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봉숭아를 심고 - 장석남
조그만 샛강이 하나 흘러왔다고 하면 될까
바람들이 슬하의 식구들을 데리고
내 속눈썹을 스친다고 하면 될까
봉숭아 씨를 얻어다 화분에 묻고
싹이 돋아 문득
그 앞에 쪼그리고 앉는 일이여
돋은 떡잎 위에 어른대는
해와 달에도 겸하여
조심히 물을 뿌리는 일이여
후일 꽃이 피고 씨를 터뜨릴 때
무릎 펴고 일어나며
一生을 잘 살았다고 하면 되겠나
그 중 몇은 물빛 손톱에게도 건너간
그러한 작고 간절한 一生이 여기 있었다고
있었다고 하면 되겠나
이 애기들 앞에서
* 일모(日暮) - 장석남
저기 뒹구는 것은 돌멩이
저것은 자기 그늘을 다독이는 오동나무
저것은 어딘가를 올라가는 계단
저것은 곧 밤이 되면 보이지 않을 새털구름
그리고 저것은 근심보다 더 낮은 데로 떨어지는 태양
화평(和平)한 가운데
어디선가 새소리 짧게 들리다 만다
오늘 저녁은 새의 一生에 대해 생각해보기로 한다
이 시장기
* 가여운 설레임 - 장석남
내가 가진 돌멩이 하나는 까만 것
돌 가웃 된 아기의 주먹만한 것
말은 더듬고 나이는 사마천보다도 많다
내 곁에 있는 지 오래여서 둥근 모서리에
눈[目]이 생겼다
나지막한 노래가 지나가면 어룽댄다
그 속에 연못이 하나 잔잔하다
뜰에는 바람들 가지런히 모여서 자고
벚꽃 길이 언덕을 업어갔다
하얀 꽃융단이 되어 내려온다
어떤 설레임으로 깨워야 다 일어나 내게 오나
내게 가르쳐준 이 없고 나는 다만
여러 가지 설레임을 바꾸어가며 가슴에 앉혀보는 것이다
오, 가여운 설레임들
* 국화꽃 그늘을 빌려 - 장석남
국화꽃 그늘을 빌려
살다 갔구나 가을은
젖은 눈으로 며칠을 살다가
갔구나
국화꽃 무늬로 언
첫 살얼음
또한 그러한 삶들
있거늘
눈썹달이거나 혹은
그 뒤에 숨긴 내
어여쁜 애인들이거나
모든
너나 나나의
마음 그늘을 빌려서 잠시
살다가 가는 것들
있거늘
* 마당에 배를 매다 - 장석남
마당에
녹음 가득한
배를 매다
마당 밖으로 나가는 징검다리
끝에
몇 포기 저녁 별
연필 깎는 소리처럼
떠서
이 세상에 온 모든 생들
측은히 내려보는 그 노래를
마당가의 풀들과 나와는 지금
가슴속에 쌓고 있는가
밧줄 당겼다 놓았다 하는
영혼
혹은,
갈증
배를 풀어
쏟아지는 푸른 눈발 속을 떠갈 날이
곧 오리라
오, 사랑해야 하리
이 세상의 모든 뒷모습들
뒷모습들
* 달과 수숫대 - 장석남
―井上有一의 <貧>字를 보며
막 이삭 패기 시작한 수숫대가
낮달을
마당 바깥쪽으로 쓸어내고 있었다
아래쪽이 다 닳아진 달을 주워다 어디다 쓰나
생각한 다음날
조금 더 여물어진 달을
이번엔 동구 개울물 한쪽에 잇대어
깁고 있었다
그러다가 맑디맑은 일생이 된
빈 수숫대를 본다
단 두 개의 서까래를 올린
집
속으로 달이
들락날락한다
* 멧새 앉았다 날아간 나뭇가지같이 - 장석남
내 작은 열예닐곱 고등학생 시절 처음으로 이제 겨우 막 첫 꽃피는
오이넝쿨만한 여학생에게 마음의 닷 마지기 땅을 빼앗기어 허둥거리며 다닌 적이 있었다.
어쩌다 말도 없이 그 앨 만나면 내 안에 작대기로 버티어놓은 허공이 바르르르르 떨리곤 하였는데
서른 넘어 이곳 한적한, 한적한 곳에 와서 그래도 차분해진 시선을 한 올씩 가다듬고 있는데
눈길 곁으로 포르르르 멧새가 날았다. 이마 위로, 외따로 뻗은,
멧새가 앉았다 간 저, 흔들리는 나뭇가지가, 차마 아주 멈추기는 싫여 끝내는 자기 속으로 불러들여
속으로 흔들리는 저것이 그때의 내 마음은 아니었을까.
