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운 마음 기댈 곳 없어, 동그라미 그리며 달래봅니다.
하고픈 말 동그라미 밖에 있고, 드리고 싶은 마음 동그라미 안에 있습니다.
동그라미 하나는 소첩이고, 동그라미 두개는 당신입니다.
당신의 마음은 저에게 있고, 제 마음은 당신께 있습니다.
달은 기울었다가 다시 차고, 찼다가는 다시 기웁니다.
완전한 동그라미는 우리가 만난 것이며, 반만 그린 동그라미는 헤어진 것입니다.
제가 두 개의 동그라미를 아주 가깝게 그렸기에,
당신은 저의 마음을 아실 것입니다.
말로 다하지 못하는 그리움은 동그라미처럼 돌고 또 돕니다.
相思欲寄無從寄,畵個圈兒替。
話在圈兒外,心在圈兒裡。
單圈兒是我,雙圈兒是ni。
ni心中有我,我心中有ni。
月缺了會圓,月圓了會缺。
整圓兒是團圓,半圈兒是別離。
我密密加圈,ni須密密知我意。
還有數不盡的相思情,我一路圈兒圈到底。
<권아사(圈兒詞)> 또는 <상사사(相思詞)>
동그라미 그리려다 무심코 그린 얼굴 / 무지개 따라 올라 갔던 오색빛 하늘 아래
/ 구름속의 나비처럼 날으던 지난 날 / 동그랗게 동그랗게 맴돌곤 하는 얼굴...
작사, 작곡 - 심봉석, 신귀복
'얼굴'이라는 가요의 가사처럼 동그라미는 처음으로 접하게되는 한없이 그리운 모습의 형상화이다.
누구에게나 처음 접하게되는 동그라미가 있겠지만 누구에게나 동그라미의 기억이 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동그라미 그리기...옛 사람이나 지금의 어린아이나 그 누구이든지 말이다...
꽃어름눈물...
남송(南宋,1091년 좌우) 때의 여류 작가 주숙진(朱淑眞). 그녀는 스스로 유처거사(幽棲居士)로
불렀다. 지금의 항주인근인 전당(錢塘) 혹은 영해(寧海) 사람으로 알려졌으며, 어릴때부터
총명하고 지혜로웠다. 독서하기를 좋아하였고, 금(琴) 연주에 능하였으며, 그림과 시(詩), 사(詞)
등에 특히 뛰어났다. 그녀의 집안은 원래 사환(仕宦, 벼슬아치) 집안으로 깊은 규방에서 물같이
맑게 자라났으니 그녀의 재화는 특출난바가 있다(深閨麗質,才華特出).
17세때, 《월야삼수(元夜三首)》를 지었는데 연초의 관등(元宵觀燈)행사에 관한 시였다.
조숙녀가 <월몽롱月朦朧>에 취하여 사랑을 대담하게 표현하는 작품이다. 그중에《前題》
가운데:“去年元夜時,花市燈如晝,月上柳梢頭,人約黃昏后.今年元夜時,月與燈依舊.
不見去年人,淚滿春衫透.”라고 읊으며 시인이 저녁무협에 떠오르는 달빛에 취하여 내딛는 정경을
봄밤의 등롱에 비유하며 절묘하게 표현하고 있다.
그녀는 성년이되어 19세 나이에 부모의 명에 따라 중매로 시정의 상인에게 시집을 가게 되었다.
부부의 성격은 정취가 남달랐고(情趣廻異), 남편은 장사 때문에 오랫동안 먼 곳에(吳越荊楚 지방을 주로 다녔다) 가있는 시간이 많아지게 되어 자연히 그녀는 슬프고 적막하였다. 그때면 주숙진(朱淑貞으로도 불리운다)은 남편을 그리워하며 사를 지어 편지를 보내면서 세월을 보냈다(賦詩作詞,
遣度歲月). 남편은 편지 봉투를 뜯어보았지만, 편지지에는 글자 대신 크고 작은 동그라미들만
가득하였다. 그녀의 남편은 아무리 들여다보아도 그 의미를 알 수 없었다. 문득 바람이 불어 편지지가 바닥에 떨어졌다. 동그라미의 의미를 몰라 고민하던 주숙정의 남편은 편지지의 뒷면에
조그맣게, 그리고 또박또박 적힌 글자를 발견하였다. 동그라미 편지에 대한 해석이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그리운 마음 기댈 곳 없어, 동그라미 그리며 달래봅니다.
하고픈 말 동그라미 밖에 있고, 드리고 싶은 마음 동그라미 안에
있습니다.
