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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지(柑紙)의 사랑 / 정일근
비단 오백 년 종이 천 년을 증명하듯
우리 한지에 쪽물을 들인 감지(柑紙)는 천 년을 견딘다는데
그 종이 위에 금니은니로 우리 사랑의 시(詩)를 남긴다면
눈 맑은 사람아
그대 천 년 뒤에도 이 사랑 기억할 것인가
감지에 남긴 내 마음이 열어주는 길을 따라
경주 남산 돌 속에 잠든 나를 깨우러 올 것인가
풍화하는 산정 억새들이 여윈 잠을 자는 가을날
통도사 서운암 성파(性坡) 스님의 감지 한 장 얻어
그리운 이름 석 자 금오산 아래 묻으면
남산 돌부처 몰래 그대를 사랑한 죄가
내 죽어 받을 사랑의 형벌이 두렵지 않네
종이가 천 년을 간다는데
사람의 사랑이 그 세월 견디지 못하랴
돌 속에 잠겨 내 그대 한 천 년 기다리지 못하랴.
꽃 핀 자리 / 장시우
초록하게 고개 내민
새것들이 몸을 부풀리자
갑자기 수런거림으로
어수선해진 산길을 걸으면
작년 이맘때 나뭇가지에 걸쳐둔
뜬소문 하나 슬쩍
말을 건다
수런수런
숲이 흔들리자 일제히
고개 내민 꽃들이 귀를 연다
그 사이 바람은
시침 뚝 떼고
산길을 쏜살같이 달아난다
덜 여문 봄볕 하나 툭 떨구고
아름다운 곳 / 문정희
봄이라고 해서 사실은
새로 난 것 한 가지도 없다
어디인가 깊고 먼 곳을 다녀온
모두가 낯잊은 작년 것들이다
우리가 날마다 작고 슬픈 밥솥에다
쌀을 씻어 헹구고 있는 사이
보아라, 죽어서 땅에 떨어진
저 가느다란 풀잎에
푸르고 생생한 기적이 돌아왔다
창백한 고목나무에도
일제히 눈펄 같은 흰꽃들이 피었다
누구의 손이 쓰다듬었을까
어디를 다녀와야 다시 봄이 될까
나도 그곳에 한번 다녀오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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