨 일이 있는지 무슨 말인가 잘 알아들을 수 없는 말소리와
옷자락이 대문 틈으로 언뜻언뜻 보이면
그 마당에 들어가서 나도 그 일에 참견하고 싶었던 집
마당에 햇살이 노란 집
저녁연기가 곧게 올라가는 집
뒤안에 감이 붉게 익는집
참새떼가 지저귀는 집
보리타작 콩타작 도리깨가 지붕위로 보이는 집
눈 오는 집
아침 눈이 하얗게 처마끝은 지나
마당에 내리고
그 여자가 몸을 웅숭그리고
아직 쓸지 않은 마당을 지나
뒤안으로 김치를 내려 가다
"하따, 눈이 참말로 이쁘게도 온다이이"하며
눈에 가득 내리는 하늘을 바라보다가
싱그런운 이마와 검은 속 눈썹에 걸린 눈을 털며
김칫독을 열 때
하얀 눈송이들이 어두운 김칫독안으로
하얗게 내리는 집
김칫돌에 엎드린 그 여자의 등에
하얀 눈송이들이 하얗게 하얗게 내리는 집
내가 함박눈이 되어 내리고 싶은 집
아무도 오가는 이 없는 늦은 밤
그 여자의 방에서만 따뜻한 불빛이 새어나오면
발자국을 숨기며 그 여자네집 마당을 지나 그여자의 방앞
뜰방에 서서 그 여자의 눈 맞은 신을 보며
머리에 어깨에 샇인 눈을 털고
가만가만 내리는 눈송이들도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가만 가만히 그 여자를 부르고 싶은 집



네 집
어느 날인가
그 어느 날인가 못밥을 머리에 이고 가다가 나와 딱
마주쳤을 때
'어머나' 깜짝 놀라며 뚝 멈추어 서서 두 눈을 똥그랗게 뜨고
나를 쳐다보며 반가움을 하나도 감추지 않고
환하게, 들판에 고봉으로 담아 놓은 쌀밥같이
화아완하게 하얀 이를 다 드러내며 웃던 그
여자 함박꽃 같던 그
여자
그 여자가 곷 같은 열아홉살까지 살던 집
우리 동네 바로 윗동네 가운데 고살 첫집
내가 밖에서 집으로 갈 때
차에서 내리면 제일 먼저 눈길이 가는 집
그 집 앞을 다 지나도록 그 여자 모습이 보이지 않으면
저절로 발걸음이 느려지는 그 여자네 집
지금은 아, 지금은 이 세상에 없는 집
내 마음속에 지어진 집
눈 감으면 살구꽃이 바람에 하앟게 날리는 집
눈 내리고, 아, 눈이, 살구나무 실가지 사이로
목화송이 같은 눈이 사흘이나
내리던 집
그 여자네 집
언제나 그 어느 때나 내마음이 먼저

있던 집
그 여자네

생각하면,생각하면 생,각,을,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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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사람 얼굴처럼


손에 잡히지 않는 그리운 사람의 얼굴처럼
밤하늘의 별들은 반짝입니다
나를 절 뒤안 같은 데로
사람들이 다 돌아간 절 뒤안 같은 데로 가서
이끼 푸른 절기둥에 기대어 쉬고 싶습니다
날이 어두워오고
어둠속에 가만히 손 내밀어 잡고 싶은
그리운 사람의 얼굴처럼
가만가만 서쪽하늘에 동아나는 별들은
그냥 하염없이 바라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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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장


내마음이 당신을 향해 언제 열렸는지 시립기만 합니다
가만히 있을 수 없어
논둑길을 마구 달려보지만 내달아도 내달아도
속떨림은 멈추지 않습니다
하루종일 시도 때도 없이
곳곳에서 떠올라
비켜주지 않는 당신 얼굴 때문에
어쩔 줄 모르겠어요
무얼 잡은 손이 마구 떨리고
시방 당신 생각으로
먼 산이 다가오며 어지럽습니다
밤이면 밤마다
당신을 향해 열린
마음 닫아보려고
찬바람 속으로 나가지만 빗장을 걸지 못하고
시린 바람만 가득 안고
돌아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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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 너는 죽었다


