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풍경 / 박남준
겨울 햇볕 좋은 날 놀러가고
사람들 찾아오고
겨우 해가 드는가
밀린 빨래를 한다 금새 날이 꾸무럭거린다
내미는 해 노루꽁지만하다
대한 추위 지나갔다지만
빨랫줄에 널기가 무섭게
버쩍버쩍 뼈를 곳추세운다
세상에 뼈 없는 것들 어디 있으랴
얼었다 녹았다 겨울 빨래는 말라간다
삶도 때로 그러하리
언젠가는 저 겨울 빨래처럼 뼈를 세우기도 하고
풀리어 날리며 언 몸의 세상을 감싸주는
따뜻한 품안이 되기도 하리라
처마 끝 양철지붕 골마다 고드름이 반짝인다
지난 늦가을 잘 여물고 그중 실하게 생긴
늙은 호박들 이집 저집 드리고 나머지
자투리들 슬슬 유통기한을 알린다
여기저기 짓물러 간다
내 몸의 유통기한을 생각한다 호박을 자른다
보글보글 호박죽 익어간다
늙은 사내 하나 산골에 앉아 호박죽 끓인다
문 밖은 여전히 또 눈보라
처마 끝 풍경소리 나 여기 바람부는 문 밖
매달려 있다고 징징거린다
꿈같은 꿈같은
일터에서 돌아오는 낭군을 위해 들녘에 나가 나물을 캐고 봄쑥이며 냉이 씀바귀 나물무침이며 된장을 풀어 보글보글 뚝배기에 된장국을 끓이고 불을 때어 저녁밥 을 짓고 아! 그런 다소곳하고도 아미 고운 조선색시 다시는 없겠지요.
가르마 같은 논밭길을 걸어오며 모락모락 멀리 밥짓는 저녁 연기 바라보다 고단한 하루의 일과를 씻은 듯 털어내며 가슴 뿌듯한 행복으로 발걸음 재촉하는 그런 그런 눈매 선한 조선 사내도 다시는 다시는 없겠지요.
내 마음의 당간지주 / 박남준
당간지주 앞에 눈길을 놓는다 오랜 날들 한때 숲을 이루었고 다시 그 숲으로 돌아간 여기까지 밀려와서 세상의 흥망을 읽으려 하다니 깃발을 올려 손짓할 수 없는 날들 나도 한때 펄럭여보고 싶었다 마음의 당간지주 나 이미 버린 지 오래였으나 독하게 일별한 것들이 비쭉비쭉 이제 와서 고개를 내밀다니
때로 무너지고 싶지 않은 삶이 어디 있겠어 한번쯤 지독하게 무너지고 나서야 결국 은산 철벽 막다른 나를 알고 나서야 문득 실려오는 매화꽃 향내음 그래 강물만이 흐르는 건 아니지
당간지주 앞에 오래 머물렀다 해묵은 빚처럼 내미는 것들을 비로소 세워놓는다 이것이 다가 아닙니다 도리질을 치며 쏟아내는 내 마음의 고해성사 노을이 한쪽 산자락을 가만히 끌어내려 아린 눈 내리쓸어 감겨주는가 메아리만 아득하구나 저 허공 머리 푼 마음이 먼 산을 넘는다
다만 흘러가는 것들을 듣는다 / 박남준
툇마루에 앉아 다만 흘러가는 것들을 바라본다 마당 한쪽 햇살이 뒤척이는 곳 저것 내가 무심히 버린 놋숟가락 목이 부러진
화순 산골 홀로 밭을 매다 다음날 기척도 없이 세상을 떠난 어느 할머니, 마루 위엔 고추며 채소 산나물을 팔아 마련한 돈 백만원이 든 통장과 도장이 검정 고무줄에 묶여 매달려 있었다지
마을 사람들이 그 돈으로 관을 마련하고 뒷일을 다 마쳤을 때 그만 넣어왔다 피붙이도 없던 그 놋숟가락 언젠가 이가 부러져 솥바닥을 긁다가 목이 부러져 내 눈밖에 뒹굴던 것
버려진 것이 흔들리며 옛일을 되돌린다 머지않은 내일을 밀어올린다 가만히 내 저금통장을 떠올린다 저녁이다 문을 닫고 눕는다 다만 흘러가는 것들을 듣는다