외따로 뻗어서 가늘디가늘은, 지금도 여전히 가늘게는 흔들리어 가끔 만나지는 가슴 밝은 여자들에게는
한없이 휘어지고 싶은 저 저 저 저 심사가 여전히 내 마음은 아닐까.
아주 꺾어지진 않을 만큼만 바람아,
이 위에 앉아라 앉아라.
어디까지 가는 바람이냐.
영혼은 저 멧새 앉았다 날아간 나뭇가지같이
가늘게 떨어서 바람아
어여 이 위에 앉아라.
앉아라
* 강변 살고 - 장석남
사람들은 모두 강에 가 흘렀다
오래 묵은 상식과 집과 골목을 버리고
가장 깊은 하루를 흘렀다
강변엔 낮달이 걸리고
산 너머 소인이 찍힌 바람이
속속 도착하였다 뿌리가
순결한 나무들이 강심으로 허리를 던지고
자궁을 연 산그림자 사이로
사람들은 굽이굽이 물소리를 풀었다 간혹
피묻은 뉴스들이 자갈처럼 가라앉고
물방울들이 중얼거리며 떠올랐다
모래언덕이 쌀쌀한 햇빛 아래
물은 흘러서 어디에 닿는지 의심치 않고
물소리가 가끔 강 밖으로 나가면 풀잎들은
마른 귀를 적셨다
강변 사는 날 저녁은 귀에
삘기꽃이 자욱했다
* 水墨정원·1 - 장석남
- 江
먼 길을 가기 위해
길을 나섰다
강가에 이르렀다
강을 건널 수가 없었다
버드나무 곁에서 살았다
겨울이 되자 물이 얼었다
언 물을 건너갔다
다 건너자 물이 녹았다
되돌아보니 찬란한 햇빛 속에
두고 온 것이 있었다
그렇게 하지 말았어야 했다
다시 버드나무 곁에서 살았다
아이가 벌써 둘이라고 했다
* 水墨정원·2 - 장석남
- 마른 시냇가
마른 시냇가에 서서
지난 어느 시간
내가 보았던 구름의
자국을 찾아본다
마른 시냇가에 앉아서
한때 구름이었던 데를 만져본다
병상에서
어머니의 정강이를 만져보듯
깡마른 정강이를 만져보듯
* 배(船)를 매며 - 장석남
아무 소리도 없이
무슨 신호도 없이
등뒤로 털썩
밧줄이 날아와 나는 깜짝 놀라
뛰어가 밧줄을 잡아다 배를 맨다
배를 매보는 일은 이 세상에서의 참으로 드문 경험
아주 천천히 그리고 조용히
배는 멀리서부터 와 닿는다
사랑은,
우연히 호젓한 부둣가에 앉아 있다가
배가 들어와
던져지는 밧줄을 받는 것
그래서 어찌할 수 없이
배를 매게 되는 것
잔잔한 바닷물 위에
구름과 빛과 시간과 함께
떠 있는 배
배를 매면 구름과 빛과 시간이,
그리고 그 근처의 물결까지도 함께
매어진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사랑이란 그런 것을 처음 아는 것
빛 가운데 배는 울렁이며
온종일 떠 있다
* 저 많은 별들은 누구의 힘겨움일까 - 장석남
보푸라기 이는 숨을 쉬고 있어
오늘은
郊外에 나갔다가
한 송이만 남은 장미꽃을 보고 왔어
아무도 보지 않은 자국
선명했어
숨결에 그 꽃이 자꾸 걸리데
보푸라기가 자꾸만 일어
저 많은 별들은 다 누구의 가슴 뜀일까
아스라한 맥박들이 자꾸 목에 걸리데
어머니,
"얘야, 네 사랑이 힘에 겨웁구나"
"예 어머니. 자루가 너무 큰걸요"
저 많은 별들은 다 누구의 힘겨움일까
* 한진여 - 장석남
나는 나에게 가기를 원했으나 늘 나에게 가기 전에 먼저 등뒤로 해가 졌으며 밀물이 왔다
나는 나에게로 가는 길을 알았으나 길은 물에 밀려가고 물 속으로 잠기고 안개가 거두어갔다
때로 오랜 시간을 엮어 적막을 만들 때 저녁 연기가 내 허리를 묶어서 참나무 숲속까지 데리고 갔으나
빈 그 겨울 저녁의 숲은 앙상한 바람들로 나를 윽박질러 터트려버렸다
나는 나인 그곳에 이르고 싶었으나 늘 물밑으로 난 길은 발에 닿지 않았으므로 이르지 못했다
이후 바다의 침묵은
파고 3 내지 4미터의 은빛 이마가 서로 애증으로 부딪는 한진여의 포말 속에서만 있다는 것을 알았다
침묵은 늘 전위 속에만 있다는 것을
* 옛 노트에서 - 장석남
그때 내 품에는
얼마나 많은 빛들이 있었던가
바람이 풀밭을 스치면
풀밭의 그 수런댐으로 나는
이 세계 바깥까지
얼마나 길게 투명한 개울을
만들 수 있었던가
물 위에 뜨던 그 많은 빛들,
좇아서
긴 시간을 견디어 여기까지 내려와
지금은 앵두가 익을 무렵
그리고 간신히 아무도 그립지 않을 무렵
그때는 내 품에 또한
얼마나 많은 그리움의 모서리들이
옹색하게 살았던가
지금은 앵두가 익을 무렵
그래 그 옆에서 숨죽일 무렵
* 꽃밭을 바라보는 일 - 장석남
저, 꽃밭에 스미는 바람으로
서걱이는 그늘로
편지글을 적었으면, 함부로 멀리 가는
사랑을 했으면, 그 바람으로
나는 레이스 달린 꿈도 꿀 수 있었으면,
꽃 속에 머무는 햇빛들로
가슴을 빚었으면 사랑의
밭은 처마를 이었으면
꽃의 향기랑은 몸을 섞으면서 그래 아직은
몸보단 영혼이 승한 나비였으면
내가 내 숨을 가만히 느껴 들으며
꽃밭을 바라보고 있는 일은
몸에, 도망온 별 몇을
꼭 나처럼 가여워해 이내
숨겨주는 일 같네.