콩타작을 하였다
콩들이 마당으로 콩콩 뛰어나와
또르르또르르 굴러간다
콩 잡아라 콩 잡아라
굴러가는 저 콩 잡아라
콩 잡으로 가는데
어, 어, 저 콩 좀 봐라
쥐구멍으로 쏙 들어가네


콩, 너는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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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


며칠을 바람 찾아 돌아다녔습니다
저물 때 저물어서
고개 숙여 어둑어둑 걷습니다
아무래도 나이 스물은 슬픈 것 같습니다

걸을수록 슬픔은 무거워
몸으로 견디기 힘듭니다

슬픔이 무거워
어둠에 머리 기대고 핀
하얀 들꽃들을 만났습니다

정든 땅 언덕 위 초가 토방에 앉아
해 걷힌 눈을
마당에 깔았습니다


누이야 날이 저문다, 창작과비평사,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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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사랑한 당신



나뭇잎이 필 때도 나는 나무 곁에 서 있었습니다.

비가 올 때도 나는 나무 곁에 서 있었습니다.

잎이 질 때도 나는 나무 곁에 서 있었습니다.

나는 눈이 내리기 전과 눈이 내릴 때와 눈이 내린 후에도 나무 곁에

서 있었습니다.

오랜 세월 나무도 내 곁에 서 있었답니다.

해 지면 강가에 나가 뒷짐 지고 나무에 기대 서서 바라본

그리운 저 강물,

나는 오래도록 당신을 사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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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과 그 사람


밤이 되면 그 사람은 강으로 나가
강가 바위 위에 누워 하늘을 바라보았습니다.

별이 떴습니다.
별이 뜨면 그 사람은 별과 이야기했습니다.
어느 날 별이 말했습니다.
"나는 네 속에 들어가 네가 되고 싶어."
그 후로 별은 그 사람 속에 들어와 살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은 산도 그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네 속에 사는 산이 되고 싶어."
산도 그 사람 속에 들어와 살게 되었습니다.
새도, 나무도, 달도, 그리고 세상 모든 것들이
그렇게 그 사람 속에 들어와 살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인가
강물이 말했습니다.
"나는 네 속을 흐르는 강물이 될래."

그 사람은 강물이 되어 세상 모든 것을 품고 흐르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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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화의 사랑



사랑이 그리도 깊더냐
어디 닿지 못하고
기화는 그리워 헤매도네
물이 그리도 깊더냐
물끝에도 닿지 못하고
기화는 오늘도 사랑따라 흐르네
하얀 억새들은
너의 못짓처럼 강언덕에 서럽고
죽어도 닿지 못하는 사랑처럼
시린 강물에 어리며 눈물을 닦네
어디에서 오는가 떨어지는
첫 눈송이들은
강물에 눈뜨고 겁없이 사라지는데
흐르는 강물이여
노래 한곡도 없이 지는 사랑이여
누구하나 목놓아 부르지 못하고
강가에 나앉아
기화는 흐득이네
아무리 멀리 흔들려도
뿌리는 땅에 있어
아, 사랑이여
하얀 이 손짓으로 누구를 부르랴
복사꽃잎같이 날리어오는
눈송이들이여


나는 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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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왜 모를까


이별은 손 끝에 있고
서러움은 먼데서 온다
강 언덕 풀잎들이 돋아나며
아침 햇살에 핏줄이 일어선다
마른 풀잎들은 더 깊이 숨을 쉬고
아침 산그늘 속에
산벚꽃은 피어서 희다
누가 알랴 사람마다
누구도 닿지 않은 고독이 있다는 것을
돌아앉은 산들은 외롭고
마주 보는 산은 흰 이마가 서럽다
아픈 데서 피지 않은 꽃이 어디 있으랴
슬픔은 손 끝에 닿지만
고통은 천천히 꽃처럼 피어난다
저문 산 아래
쓸쓸히 서 있는 사람아
뒤로 오는 여인이 더 다정하듯이
그리운 것들은 다 산 뒤에 있다
사람들은 왜 모를까 봄이 되면
손에 닿지 않는 것들이 꽃이 된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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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일


