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좋아하는 내게 가끔 최고의 영화가 무엇인지 물어보면, 망설이게 된다. 아마데우스, 죽은 시인의 사회, 블레이드 러너, 프라하의 봄 등등 나를 감동시키고 몇 번씩 되풀이해서 보게만드는 여러가지 영화가 생각나지만, 선뜻 한 가지를 선택할 수 없었다. 이제 적어도 당분간은 별다른 망설임 없이 답변할 수 있게 된 것 같다. 내 인생 최고의 영화는 테오 앙겔로풀로스 감독의 영원과 하루다. 엘레니 카라인드루의 중독성 강한 음악, 아름다운 영상과 색채, 영화적인 재미와 작품성, 풍부한 감성, 사색의 깊이, 삶의 반영 등 내가 영화에서 얻고자 하는 모든 것이 담겨 있다. 눈돌아가는 빠른 세상에서 적응하기 어려워하는 내겐, 긴 호흡도, 디테일과 공백까지 담아내는 느릿한 시선도, 눈을 게슴츠레 뜨고 영화의 모든 순간에 빠져들게 하는 요소가 되었다.
오랜 기다린 끝에 만난 영화가 되었는데, 덕분에 영화를 충분히 감상할 수 있는 시기에 첫 만남을 가질 수 있게 된 것 같다. 삶에 대한 성찰이 있어야 즐길 수 있는 영화였고, 무엇보다 마음 속에 여유가 있어야 제대로 감상할 수 있는 영화였다. 여기에는 어설픈 해석의 시도 역시 포함된다. 나는 이제 내 나름의 해석도 충분히 즐기지만, 내 능력으로 해석할 수 없음도 충분히 즐기게 되었다. 때로는 영화도 삶도, 시를 마주하듯이 다가서지 않으면 들어갈 수도 없고 받아들일 수도 없다. 소화해내려는 모든 시도는 값진 것이지만, 인생이 그렇듯이, 문화나 예술은 수학이나 과학은 아니다.
영원과 하루는 제목에서 주는 인상처럼 무게감이 있는 영화다. 가볍지도 않고 빠르지도 않다. 메시지도 분명하지 않고, 물론 친절한 설명도 많지 않다. (그래도 다른 영화보다는 비교적 설명해주는 장면이 많은 편이긴 하다.) 이 영화는 말그대로 시 같은 영화다. 여운과 공백을 감상할 수 있는 여유를 지니지 않는 이상, 이 영화의 재미를 충분히 느끼기는 불가능해보인다. 이해하고 설명하고 싶은 마음은 조금 옆에 내려놓고, 열린 마음으로 감상하게 되면, 재미있다. 시는 어렵고 난해해서 즐길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조급한 이성의 간섭 때문에 즐기기 어려운 것이다.
우선, 앙겔로풀로스 감독의 카메라는 느리다. 천천히 움직인다. 주변 풍광도 한번 잡아줘야 하고, 한 사람 한 사람 시선도 나눠줘야 하고, 사물이 떠난 빈 공간도 놓치고 싶어하지 않는다. 현대인의 시선은 이보다 무조건 한발 빠르다. 카메라는 자꾸만 관객의 시선 뒤에 남아있다. 가끔은 느리게 움직이는게 아니라, 따라오지조차 않고 남아있다. 그 느린 호흡은, 길이도 매우 길다. 예를 들어, 한결 가벼워진 소년과 알렉산더가 시어를 사는 시인에 관한 이야기를 장면은, 그대로 바다로 이어져, 시어를 팔러 가는 여인의 배를 따라, 마을 사람들을 거쳐, 시인에게 천천히 한 호흡에 진행된다. 여인이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시인에 이르고, 둘이 시어에 관해 이야기하고, 여인이 다시 떠나고, 소년과 알렉산더가 그 시인이 있는 곳까지 가는 동안, 그 호흡은 계속 이어진다. 시간과 공간은 독립적이지 않고 경계를 구분하지 않고 하나로 이어져 있다. 내 머리 속의 예상과는 달리, 어디까지가 상상이고, 어디까지가 현실이고, 어디까지가 회상인지 구분해내는 것이 영화를 독해하는 힘이 아니다. 이 영화는 그렇게 뒤섞인 채로 단절없이 놓아두는게 맛이다.