* 왼쪽 가슴 아래께에 온 통증 - 장석남
죽은 꽃나무를 뽑아낸 일뿐인데
그리고 꽃나무가 있던 자리를 바라본 일 뿐인데
목이 말라 사이다를 한 컵 마시고는
다시 그 자리를 바라본 일 뿐인데
잘못 꾼 꿈이 있었나?
인제 꽃이름도 잘 생각나지 않는 잔상들
지나가는 바람이 잠시
손금을 펴보던 모습이었을 뿐인데
인제는 다시 안 올 길이었긴 하여도
그런 길이었긴 하여도
이런 날은 아픔이 낫는 것도 섭섭하겠네
* 송학동 1 - 장석남
계단만으로도 한동네가 되다니
무릎만 남은 삶의
계단 끝마다 베고니아의 붉은 뜰이 위태롭게
뱃고동들을 받아먹고 있다
저 아래는 어디일까 뱃고동이 올라오는 그곳은
어느 황혼이 섭정하는 저녁의 나라일까
무엇인가 막 쳐들어와서
꽉차서
사는 것이 쓸쓸함의 만조를 이룰 때
무엇인가 빠져나갈 것 많을 듯
가파름만으로도 한생애가 된다는 것에 대해
돌멩이처럼 생각에 잠긴다
* 꽃이 졌다는 편지 - 장석남
1
이 세상에
살구꽃이 피었다가 졌다고 쓰고
복숭아꽃이 피었다가 졌다고 쓰고
꽃이 만들던 그 섭섭한 그늘 자리엔
야윈 햇살이 들다가 만다고 쓰고
꽃 진 자리마다엔 또 무엇이 있다고 써야 할까
살구가 달렸다고 써야 할까
복숭아가 달렸다고 써야 할까
그러니까 결실이 있을 것이라고
희망적으로 써야 할까
내 마음속에서
진 꽃자리엔
무엇이 있다고 써야 할까
다만
흘러가는 구름이 보이고
잎을 흔드는 바람이 가끔 오고
달이 뜨면
누군가 아이를 갖겠구나 혼자 그렇게
생각할 뿐이라고
그대로 써야 할까
2
꽃 진 자리에 나는
한 꽃 진 사람을 보내어
내게 편지를 쓰게 하네
다만
흘러가는 구름이 잘 보이고
잎을 흔드는 바람이 가끔 오고
그 바람에
뺨을 기대보기도 한다고
나는 오지도 않는 그 편지를
오래도록 앉아서
꽃 진 자리마다
애기들 눈동자를 읽듯
읽어내고 있네
* <즐거운 상처>를 노래한 서정시(왼쪽 가슴 아래께에 온 통증, 을 읽고)
- 이기철
즐거운 상처? 그런 상처도 있는가? 쓰리지도 않고 아프지도 않은, 달콤하고 즐거운 상처가 과연있는가?
