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글/김 용 택

산을 기다린다/김 용택 외

조용한ㅁ 2009. 8. 27. 13:28

* 강가에서 - 김용택

강가에서
세월이 많이 흘러
세상에 이르고 싶은 강물은
더욱 깊어지고
산그림자 또한 물 깊이 그윽하니
사소한 것들이 아름다워지리라.
어느날엔가
그 어느날엔가는
떠난 것들과 죽은 것들이
이 강가에 돌아와
물을 따르며
편안히 쉬리라.


* 그 강에 가고 싶다 - 김용택

그강에 가고 싶다
사람이 없더라도 강물은 저 홀로 흐르고
사람이 없더라도 강물은 멀리 간다
인자는 나도
애가 타게 무엇을 기다리지 않을 때도 되었다
봄이 되어 꽃이 핀다고
금방 기뻐 웃을 일도 아니고
가을이 되어 잎이 진다고
산에서 눈길을 쉬이 거둘 일도 아니다

강가에서는 그저 물을 볼 일이요
가만가만 다가가서 물 깊이 산이 거기 늘 앉아 있고
이만큼 걸어 항상 물이 거기 흐른다
인자는 강가에 가지 않아도
산은 내 머리맡에 와 앉아 쉬었다가 저 혼자 가고
강물은 때로 나를 따라와 머물다가
멀리 간다

강에 가고 싶다
물이 산을 두고 가지 않고
산 또한 물을 두고 가지 않는다
그 산에 그 강
그 강에 가고 싶다


* 달이 떴다고 전화를 주시다니요

달이 떴다고 전화를 주시다니요
이 밤 너무 신나고 근사해요
내 마음에도 생전 처음 보는
환한 달이 떠오르고
산 아래 작은 마을이 그려집니다
간절한 이 그리움들을,
사무쳐 오는 이 연정들을
달빛에 실어
당신께 보냅니다

세상에,
강변에 달빛이 곱다고
전화를 다 주시다니요
흐르는 물 어디쯤 눈부시게 부서지는 소리
문득 들려옵니다.


* 미처 하지 못한 말

살다가,
이 세상을 살아가시다가
아무도 인기척 없는
황량한 벌판이거든
바람 가득한 밤이거든
빈 가슴이, 당신의 빈 가슴이 시리시거든
당신의 지친 마음에
찬바람이 일거든
살다가, 살아가시다가......




 
* 별빛 - 김용택

당신 생각으로
당신이 내 마음에 가득 차야
하늘에 별들이
저렇게 빛난다는 것을
당신 없는 지금,
지금에야 알았습니다.


* 보리씨 - 김용택

달이 높다
추수 끝난 우리나라
들판 길을 홀로 걷는다
보리씨 한 알 얹힐 흙과
보리씨 한 알 덮을 흙을
그리워하며 나는 살았다

 
* 가을밤 - 김용택

달빛이 하얗게 쏟아지는
가을 밤에
달빛을 밟으며
마을 밖으로 걸어나가보았느냐
세상은 잠이 들고
지푸라기들만
찬 서리에 반짝이는
적막한 들판에
아득히 서보았느냐
달빛 아래 산들은
빚진 아버지처럼
까맣게 앉아 있고
저 멀리 강물이 반짝인다
까만 산속
집들은 보이지 않고
담뱃불처럼
불빛만 깜박인다
하나 둘 꺼져가면
이 세상엔 달빛뿐인
가을 밤에
모든 걸 다 잃어버린
들판이
들판 가득 흐느껴
달빛으로 제 가슴을 적시는
우리나라 서러운 가을 들판을
너는 보았느냐.
 

* 짧은 이야기 - 김용택

사과 속에 벌레 한 마리가 살고 있었습니다
사과는 그 벌레의 밥이요 집이요 옷이요 나라였습니다
사람들이 그 벌레의 집과 밥과 옷을 빼앗고
나라에서 쫓아내고 죽였습니다

누가 사과가 사람들만의 것이라고 정했습니까
사과는 서러웠습니다
서러운 사과를 사람들만 좋아라 먹습니다


* 선운사 동백꽃 - 김용택

여자에게 버림받고
살얼음 낀 선운사 도랑물을
맨발로 건너며
발이 아리는 시린 물에
이 악물고
그까짓 사랑때문에
그까짓 여자때문에
다시는 울지 말자
다시는 울지 말자
눈물을 감추다가
동백꽃 붉게 터지는
선운사 뒤안에 가서
엉엉 울었다