동그라미 하나는 소첩이고, 동그라미 두개는 당신입니다.
당신의 마음은 저에게 있고, 제 마음은 당신께 있습니다.
달은 기울었다가 다시 차고, 찼다가는 다시 기웁니다.
완전한 동그라미는 우리가 만난 것이며, 반만 그린 동그라미는
헤어진 것입니다.
제가 두 개의 동그라미를 아주 가깝게 그렸기에,
당신은 저의 마음을 아실 것입니다.
말로 다하지 못하는 그리움은 동그라미처럼 돌고 또 돕니다.
相思欲寄無從寄,畵個圈兒替。 話在圈兒外,心在圈兒裡。
單圈兒是我,雙圈兒是ni。 ni心中有我,我心中有ni。
月缺了會圓,月圓了會缺。 整圓兒是團圓,半圈兒是別離。
我密密加圈,ni須密密知我意。 還有數不盡的相思情,
我一路圈兒圈到底。
얼마 후, 주숙정은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녀의 남편은 그녀의 묘 앞에 비를 세웠다.
묘비에는 그녀가 썼던 이 시가 새겨져 있었으니, 이름하여 <권아사(圈兒詞)> 또는
<상사사(相思詞)>라 불리운다.
그녀시의 풍격(風格)은 남편과 오랜 시간을 헤어져 지내었기에 유독 정감이 풍부하고,
더하여 재화가 바닷물이 끊듯 넘쳐났다,그렇기 때문에 그녀의 작품은 정려담아(淸麗淡雅)한
가운데 슬픔은 머금은 애수의정(悽婉哀愁之情)이 가득하곤 하였다,
후인들은 그녀의 작품 200여편을 모아 시집을 내었는데,이름을 <단장집(斷腸集)> 이라하였다,그중에 사(詞)가 31수이다,뒷날 그녀와 이안거사 이청조(李淸照)를 가르켜
「쌍절 雙絶」이라 칭하였다。
<자책 自責> 朱淑眞
여자가 시문을 농하는 건 정말 죄스러우니
어찌 달을 읊고 바람을 노래하랴
쇠벼루가 닳도록 글 짓는 건 내 일이 아니니
수 놓다 바늘 분지르는 데 공을 세우리
女子弄文誠可罪, 那堪詠月更吟風.
磨穿鐵硯非吾事, 繡折金針却有功
울적한 마음 풀 길 없어 시를 읽노니
시 속에는 또 이별의 말만 있어
내 마음은 더욱 쓸쓸해지기만 하니
비로소 알겠네 영리하기 보다는 어리석은 게 좋음을
悶無消遣只看詩, 又見詩中話別離.
添得情懷轉蕭索, 始知伶리不如癡. ** 리(이)..똑똑하다, 人+利
여성의 신분으로서 시를 읊는 다는 것이 당시 사회분위기상 어떠하였는가를 잘 보여주는
대목이라고 생각된다. 그녀와 비슷한 시기를 산 어현기(漁玄機小傳)도 이러하였습니다.
당나라 당시의 이러한 도관의 개념은 일종의 문인들을 위한 연회장이나 사교의 장소
노릇을 하였습니다. 스스로 고고하다고 느끼는 문인들에게 기방을 조금은 인식이 나쁘기 때문에
이러한 도관이 생겼다고 합니다. 당시 어현기와 비슷한 기생 출신이었던 이야(李冶)도 어엿한
사대부 출신인데도 어렸을때부터 거문고를 나고 시를 짓는등 무척 문학적인 재능을
발휘하였다는군요.
불과 그녀나이 5,6세때에 시를 읊조렸다는군요.
때가 지나도
채워지지 않는 바구니
이내 맘
어지럽기만 하다
經時未架却, 心緖亂縱橫.
이러한 기특한 시를 지었지만 당시의 세태는 여자가 이런 시를 짓는 것은 부녀자 답지 않은
행동이라하여 경원시하던 풍조때문에 아버지로 부터 심한 꾸지람을 듣고 자신을 출가시키려고
하였다고 합니다.
이러한 여성들의 갈길은 도사가 되는 길 뿐이었다고 합니다.
합법적으로 이런 여성들의 자유분방한 문재를 살려주는 구실도 하였던 모양입니다.
어현기 그녀도 기생이라는 신분을 한계를 뛰어넘기위해 비록에 첩의 신세로 이억에게
몸을 의지하지만 그녀의 신분 때문에 결국 비참하게 이억으로부터 버림을 받고 도관에
몸을 의탁합니다.