이 영화에는 회상 장면이 많이 나온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생의 마지막 순간을 맞이하고 있는 알렉산더는 과거로의 여행을 통해 다음 세상으로 건너가고자 한다. 이 하루 동안 인생의 시간 전체를 조망하고 싶은 것이 주인공 알렉산더의 의도이고, 사실 감독의 의도는 그보다도 훨씬 컸던 것으로 보인다. 개인적인 경험이나 사고에 한정되지 않은, 역사와 문화, 국가관과 세계관 까지 담고자 했다. 인생 전체 정도가 아니라, 그 전과 후의 영원을 모두 담고 싶었고, 그리스나 그리스어의 뿌리 정도가 아닌 온 세계와 인류의 근본에 대한 성찰을 담아내고자 했던 것 같다. 감독의 의도가 성공했는지 안했는지, 중요하지 않다. 개인적인 생각으론 감독이 의도한 바를 충분히 담아내지 않았을까 싶다. 그런 말도 안되는 너무 거대한 욕심을 어느 정도라도 충족할 수 있었다면, 그것은 영화를 시처럼 만들었기 때문이다. 일일이 설명해서는 그런 폭넓은 숙제를 제한된 공간과 시간 안에 풀어낼 수 없다. 담아내는건 감독의 몫이고, 받아들이는건 관객의 몫이다. 관객은 담겨진 모든 것을 이해할 의무가 없다. 복합적인 시어로 담아낸 예술 작품을 하나하나 분해해가며 손상시킬 필요는 더더욱 없다. 그렇게 이 영화는 시인과 시어에 대한 영화인 동시에, 영화 자체가 시인 영화다.
이 영화의 회상 장면을 현실과 구분하는 것도 어려운 일이다. 현재와 과거, 그리고 상상까지 한 컷으로 담겨져 있기도 하고, 인물 하나하나를 어디에 속하는지 구분해내는 것도 쉽지가 않다. 예를 들어, 버스에 탄 예술가 커플은 현실인가, 음악을 연주한 트리오는 현실인가, 지쳐 잠들어 버린 혁명가는 현실인가, 버스에 오른 시어를 사는 시인은 현실인가. 노란옷을 입고 자전거를 타고 있던 세 사람은 현실인가. 국경에 매달린 아이들은 현실에 존재하는 것이었는가. 아이들을 파는 사람들은, 또 사는 사람들은 실제였을까. 그렇다면 아이들은, 그 난민 소년은. 주변 사람들은, 배경은. 나는 이 해석을 완벽히 하는 것을 포기했다. 오히려 그냥 뒤섞여 있다고 생각한다. 주인공은 어차피 현실에서 옆에 있었던 사람들도 정확히 기억해내지 못한다. 자기 세계에 몰두해서 작가적 상상력을 발휘하는 삶을 살아온 알렉산더는 실제로 옆에 있는 소년에 대한 인식도 시시때때로 실패한다. 회상이 아닌, 현실에서의 아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현실과 상상, 과거와 현재는 어차피 조금씩 섞여 있다. 정도의 차이일 뿐.
앙겔로풀로스의 영화관과 영화 기법, 그가 처했던 상황이나 감독의 의도에 대해서는 따로 연구해본 적이 없다. 나는 그가 남긴 영화 중 아주 일부인 네 편의 영화를 감상했을 뿐이다. 그것을 통해 내가 느낀 감상은, 앙겔로풀로스는 이상과 현실에 대해 끊임없고 고민하고 표현해낸 사람이었다는 점이다. 흔히 침묵의 3부작이라 불리는 일련의 영화에서 잘 표현된 것 같은데, 시테라섬으로의 여행에서는 그 이상과 구원이 역사였고, 비키퍼에서는 사랑이었고, 안개 속의 풍경에서는 아버지, 곧 신이었다. 그 세 가지는 모두 침묵했다. 그의 영화가 어둡게 느껴지는 것은 그 침묵 때문이지만, 그는 결과 때문에 과정을 부인하는 세계관을 지닌 사람 같지는 않다. 이상과 구원을 추구하는 과정 자체, 여행 그 삶의 여정을 또한 중요시했기 때문이다. 서둘러 결론으로 달려가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지 않을까 싶다. 그의 어두움이 암흑이 아니라 안개라는 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우리의 삶이 죽음으로 귀결되기 때문에 무의미하다고 여길 수 없는 것처럼, 안개 속의 여행이 구원으로 연결되지 않는다고 해서 무의미하다고 판단할 수는 없다. 그래서, 그의 영화는 구원이 없다는 비관론으로 결론지어지지 않는다. 다만, 침묵하고 있을 뿐이었다.
영원과 하루는 침묵의 3부작과는 전해주는 느낌이 많이 다르다. 이상과 구원의 추구라는 점에서는 여전히 일맥상통하는 측면도 있고, 삶의 의미를 끊임없이 더듬고 있다는 점에서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안개가 많이 걷혀 있다. 현실의 그 마지막 하루는 여전히 안개가 자욱하지만, 그가 회상하는 과거는 안개가 걷힌 밝은 빛을 드러내고 있다. 안개속의 풍경에서 약간의 구원의 메시지에 대한 힌트를 남겼었다면, 영원과 하루에서는 해답의 일부는 찾았다는 징후가 조금 보인다. 소년의 등장이 그렇고, 찾아낸 시어가 그렇다. 그 하루는 알렉산더에게는 생의 마감이었지만, 소년에게는 새로운 생의 시작이었다. 알렉산더에게는 과거로 이어진 하루였지만, 소년에게는 미래로 이어진 하루였다. 그들 모두에게 해답은 과거로부터 미래로 이어지는 영원과 하루에 있었다. 내일은 과거로부터 이어진 현재를 마감하고 영원으로 이어지는 미래를 여는 문이다.