 
* 밤이슬 - 김용택

나는 몰라라우
인자 나는 몰라라우
하얀, 하이얀 어깨에 달빛이 미끄러지고
서늘한 밤바람 한 줄기 젖은 이마를 지난다
저 멀리 풀잎에 이슬들이 반짝이는데
언제 어디로 갔다가 언제 어디서 돌아오는지 자욱한 풀벌레,
풀벌레 울음소리
아, 저기 저 산 달빛에 젖어
밤새가 우네
달을 안고 앉아 산을 보는 사람아
살에 붙은 풀잎을 떼어내는 여인의 등에
얼굴을 묻네


* 산을 기다린다 - 김용택
― 도현에게

산외 지나면 산내다
산외에서 산내 가는 길
몇 개의 인적 드문 마을에
살구꽃이 지고
먼 산에 산벚꽃 지더니
지금은 감잎이 핀다
뭐 하니?
이 세상 그 어떤 것으로도 채워지지 않는 빈 곳이 있다는 것을 안다
이 밤 나도 마당에 내려서서
호주머니에 두 손 찌르고 서성인다
텃밭에 마늘같이 고르지 못한 이 하루의 생각들을
무슨 말로 정리하랴
어두워도 보이는 얼굴이 있을까
어둔 산 쪽을 바라본다
기다리는 것들은 오지 않음을 알면서
나는 산을 기다린다
산외 지나
산내다
산내에서 너 있는 곳 산외다
산 밖에서
그리운
산 본다 서쪽이다


* 눈 오는 마을 - 김용택

저녁 눈 오는 마을에 들어서 보았느냐
하늘에서 눈이 내리고
마을이 조용히 그 눈을 다 맞는
눈 오는 마을을 보았느냐
논과 밭과 세상에 난 길이란 길들이
마을에 들어서며 조용히 끝나고
내가 걸어온 길도
뒤돌아볼 것 없다 하얗게 눕는다
이제 아무것도 더는 소용없다 돌아설 수 없는 삶이
길 없이 내 앞에 가만히 놓인다
저녁 하늘 가득 오는 눈이여
가만히 눈발을 헤치고 들여다보면
이 세상에 보이지 않은 것 하나 없다
다만
하늘에서 살다가 이 세상에 온 눈들이 두 눈을 감으며
조심조심 하얀 발을 이 세상 어두운 지붕 위에
내릴 뿐이다


* 사랑 - 김용택

당신과 헤어지고 보낸
지난 몇 개월은
어디다 마음 둘 데 없어
몹시 괴로운 날들이었습니다
현실에서 가능할 수 있는 것들을
현실에서 해결하지 못하는 우리 두 마음이
답답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당신의 입장으로 돌아가
생각해보고 있습니다
받아들일 건 받아들이고
잊을 것은 잊어야겠지요
그래도 마음 속의 아픔은
어찌하지 못합니다
계절이 옮겨가고 있듯이
제 마음도 어디론가 옮겨가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추운 겨울의 끝에서 희망의 파란 봄이
우리 몰래 우리 세상에 오듯이
우리들의 보리들이 새파래지고
어디선가 또
새 풀들이 돋겠지요

이제 생각해보면
당신도 이 세상의 하고많은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당신을 잊으려고 노력한
지난 몇 개월 동안
아픔은 컸으나
세상은 더 넓어져
세상만사가 다 보이고
사람들의 몸짓 하나하나가 다 이뻐보이고
소중하게 다가오며
내가 많이도
세상을 살아낸
어른이 된 것 같습니다
당신과 만남으로 하여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모두 나와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을 고맙게 배웠습니다
당신의 마음을 애틋이 사랑하듯
사람 사는 세상을 사랑합니다

길가에 풀꽃 하나만 봐도
당신으로 이어지던 날들과
당신의 어깨에 내 머리를 얹은 어느 날
잔잔한 바다로 지는 해와 함께
우리 둘인게 참 좋았습니다
이 봄은 따로따로 봄이겠지요
그러나 다 내 조국산천의 아픈 봄입니다
행복하시길 빕니다
안녕
 


'
 
*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말 - 김용택

당신,

세상에서 그보다 더 아름다울 수 있는,

그보다 더 따뜻할 수 있는,

그보다 더 빛나는 말이 있을 리 없겠지요

당신.......