해가 지면 나는 날마다 나무에게로 걸어간다
해가 지면 나는 날마다 강에게로 걸어간다
해가 지면 나는 날마다 산에게로 걸어간다
해가 질 때, 나무와 산과 강에게로 걸어가는 일은 아름답다 해가 질 때,
사랑하는 사람을 그리워하며 사랑하는 사람에게로 산그늘처럼 가는
일만큼 아름다운 일은
세상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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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이 떴다고 전화를 주시다니요


달이 떴다고 전화를 주시다니요
이 밤 너무 신나고 근사해요
내 마음에도 생전 처음 보는
환한 달이 떠오르고
산 아래 작은 마을이 그려집니다
간절한 이 그리움들을,
사무쳐 오는 이 연정들을
달빛에 실어
당신께 보냅니다


세상에,
강변에 달빛이 곱다고
전화를 다 주시다니요
흐르는 물 어디쯤 눈부시게 부서지는 소리
문득 들려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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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가을입니다
해질녘 먼 들 어스름이
내 눈 안에 들어섰습니다
윗녘 아랫녘 온 들녘이
모두 샛노랗게 눈물겹습니다
말로 글로 다할 수 없는
내 가슴속의 눈물겨운 인정과
사랑의 정감들을
당신은 아시는지요


해 지는 풀섶에서 우는
풀벌레들 울음소리 따라
길이 살아나고
먼 들 끝에서 살아나는
불빛을 찾았습니다
내가 가고 해가 가고 꽃이 피는
작은 흙길에서
저녁 이슬들이 내 발등을 적시는
이 아름다운 가을 서정을
당신께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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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생의 솔숲에서


나도 봄산에서는
나를 버릴 수 있으리
솔이파리들이 가만히 이 세상에 내리고
상수리나무 묵은 잎은 저만큼 지네
봄이 오는 이 숲에서는
지난날들을 가만히 내려놓아도 좋으리
그러면 지나온 날들처럼
남은 생도 벅차리
봄이 오는 이 솔숲에서
무엇을 내 손에 쥐고
무엇을 내 마음 가장자리에 잡아두리
솔숲 끝으로 해맑은 햇살이 찾아오고
박새들은 솔가지에서 솔가지로 가벼이 내리네
삶의 근심과 고단함에서 돌아와 거니는 숲이여
거기 이는 바람이여
찬 서리 내린 실가지 끝에서
눈뜨리
눈을 뜨리
그대는 저 수많은 새 잎사귀들처럼 푸르른 눈을 뜨리
그대 생의 이 고요한 솔숲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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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이 떴다고 전화를 주시다니요



달이 떴다고 전화를 주시다니요
이 밤 너무 신나고 근사해요
내 마음에도 생전 처음 보는
환한 달이 떠오르고
산 아래 작은 마을이 그려집니다
간절한 이 그리움들을,
사무쳐 오는 이 연정들을
달빛에 실어
당신께 보냅니다


세상에,
강변에 달빛이 곱다고
전화를 다 주시다니요
흐르는 물 어디쯤 눈부시게 부서지는 소리
문득 들려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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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밤


달빛이 하얗게 쏟아지는
가을 밤에
달빛을 밟으며
마을 밖으로 걸어나가보았느냐
세상은 잠이 들고
지푸라기들만
찬 서리에 반짝이는
적막한 들판에
아득히 서보았느냐
달빛 아래 산들은
빚진 아버지처럼
까맣게 앉아 있고
저 멀리 강물이 반짝인다
까만 산속
집들은 보이지 않고
담뱃불처럼
불빛만 깜박인다
하나 둘 꺼져가면
이 세상엔 달빛뿐인
가을 밤에
모든 걸 다 잃어버린
들판이
들판 가득 흐느껴
달빛으로 제 가슴을 적시는
우리나라 서러운 가을 들판을
너는 보았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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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랬다지요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사는게 이게 아닌데
이러는 동안
어느새 봄이 와서 꽃은 피어나고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그러는 동안 봄이 가며
꽃이 집니다