흰 부추꽃으로 / 박남준
몸이 서툴다 사는 일이 늘 그렇다
나무를 하다보면 자주 손등이나 다리 어디 찢기고 긁혀
돌아오는 길이 절뚝거린다 하루해가 저문다
비로소 어둠이 고요한 것들을 빛나게 한다
별빛이 차다 불을 지펴야겠군
이것들 한때 숲을 이루며 저마다 깊어졌던 것들
아궁이 속에서 어떤 것 더 활활 타오르며
거품을 무는 것이 있다
몇 번이나 도끼질이 빗겨가던 옹이 박힌 나무다
그건 상처다 상처 받은 나무
이승의 여기저기에 등뼈를 꺾인
그리하여 일그러진 것들도 한 번은 무섭게 타오를 수 있는가
언제쯤이나 사는 일이 서투르지 않을까
내 삶의 무거운 옹이들도 불길을 타고
먼지처럼 날았으면 좋겠어
타오르는 것들은 허공에 올라 재를 남긴다
흰 재, 저 흰 재 부추밭에 뿌려야지
흰 부추꽃이 피어나면 목숨이 환해질까
흰 부추꽃 그 환한 환생
길 끝에 닿는 사람 / 박남준
다시 나는 먼 길을 떠난다 길은 길로 이어져서
산과 들 강, 저문 날이면 어느 곳엔들 닿지 않으랴,
젊은 꿈과 젊은 밤과 오랜 그리움이 혹여 있을지,
그곳엔들 문을 열면 밤은 더욱 자욱하고 신음소리 쓸쓸하지 않으랴만
더러는 따뜻했어, 눈발이 그치지 않듯이 내가 잊혀졌듯이,
이미 흘러온 사람, 지난 것들은 여기까지 밀려왔는지,
뒤돌아보면 절뚝거리던 발걸음만이 눈 속에 묻혀 흔적없고 문득,
나 어데 있는가, 어쩌자고, 속절없이
누군들 길 떠나지 않으랴, 먼 길을 떠난다 흐르는 것은 흐르는 것으로 이어져서
저 바람의 허공, 갈 곳 없이 떠도는 것들도 언제인가, 닿으리라
비로소, 길 끝에 이르러 거친 숨 다하리라, 아득해지리라
그 딱새가 열어 보인 / 박남준
하필 방문 앞 선반 위 집을 틀었는가 산전수전 저도 알고 있는 것이다 뒤탈 없다는 것 먹이를 물고 전선에 앉은 알록달록 딱새 한 마리 저건 수컷이다 괜찮아 어서 들어가 제 집을 가끔 들여다본 것을 알고 있을 터인데 딱새는 내색하지 않는다 들어가지 않는다 내가 떠나지 않는 한 삐이- 삐- 안다 저 소리 꼼짝 말라는 것 새끼들이 둥지에 죽은 듯 엎드려 있다는 것 기죽지 않는다 참으로 당당하다 삐이- 삐- 이제 그만 눈길을 거두지 않겠느냐 그쯤에서 저만큼 어디 피해주지 않겠느냐고 눈을 감고 들은 적이 있다 감은 눈을 뜨고 귀를 닫기도 했다 반쯤 감은 눈 그때쯤 새 한 마리 날아들고 강물이 흐르다 때로 범람하여 멈추었던 이야기를 풀어놓기도 했다
따뜻한 얼음 / 박남준
옷을 껴입듯 한 겹 또 한 겹 추위가 더할수록 얼음의 두께가 깊어지는 것은 버들치며 송사리 품 안에 숨 쉬는 것들을 따뜻하게 키우고 싶기 때문이다 철모르는 돌팔래로부터 겁 많은 물고기들을 두 눈 동그란 것들을 놀라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그리하여 얼음이 맑고 반짝이는 것은 그 아래 작고 여린 것들이 푸른빛을 잃지 않고 봄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 겨울 모진 것 그래도 견딜 만한 것은 제 몸의 온기란 온기 세상에 다 전하고 스스로 차디찬 알몸의 몸이 되어버린 얼음이 있기 때문이다 쫓기고 내몰린 것들을 껴안고 눈물지어본 이들은 알 것이다 햇살 아래 녹아내린 얼음의 투명한 눈물자위를 아 몸을 다 바쳐서 피워내는 사라이라니 그 빛나는 것이라니
