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그리는 선(線), 하늘 끝에 더 갔을까? 내가 찍은 (點), 저 총총히 빛나는 별 만큼이나 했을까? 눈을 감으면 환히 보이는 무지개보다 더 환해지는 우리 강산..."
(1970년 1월 뉴욕)
김환기(1913-1974), 그는 전남 신안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돌아가신 화가입니다.
"못견디게 그리워지는 시간, 조국이라는게, 고향이라는게...,
내 예술과 우리 서울과는 분리할 수 없을 것 같애.
저 정돈된 단순한 구도,
저 오묘한 푸른 빛깔,
이것이 나만이 할수 있는 세계이며, 일일 거야."..
"예술은 미학적 , 철학적, 혹은 문학적 학설이 아니다.
예술은 하늘과 산 그리고 돌처럼 존재하는 것이다."
그가 우리나라에 본격적으로 서양 미술을 소개한 이라느니
한국적인 구상적 아름다움을 승화시켜 추상 화가로서 한국 미술사에
커다란 획을 그은 화가라느니 하는말을 하고 싶은게 아닙니다.
난 그저 그의 그림이 좋습니다.
그의 그림의 푸른 빛깔에는 따뜻함과 동시에 그리움이 있습니다.
조병화 시인이 왜 그렇게 목이 기냐고 했더니
" 난 시골 섬 출신이야. 뭍이 그리워 목을 길게 빼다보니 그만 목이 길어졌네."
그의 그림에선, 그의 편지에선 사람 냄새가 납니다.
왜 하필 미국, 뉴욕으로 왔는지 모르겠지만
그가 느꼈다던 충격을, 조국을 그리워함을 함께 느끼기에 더 좋은건지 모르겠습니다.
김환기- 그의 삶을 공부해 가며 점점 더 그의 인간적인 면에 빠져들었습니다.
시인 이상의 아내 였다가 김환기의 아내로 수십년을 살다 그의 사후 김환기 미술관을 세웠다는 부인 김향안씨-
또 불란서 체류시절 다른 화가들의 영향을 받을까봐 남의 전시는 절대로 안갔다는 이야기...
그리고 미국 시절 그의 화법이 구체적인 자연 대상은 지워지고 선, 점, 면 들로 구성되는 순수한 추상에로의 변모를 한 후,
1970년 제 1회 한국 미술 대상전에서 대상을 받은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의 작품은
"친구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떠올리며 점으로 찍어낸것" 이란 설명을 듣고 어찌 그를 사랑하지 않을수 있겠습니까?
순수함이, 뜨거운 열정과 그리움이 절절이 묻어나는 그의 그림을 사랑합니다.
난 눈을 감아봅니다.
그가 태어난 섬 - 그섬을 둘러싼 바다위에 달빛이 조금씩 뿌려지고 있습니다.
그 바다의 빛을 봅니다.
아름다운 빛으로 빛납니다.
그 달빛 속으로 불꽃들이 생겨납니다.
어둠의 푸른 빛속에서 불꽃들은 하나 둘 씩 반짝이며 날아다닙니다.
이 반짝이는 점들이 그가 그려 내려던 점화(點畵) 아닐까 감히 생각 해봅니다.
야상곡
매화와 정물 1950년대 후반
자화상
날으는 새 두마리 1962
달과 매화와 새 1959
달과 배 1959
달과 항아리 1954
달 두개
답교 1954 매화 항아리
사슴
무제 1969
사방 탁자 1956
영원의 노래
항아리와 매화 가지 집 1951
항아리와 날으는 새 1958 영원의 노래 1957
여름밤 소리
산호섬을 날으는 새
야상곡
10만개의 점 1973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1970 (제 1회 대한민국 미술 대상 대상 수상작)
저렇게 많은 별중에서
별 하나가 나를 내려다 본다.
이렇게 많은 사람 중에서
그 별 하나를 쳐다 본다.
밤 깊을 수록
별은 밝음 속에 사라지로
나는 어둠속으로 사라진다.