비록 당나라 시대의 여인들만이 아니겠지만 여인으로서 자신의 문재를 들어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겠지요. 우리나라 조선시대 여성들도 자신의 재능을 여염집 규방에서 구사하기란
쉽지 않았다고 하더라구요..허난설헌 같은 이도 자신이 죽음에 이르르자 일평생동안 써온
시문을 모두 불태웠다고 하더라구요. 그녀가 남긴 시집은 동생인 허균이 자신의 기억을 더듬어
중국에서 문집을 낸 것이라더라구요..
문학적 재능을 타고난 여류문인들은 그러한 사회 분위기 탓으로 문인들과 교류하기가 쉽지
않았었겠구요.
그녀는 타고나기를 일반여성과는 달리 아주 자유분방하면서도 방탕한 생활로 일반적인
규수들로서는 상상할수 없는 생활을 하게됩니다.
그녀가 남긴 어현기소전의 40여수의 시가는 그리 많은 것은 아니지만 제가 생각키론는
아마 좀 남녀간의 사랑을 노래한 진한 시가들도 많았을 거라고 생각됩니다.
이안체로 유명한 이청조의 시가나 설도(薛濤)등이 500여편의 시가를 남긴 것에 비하면
무척 적게 남긴 것이랍니다.
아마 후대에 그녀의 시가를 시집으로 엮어내면서 그러한 시가는 모조리 뺀 것으로 보입니다.
당나라 시대는 일반부녀자들이 사회생활할수 있는 것은 고작해야 절에 가서 참배를 하거나
시집에 한번쯤 다녀가는 것이 전부였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런 답답한 생활을 못견뎌하는 여인들에게는 이러한 도교계열의 도가 무리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사회적으로 그러한 여성들은 자유롭게 남성들과 교분할수 있었다는 군요.
산속이나 명승지 같은 곳에 남성들이 모일만한 곳에 교분을 위한 주막이나 연회장 구실을 하는
도관 형식의 모임장소가 있었다고 합니다.
어현기가 들어간 함의관도 바로 그러한 곳이라고 추측됩니다.
그러한 도관에서 비로서 어현기는 자신이 타고난 문학적 재능을 발휘하면서 살아갈수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그녀의 시가를 읽으면서 그런 느낌이 많이 들더라구요.
그녀의 삶이 비록 일반규수처럼 평탄한 삶은 아니었지만 그녀 스스로 자연을 노래하고
자신을 찾는 문인들과 세사를 논할수 있었던 것으로 보면 그녀는 당대의 아주 진보적인
여성으로서 그들과의 관계를 통하여 마음껏 사회성을 발휘하였다고 봅니다.
그녀에게 주어진 고난과 역경은 더욱 그녀의 재능을 발현케하였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羞日遮羅袖。
愁春懶起장。(꾸밀 장)
易求無價寶。
難得有心郞。
枕上潛垂淚。
花間暗斷腸。
自能窺宋玉。
何必恨王昌。
해가 부끄러워 비단 소매로 가리는
시름에 젖은 봄날에 게으름 피우며 일어나 화장을 한다
진귀한 보물은 구하기 쉬우나
나를 사랑해 주는 낭군은 얻기 힘드누나
남몰래 베게에 눈물 흘리고
꽃 잎 사이로 마음만 상한다
내 스스로 송옥(宋玉)을 넘 본 탓인걸
어찌 왕창(王昌)만 탓하리...
贈隣女 (寄李億員外) 이웃의 여인에게
Sent to a Neighbor Woman Friend
이억의 처의 질투에 쫒겨나면서 일찌기 초왕에게 버림 받은 송옥을 자신에게 비유하면서
왕창에게 이억을 비유하면서 신세한탄하는 시가..
朱淑貞 http://victorian.fortunecity.com/bellow/348/a7-2.htm#朱淑貞
自稱:幽棲居士 西元1091年左右 北宋海寧人或錢塘人 著作:斷腸集 生平:幼年聰慧,好讀書,善詩詞。長於仕宦之家,深閨麗質,才華特出。長大後,奉父母之命、媒女+勺之言,嫁市井小民,夫婦性格、情趣廻異,爲丈夫所棄。孤凄寂寞,賦詩作詞,遣度歲月。 風格:淑貞遭此境遇,加以才華洋溢、情感豊富,因此作品往往於淸麗淡雅中,帶有悽婉哀愁之情,後人收集其詩二百餘篇,
名曰斷腸集,詞三十一首,後人以之與李淸照漱玉詞,竝稱「雙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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