그러나 장석남의 시 '왼쪽 가슴 아래께에 온 통증'을 읽으면 아프지 않고 쓰리지 않은, 즐거운 상처가
있음을 느낀다. 그것은 사실의 여부와는 관계가 없는, 느낌만으로의 세계이지만 느낌만으로의
세계와도 통화가 가능하고 감각의 교호가 가능한 세계가 시의 세계임을 이 반어법적 진실은 은연중
보여준다. 한 번 더 느낌을 강조해도 된다면, 장석남의 감각은 내 초기시의 감각과 한 줄기 맥이 닿아
있는 느낌을 나는 간간이 받아온 것도 사실이지만, 이번에도 기실 내가 아파트의 난간에서 한창 햇볕의
수혈을 즐기고 있는 살구나무의 무성한 잎새들을 바라보며, '초록들이 서둘러 오전을 빨아 먹는다'라는
말을 떠올리고 있던 참에, 월평에 쫓겨 현대문학을 집어들었을 때 장석남의 시는 어떤 신선한 감각으로
혹은 속삭이는 언어로 나에게 다가왔던 것이다.
김혜순이나 박남철의 시가 적극적 자기 제시라면 장석남의 시는 소극적 자기 현현이라고 할 만하다.
장석남은 소근대면서 말하길 좋아한다. 그는 웅변으로 말하지 않고 귀엣말로 속삭인다. 사운대듯 하는
말이 마침내 물소리가 되고 폭포 소리가 되는 법을 그는 익히고 있는 듯하다.
상처를 말하면서도 그는 신음을 내지 않는다. 제시보다는 상호교응, 교감의 세계에의 함입이다.
아파야 할 상처가 그러기에 오히려 즐겁고 감미로운 것이다. 그는 이미 '소래라는 곳'에서,
'저녁이면 어김없이 하늘이 붉은 얼굴로/뭉클하게 옆구리에 만져지는 거기'라고 노래하는 감각의
신선함을 보인 바 있고, 또한 '저녁 햇빛에 마음을 내어 말린다'에서, '어미소가 송아지 등을
핥아 준다/막 이삭피는 보리밭을 핥는 바람/아, 저 혓자국!'과 같은 표현으로 정태적인 풍경을
움직이는 사물로 혹은 추억의 갱신으로 활성화시키는 재능을 보인 바 있다. 그는 또한 그의 시
'걸음은 자꾸 넘어지자고'에서, '만발하는 고통'을 '잎 넓은 애인'으로 의인화하여 시의 생신감을
획득한바 있고 고통과의 대화를'너무 밝은 잠'으로 표현함으로써 따뜻한 감수성과 세계에의 포용을
보여준 바 있지만, 이번의 시 '왼쪽 가슴 아래께에 온 통증'에서는, '죽은 꽃나무를 뽑아낸 일
뿐인데/그리고 꽃나무가 있던 자리를 바라본 일 뿐인데/목이 말라 사이다를 한 컵 마시고는/다시
그 자리를 바라본 일 뿐인데/잘못 꾼 꿈이 있었나?'와 같은 자문으로 스스로를 성찰하기도 하고,
그것을 '인제는 다시 안올 길이었긴 하여도/그런 길이었긴 하여도/이런 날은 아픔이 낫는 것도
섭섭하겠네'라는 자탄을 보이기도 한다. 그가 말하는 '다시 안 올 길'이 구체적으로 어떤 길이며
무슨 길인지는 이 시에서 분명히 파악하기가 어렵지만 그것이 환희가 아니라 비애, 기쁨이 아니라
상처에 가까우리라는 것은 시의 의표에서 짐작할 수 있다. '목이 말라 사이다를 한 컵 마신 일
뿐인데'가 보여주는 새로움의 환기는 무기력하게 보이기 쉬운 이 시에 활력을 불어넣어 주는
역할을 하는 행이지만, 마지막 구절, '이런 날은 아픔이 낫는 것도 섭섭하겠네'와 같은 행은
이 시를 이명처럼 오랜 여운으로 남도록 하는 데 기여한다.
장석남과 같은 세대의 평론가인 고형진의 말을 빌면, 장석남 시의 자연은 대체로 그의 생장지인
덕적도와 연관되어 있고 그의 시적 변별점은 때묻지 않은 순수함과 맑음으로 규준지을 수 있다
(고형진, 신세대 시인들의 새로운 시적 패러다임, 문학정신, 1993, 1·2월호).그렇듯이 장석남의 시는
대체로 동화적 순수성에서 발원한다. 그랬을 때의 동화적순수란 그의 장점일 수도 있고 단점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그가 보여준 시들 가운데는 대상과의 투철한 인식이 부족한 듯하고 진취적인
발돋움이 미약한 듯한 시들도 있기 때문이다. 오래 전에 시인 황동규가 내 시를 평하면서
한 말이지만, 세상이 온통 뜨겁거나 차가운 시를 분출하고 있을 때 '뜨겁지도 않고 차갑지도
않은 시'를 쓴다면 그런 시는 전달과 감응에서 언제나 약세를 면하기 어렵게 된다.
그러나 장석남의 시는 뜨겁거나 차가움 대신에 때묻지 않고 맑은 감각을 시 속에 채워넣는
장점이 있다. 그런 점에서 그는 안정된 느낌을 주는 시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