그러면서
그러면서 사람들은 살았다지요
그랬다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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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이야 날이 저문다




누이야 날이 저문다

저뭄을 따라가며

소리없이 저물어 가는 강물을 바라보아라

풀꽃 한 송이가 쓸쓸히 웃으며

배고픈 마음을 기대오리라

그러면 다정히 내려다보며, 오 너는 눈이 젖어 있구나

--배가 고파

--바람 때문이야

--바람이 없는데?

--아냐, 우린 바람을 생각했어

해는 지는데 건너지 못할 강물은 넓어져

오빠는 또 거기서 머리 흔들며 잦아지는구나

아마 선명한 무명꽃으로

피를 토하며, 토한 피 물에 어린다

누이야 저뭄의 끝은 언제나 물가였다

배고픈 허기로 저문 물을 바라보면 안다

밥으로 배 채워지지 않은 우리들의 멀고 먼 허기를

누이야

가문 가슴 같은 강물에 풀꽃 몇 송이를 띄우고

나는 어둑어둑 돌아간다

밤이 저렇게 넉넉하게 오는데

부릴 수 없는 잠을 지고

누이야, 잠 없는 밤이 그렇게 날마다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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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바쁜 때 웬 설사


소낙비는 오지요

소는 뛰지요

바작에 풀은 허물어지지요

설사는 났지요

허리끈은 안 풀어지지요

들판에 사람들은 많지요



(시인 김용택: 시집 <강 같은 세월>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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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눈발이라면



우리가 눈발이라면

허공에다 쭈빗쭈빗 흩날리는

진눈깨비는 되지 말자

세상이 바람 불고 춥고 어둡다 해도

사람이 사는 마을

가장 낮은 곳으로

따뜻한 함박눈이 되어 내리자

우리가 눈발이라면

잠 못 든 이의 창문가에서는 편지가 되고

그이의 깊고 붉은 상처 위에 돋는

새 살이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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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 인