* 이별 - 김 용택

서리 친 가을 찬물을
초승달같이 하이얀 맨발로
건너서 가네


* 나도 꽃 - 김용택

수천 수만 송이
아름다운 꽃들이 피어납니다
생각에 생각을 보태며
나도 한송이 들국으로
그대 곁에
가만가만 핍니다.


* 푸른 나무 1 - 김용택

막 잎 피어나는
푸른 나무 아래 지나면
왜 이렇게 그대가 보고 싶고
그리운지
작은 실가지에 바람이라도 불면
왜 이렇게 나는
그대에게 가 닿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지는지
생각에서 돌아서면
다시 생각나고
암만 그대 떠올려도
목이 마르는
이 푸르러지는 나무 아래.


* 푸른 나무 2 - 김용택
-소쩍새 우는 사연

너를 부르러
캄캄한 저 산들을 넘어
다 버리고 내가 왔다
아무도 부르지 않는
그리운 너의 이름을 부르러
어둔 들판 바람을 건너
이렇게 내가 왔다
이제는 목놓아 불러도
없는 사람아
하얀 찔레꽃 꽃잎만
봄바람에 날리며
그리운 네 모습으로 어른거리는
미칠 것같이 푸르러지는
이 푸른 나뭇잎 속에
밤새워 피를 토하며
내가 운다.


* 나비는 청산 가네 - 김용택

꽃잎이 날아드는 강가에 나는 섰네

내 맘에 한번 핀 꽃은
생전에 지지 않는 줄을
내 어찌 몰랐을까
우수수수 내 발등에 떨어지는 꽃잎들이
사랑에서 돌아선
그대 눈물인 줄만 알았지
내 눈물인 줄은
내 어찌 몰랐을까
날 저무는 강물에 훨훨 날아드는 것이
꽃잎이 아니라
저 산을 날아가는 나비인 줄을
나는 왜 몰랐을까

꽃잎이 날아드는 강가에 나는 서 있네



 
 
* 섬진강 1 - 김용택

가문 섬진강을 따라가며 보라
퍼가도 퍼가도 전라도 실핏줄 같은
개울물들이 끊기지 않고 모여 흐르며
해 저물면 저무는 강변에
쌀밥 같은 토끼풀꽃,
숯불 같은 자운영꽃 머리에 이어주며
지도에도 없는 동네 강변
식물도감에도 없는 풀에
어둠을 끌어다 죽이며
그을린 이마 훤하게
꽃등도 달아준다
흐르다 흐르다 목메이면
영산강으로 가는 물줄기를 불러
뼈 으스러지게 그리워 얼싸안고
지리산 뭉툭한 허리를 감고 돌아가는
섬진강을 따라가며 보라
섬진강물이 어디 몇 놈이 달려들어
퍼낸다고 마를 강물이더냐고,
지리산이 저문 강물에 얼굴을 씻고
일어서서 껄껄 웃으며
무등산을 보며 그렇지 않느냐고 물어보면
노을 띤 무등산이 그렇다고 훤한 이마 끄덕이는
고갯짓을 바라보며
저무는 섬진강을 따라가며 보라
어디 몇몇 애비 없는 후레자식들이
퍼간다고 마를 강물인가를.


* 섬진강 2 - 김용택

저렇게도 불빛들은 살아나는구나.
생솔 연기 눈물 글썽이며
검은 치마폭 같은 산자락에
몇 가옥 집들은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불빛은 살아나며
산은 눈뜨는구나.
어둘수록 눈 비벼 부릅뜬 눈빛만 남아
섬진강물 위에 불송이로 뜨는구나.

밤마다 산은 어둠을 베어 내리고
누이는 매운 눈 비벼 불빛 살려내며
치마폭에 쌓이는 눈물은
강물에 가져다 버린다.
누이야 시린 물소리는 더욱 시리게
아침이 올 때까지
너의 허리에 두껍게 감기는구나.

이른 아침 어느새
너는 물동이로 얼음 깨고
물을 퍼오는구나.
아무도 모르게
하나 남은 불송이를
물동이에 띄우고
하얀 서릿발을 밟으며
너는 강물을 길어오는구나.

참으로 그날이 와
우리 다 모여 굴뚝마다 연기 나고
첫날밤 불을 끌 때까지는,
스스로 허리띠를 풀 때까지는
너의 싸움은, 너의 정절은
임을 향해 굳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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