왜가리 / 박남준
필경 넋이 난 것이다
한 점 온기도 남지 않은 앙금 같은 흰 재
또는 처절하도록 팽팽한 제 몸을 당긴 시위
저 부동은 어디에서 왔나 어디로 가는가
마른 연 줄기들 몸을 꺾은 겨울 방죽 가
오래전 고요한 외다리 왜가리
영도다리 금강산 철학관 / 박남준
지금은 늙고 병들어 일으켜 몸 세울 수 없는 영도다리
그 아래 올망졸망 비닐덮개 낡은 차일을 치고
케케묵은 포장마차들이 판을 벌이고 있다
허름한 빈대떡과 삶은 달걀과
졸고 졸아 몇탕을 끓였을까 멀건 홍합 국물과
이 나라 구멍 난 주머니에 얻어터져 잔뜩 불은 국수 가락들 사이에
1.4후퇴 때 건너왔는가
사주 관상 택일 금강산 철학관
30년 전통이라는 때 절은 흰색 페인트칠 간판
늙고도 늙었다 빛바랜 그 글씨
거기 때로 집 나가 돌아오지 않는 안부가 불려 나왔으리라
너덜너덜한 신세들이 접고 접은 괴춤의 푼돈을 꺼냈으리라
엎어지고 자빠진 팔자타령을 풀어놓았으리라
손바닥만한 금강산 그 어두컴컴한 방안에는
검은 안경을 쓴 점쟁이 할머니가 손가락을 꼼지락꼼지락
옹알거리는 아이처럼 모로 누워 있는데
한번쯤 나 또한 문을 열고 싶었다
모질고 험한 세상의 일을 묻고도 싶었다
영도다리 푸른 물 너머 문득 금강산
굳세어라 금순이의 바람 찬 흥남부두
머나먼 땅의 소식도 물어보고 싶었다
별이 지는 날 / 박남준
어디 마음 둘 곳 없습니다 그가 떠나서만이 아니고요 산다는 것이 서러웠습니다
빨래를 널듯 내 그리움 펼쳐 겨울 나뭇가지에 드리웠습니다 이제 해 지면 깃발처럼 나부끼던 안타까움도 어둠에 묻혀 보이지 않을까요
어디 마음 둘 곳 없습니다 별이 뜨고 별 하나 지는 밤 언제인가 오랜 내 기다림도 눈 감을 테지요
이사, 악양 / 박남준
결국 남쪽 악양 방면으로 길을 꺾었다 하루 종일 해가 들었다 밥을 짓고 국 끓이며 어쩌다 생선 한 토막의 비린내를 구웠으나 밥상머리 맞은편 내 뼈를 발라 살점 얹어 줄 사람의 늘 비어 있던 자리는 달라지지 않았다 이따금 아직도 낯선 아랫마을 밤 개가 컹컹거리며 그 부재의 이유를 묻기도 했다 별들과 산마을의 불빛들은 결코 나뉠 수 없는 우주의 경계로 인해 밤마다 한 몸이 되고는 했다 부럽기도 했다 해가 바뀔수록 검던 머리 더욱 희끗거리고 희끗거리며 날리는 눈발을 봐도 점점 무심해졌다 겨울바람이 처마 끝을 풀썩 뒤흔들다 간다 아침이 드는 창을 비워 두는 것은 옛 버릇이나 무덤을 앞둔 여우들이 그러했듯이 나 또한 북쪽 그리운 창을 향해 머리를 눕히고 길고 먼 꿈길을 청한다
먼 강물의 편지 / 박남준
여기까지 왔구나 다시 들녘에 눈 내리고 옛날이었는데 저 눈발처럼 늙어가겠다고 그랬었는데
강을 건넜다는 것을 안다 되돌릴 수 없다는 것도 안다 그 길에 눈 내리고 궂은비 뿌리지 않았을까 한해가 저물고 이루는 황혼의 날들 내 사랑도 그렇게 흘러갔다는 것을 안다 안녕 내 사랑, 부디 잘 있어라
나무, 폭포, 그리고 숲 / 박남준
1
미루나무가 서 있는 강 길을 걷는다