이렇게 정다운
너 하나 나 하나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저녁에/ 김광섭 시 (1969) |
구본웅(1906~1953)은 1930년대 국내 화단에서 표현주의적인 경향을 시도한 화가이다. 그는 고려미술연구소에서 이종우에게 유화의 기본을 익혔으며, 근대 조각가인 김복진으로부터 조각을 배우기도 했다. 또한 일본에서는 서양미술사를 공부하여 미술비평에 대한 역량도 뛰어났다. 모더니즘 개척의 선구자라 불릴 만한 구본웅은 우리나라 현대미술사의 시작을 연 기수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구본웅은 1906년 진보적인 개화 가정에서 독자로 태어났다. 일찌감치 그의 할아버지는 일본에서 유학을 했으며, 그의 아버지 역시 서구식 교육을 받은 지식인이었다. 하지만 부유하고 자애로운 가정에서 태어난 구본웅의 운명은 너무도 일찍 불행의 좌절을 겪어야 했다. 두 살이 되던 해 생모를 여의고, 그를 돌보아 주었던 가정부의 부주의로 마루에 떨어지면서 그는 척추 장애를 일으키며 불구의 몸이 된 것이다. 하지만 그는 좌절하지 않았다. 신체적 불구에도 불구하고 당시 화단에 등장한 그에 대해 주위 사람들은 찬양과 경탄의 뜻을 아끼지 않았으며, ‘서울의 로트렉'이라는 호칭을 부여할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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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본웅의 생애
1906년 3월 7일 서울 누하동 출생 1923년 고려미술원에서 이종우에게 서양화를 배움 1925년 YMCA 미술과에서 서양화와 조각을 배움 1927년 동경 川端畵學校에서 수학 1929년 동경 일본대학전문학부 미학과에서 수학 1931년 일본 독립전 입선 1934년 태평양미술학교 졸업 후 귀국, 본아미 다방에서 개인전 개최 1938년 문예지 <청색파> 발간 1942년 수묵화전 개최 1949년 제 1회 국전 추천작가 1953년 누하동 자택에서 별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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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머리의 여인> 1940년대, 캔버스에 유채, 60.4×45.4cm, 호암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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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본웅은 중학교 시절부터 그림에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신체적인 불구 때문에 경기중학교의 입학을 거절당했던 그는 기독교 학교인 경신중학에 입학을 하게 되었는데, 결국 이것을 계기로 그는 전화위복의 기회가 된 셈이었다.
경신학교의 교장이었던 쿤스 씨는 구본웅의 예술가적인 끼를 일찌감치 발견하고 그에게 자극을 주었다. 이후 그는 1923년 고려미술원에서 정식으로 목탄 데생을 배우기 시작했다.
1927년 조선미술전람회 조각부에 <얼굴 습작>이 입선하면서 구본웅은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하지만 그는 조각가의 길을 포기하고 양화를 그리는데 주력했다. 불구가 된 신체 조건 때문에 그는 일본 유학을 포기해야 했지만 그 유혹은 끊임없이 그를 재촉했다. 그리고 1928년에 결국은 동경으로 건너가 미술학교에 입학을 하게 된다. |
일본에서 그는 작품 제작 뿐만 아니라 뒷날 미술비평과 미술론을 쓸 수 있을 정도의 미술이론도 함께 공부했다. 일본에서의 그 같은 노력은 결국 헛되지 않았다. 이듬해인 1929년과 1930년에 다이헤이요미술회 연구소가 주최한 콩쿨에서 그는 연속적으로 수상을 한 것이다.
일본에서 유학하던 시절 동안 구본웅은 무엇보다도 당대에 유행하고 있던 서구미술사조인 야수주의와 입체주의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자유롭고 맹렬한 그들의 수법은 그에게 도전적인 충동과 파격에 도화선을 붙이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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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파와 포도> 1927, 캔버스에 유채, 국립현대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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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인> 1935, 캔버스에 유채, 50×38cm, 국립현대미술관 |
1920년대부터 1930년대에 걸쳐 우리나라에 불어닥친 미술운동은 20세기초 유럽 전역에서 유행했던 야수파, 입체파, 그리고 표현주의 등이었다. 구본웅은 체질적으로는 야수파적이면서도, 정신적으로는 표현주의적인 특징을 복합적으로 가진 화가였다.
하지만 어려서 불구의 몸이 된 그는 무엇보다도 신체적인 장애를 정신적으로 극복해 나가며 예술의 세계에서 인간의 의지와 정서를 승화시켰다. 결국 그는 깊은 인간애와 애환 어린 눈으로 인생을 바라다 보고 인생을 희화함으로써 희극정신에 도달하였던 것이다. 구본웅의 작품 세계는 매우 다양한 것이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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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부> 1929, 캔버스에 유채, 국립현대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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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종교적인 세계 뿐만 아니라 동양의 사상과 문화에 깊이 심취하며 특이한 발상을 작품에 발산했다. 그는 서구의 미술사조를 섭렵하되 표현 방식 만큼은 동양적인 사고를 고집했다.
또한 주관적인 개성화를 통해 형태의 왜곡과 변형, 어두운 색채 분위기 등을 통해 암울했던 당시의 시대를 독특한 작가 정신으로 표출해 냈다. 하지만 초기의 작품 활동에도 불구하고 6.25를 비롯한 시대적인 상황으로 인해 결국 그의 후기 작품은 충분한 예술성을 낳지 못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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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1930, 카드보드에 유채, 국립현대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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