이웃 마을에 살던 그 여자는

내가 어디 갔다가 오는 날을 어떻게 아는지

내가 그의 마을 앞을 지날 때를 어떻게 아는지

내가 그의 집 앞을 지날 때쯤이면 용케도 발걸음을 딱

맞추어가지고는

작고 예쁜 대소쿠리를 옆에 끼고 대문을 나서서

긴 간짓대로 된 감망을 끌고

딸그락딸그락 자갈돌들을 차며

미리 내 앞을 걸어갑니다

눈도 맘도 뒤에다가 두고

귀도, 검은 머릿결 밖으로 나온 귀도 뒤에다가 다 열어

놓고는

감을 따러 갑니다

커다란 느티나무 저만큼 서 있는 길

샛노란 산국이 길을 따라 피어 있는 길

어쩌다가 시간을 잘못 맞추는 날이면

그 여자는 붉은 감이 주렁주렁 달린 감나무를 높이높이

올라가서는 감을 땁니다

월남치마에다 빨간 스웨터를 입은 그 여자는 내가 올

때까지

소쿠리 가득 감이 넘쳐도 쓸데없이 감을 마구 땁니다

나를 좋아한 그 여자

어쩔 때 노란 산국 꽃포기 아래에다 편지를 감홍

시로 눌러놓은 그 여자

늦가을 시린 달빛을 밟으며 마을을 벗어난 하얀 길을

따라가다 보면

느티나무 등뒤에다 등을 기대고 달을 보며 나를 기다리던

내가 그냥 좋아했던 이웃 마을 그 여자

들패랭이 같고

느티나무 아래 일찍 핀 구절초꽃 같던 그 여자

가을 해가 이렇게 뉘엿뉘엿 지는 날

이 길을 걸으면 지금도 내 마음속에서 살아나와

저만큼 앞서가다가 뒤돌아다보며

단풍 물든 느티나무 잎사귀같이 살짝 낯을 붉히며 웃는

웃을 때는 쪽니가 이쁘던 그 여자




우리나라 가을 하늘같이 오래 된 그 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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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당신과 헤어지고 보낸
지난 몇 개월은
어디다 마음 둘 데 없이
몹시 괴로운 시간이었습니다.
현실에서 해결하지 못하는 우리 두 마음이
답답했습니다.
허지만 지금은
당신의 입장으로 돌아가
생각해 보고 있습니다.
받아들일 건 받아들이고
잊을 것은 잊어야겠지요.
그래도 마음속의 아픔은
어찌하지 못합니다.
계절이 옮겨가고 있듯이
제 마음도 어디론가 옮겨가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추운 겨울의 끝에서 희망의 파란 봄이
우리 몰래 우리 세상에 오듯이
우리들의 보리들이 새파래지고
어디선가 또
새 풀이 돋겠지요.
이제 생각해 보면 당신도 이 세상 하고많은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당신을 잊으려 노력한
지난 몇 개월 동안
아픔은 컸으나
참된 아픔으로
세상이 더 넓어져
세상만사가 다 보이고
사람들의 몸짓 하나하나가 다 이뻐보이고
소중하게 다가오며 내가 많이도
세상을 살아 낸 어른이 된 것 같습니다.
당신과 만남으로 하여
세상에 벌어지고 있는 일들이 모두 나와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을
고맙게 배웠습니다.
당신의 마음을 애틋이 사랑하듯이
사람 사는 세상을 사랑합니다.

길가에 풀꽃 하나만 봐도
당신으로 이어지던 날들과
당신의 어깨에
내 머리를 얹은 어느 날
잔잔한 바다로 지는 해와 함께
우리 둘은 참 좋았습니다.
이 봄은 따로따로 봄이겠지요.
그러나 다 내 조국 산천의 아픈
한 봄입니다.
행복하시길 빕니다.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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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이 많은 밤



생각이 많은 밤

뒤척이고 뒤척이다

그만 깜빡 속은 것 같은 잠이 들었다가도

된서리가 치는지

감잎이 뚝 떨어지는 소리에 그만

들었던 잠이 번쩍 깨지는 것이다

이루어질 수 없는 생각에 매달리어



그 생각에 매달리기 싫어서

일어나 앉아 머리맡에 새어든 달빛을 가만히 내려다보

다가는

더듬더듬 불을 켜보지만

그 생각들이 달아나기는 커녕

새로운 생각들이 더 보태지는 것이다

그런 밤이 가고

풀벌레 우는 새하얀 아침이 오면

마당 한구석 하얀 서리 속에 산국이 노랗게 피어

향기가 더 짙고

집 앞 아름드리 느티나무 아래 떨어진 잎들은

천근이나 만근이나 된 듯 흰 서리에 속이 젖어

땅에 착 달라붙어 있는 것이다

마루에 나와 우두커니 서서 이상 없이 어제와 똑같이

흐르는

강물이며 그냥 그대로 다 있는 텃밭에 김장 배추라든가

알몸이 파랗게 거의 다 솟은 무라든가

배추밭 구석진 곳에 심어져 쭉 고르게 자란 쪽파에 내

린 흰 서리라든가

하얀 서리밭을 걸어오시는 나이가 드실 대로 다 드신

이웃 집 큰아버님의 허리 굽은 걸음걸이라든가

앞산 산 속 참나무 밑이 헤성헤성 해보이는 것들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으면

이상하게도 마음이 개운해지고

텅 빈 마음 안에는 세상의 모든 것들이 하나하나 또렷

이 보이는 것이다

그랬었구나,그랬었구나 까닭도 없이 고개가 끄덕여지고

그런 것들이,

그러한 것들이

투명한 유리알 저쪽처럼 손에 잡힐 듯 환하게 보이고

마음에 와 그림같이 잠기는 것이다


<제12회 1998년도 소월시문학상 수상작품집>.문학사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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