강 건너 마을에 하나둘 흔들리며 내걸리는 불빛들,
흔들리는 것들도 저렇게 반짝일 수 있구나
그래 별빛, 흘러온 길들은 늘 그렇게 아득하다 어제였던가 그제였던가
그토록 나는 저 강 건너의 불빛들을 그리워하며 살아왔던 것이구나
저 물길의 어디쯤 징검다리가 있을까
한 때 나의 삶이 강가에 이르렀을 때 강 건너로 이어지던 길,
산 너머 노을이 피워놓은 강 저쪽 꿈꾸듯 흐르던 금빛 물결의
길을 물어 흘러갔다 그 강가에 지고 피던 철마다의 꽃들이여
민들레여 쑥부쟁이여 강 저편 푸른 미루나무는 바람에 흔들리며
손짓하고 그때마다 산 그림자를 따라 새들이 날아올랐다
새들, 새들의 무덤을 보고 싶었지
나무들이, 바람이, 저 허공중의 모든 길들이 풀어놓은 새떼들이
돌아가 눕는 곳 저 산, 저 물길이 다하여 이르는 곳일까
미루나무의 강 길을 따라 걸었다 따뜻한 불빛들이 목이 메어 왔다
2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들, 흔들리며 손짓하는 나무들의
숲에 다가갔다 숲을 건너기에 내 몸은 너무 많은 것들을
버리지 못했다 지나간 세상의 일을 떠올렸다
내 안에 들어와 나를 들끓게 하였던 것들,
끝없는 벼랑으로 내몰고 갔던 것들, 신성과 욕망과 내달림과
쓰러짐과 그리움의 불면들 무릎을 꿇었다 꺾어진 것은 내 무릎만이 아니었다
울컥울컥 울컥울컥 너도 어느 산천의 하늘에서 길을 잃었던 것이냐
산비둘기의 울음이 숲을 멀리 가로지른다
3
구비구비 흘러온 길도 어느 한 굽이에서 끝난다 폭포,
여기까지 흘러온 것들이 그 질긴 숨의 끈을 한꺼번에 탁 놓아버린다
다시 내게 묻는다 너도 이렇게 수직의 정신으로 내리 꽂힐 수 있느냐
내리꽂힌 그 삶이 깊은 물을 이루며 흐르므로,
고이지 않고 비워내므로 껴안을 수 있는 것이냐
그리하여 거기 은빛 비늘의 물고기떼, 비바람을 몰고 오던
구름과 시린 별과 달과 크고 작은 돌이며 이끼들 산그늘마저 담아내는 것이냐
일생을 수직의 삶으로 살아왔던 것들, 나무들이 가만히 그 안을 기웃거린다
물가에 앉아 잠긴다 지나온 시간, 흘러온 내 삶의 길,
그 길의 직립보행에 대해 생각한다
당당했던가 최선이었던가 그 물가에 다가가 얼굴을 비춰본다
4
내 안의 그대 산다는 것은 가까이 혹은 멀리 마주 보고
있는 것 어깨를 끌어안고 다독여 주는 것 말없는 이야기도 가만히 들어주는 것
변함없는 것 나뉘지 않는 것 눈을 감을수록 밀려오는 것 밀려와
따뜻한 불빛으로 환하게 밝혀주는 것 그리하여 서로의 눈동자에
눈부처를 새기며 오래오래 잊지 않는 것 함께 가는 것
5
비로소 숲을 이루는 것이다 나무와 나무와 나무와 그대와 그대의 그대와
그대의 모든 것들과 나의 어제와 나의 오늘과 나의 내일과 그 숲 속에 눕는다
언제인가 숲이 눕고 숲이 다시 일어났듯이 내 안의 삶들도 다하고 일어나기를,
오래 누웠던 자리에 숲의 고요가 머물렀다 한걸음 한걸음 그대 또한
그 숲에 멀어지거나 가까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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