이제 시어에 주목해보자. 생의 마지막 순간에 생의 의미를 찾기 위해 알렉산더가 선택한 것은, 시어를 찾는 여행이었다. 시어의 획득은 곧 삶의 의미와 깨달음을 얻는 것이었다. 앙겔로풀로스 감독은 함축적 언어로 제시하는 걸 즐겼던 것 같은데, 영화 제목의 선택에서도 잘 나타난다. 안개, 풍경, 여행, 영원, 하루, 시선, 율리시즈(오딧세이) 등. 영원과 하루에서 소년이 알렉산더에게 건네준 시어는 세 개였다. 코폴라(작은 꽃), 세니띠스(망명객), 아르가디니(너무 늦었다). 이 영화에서 전달하는 싶었던, 삶을 나타내는 가장 중요한 세 단어라 할 수 있다.
코폴라는 애써 노력하지 않으면 주목하기 어려울 수도 있는 길가의 작은 꽃을 의미한다고 생각된다.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 우리는 왜 살아가고 있는가, 삶의 기쁨은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가 하는 질문에, 당신이 쉽게 놓쳐온 작은 꽃에 있었다는 답을 해주고 있는 것이다. 내가 불러주기 전에는 꽃이 될 수 없어던 존재의 아름다움, 나의 손길과 정성과 관심을 통해 꽃피울 수 있는 무궁한 가능성을 안고 있는 작은 결정체에서 삶의 의미를 찾아야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알렉산더의 삶을 의미있게 해준 코폴라로 떠오른 것은 아내였다. 자기 생각에 몰두해 있는 상상 속의 자기 세계에서 나와서 현실의 자기 곁으로 다가와 주었던 하루가, 아내에게는 가장 행복했던 하루였다. 그것은 아내의 코폴라였고, 그런 순간을 선사함으로써 아내의 기쁨과 행복이 다시 반사되어 돌아오는 것이 알렉산더의 코폴라였다. 그런 의미에서 코폴라는 사랑을 의미한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사랑을 위해, 사랑으로 산다.
세니띠스는 망명객, 떠도는 사람, 이방인을 의미한다. 시어를 사는 19세기 시인처럼, 알렉산더는 그리스를 떠나 망명객의 삶을 살아왔다. 고국에 머물러 있었어도, 이 세상에서, 이 삶 속에서, 우리는, 결국, 망명객이고, 이방인이다. 우리의 삶은 영원 속에서 잠시 머무르는 하루다. 우리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우리의 고향은 어디이고, 우리가 가야할 곳은 어디이고, 우리가 머물러야 하는 곳은 어디였는가. 그 잠시 머무르는 영원 속의 짧은 순간에 우리는 무엇을 해야하는가. 우리는 어떤 의미를 찾아야 하는가. 어떻게 이 한정된 시간을 의미있는 것으로 만들어야 하는가. 세니띠스라는 시어는 이런 실존적이고 철학적인 화두를 던지고 있다. 영화 속 주인공인 알렉산더는, 질문의 측면보다는 깨달음의 측면에서 이 시어를 받아들인다. 그는 내려놓을 수 있는 것들을 내려놓고, 영원 속으로 떠날 준비를 한다. 마음의 짐을 벗어놓고 자유와 가벼움을 얻는다는 느낌을 주고 있다. 세니띠스로서 우리는 영원 속에 주어진 짧은 순간 이 삶에의 머무름을 의미있는 것으로 살아내기 위해 어떤 마음 가짐으로 살아야 하고 떠나야 하는가 하는 질문은, 언제나 아직 떠날 준비가 되지 않은 남겨진 사람들의 숙제다.
아르가디니는 너무 늦었다는 뜻이다. 이 삶은 잠시 머무르는 것이었다는 걸 이해한 것도, 작은 꽃이 우리 삶을 의미있게 만드는 것이었다는 걸 이해한 것도, 너무 늦었다. 존재가 의미를 부여받는 것은 시간 속에서다. 하지만, 우리는 역시 지나간 후에야 이해하는 것들이 많다. 더이상 사랑할 수 없을 때, 더 사랑했어야 했다는 것을 느낀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앞에서야 많은 것을 이해하고 느끼기도 한다. 그래서, 인생의 마지막 순간을 겪은 사람들의 조언이 필요하기도 하고, 그런 경험있는 사람들의 통찰을 빌리기 위해 문학이나 예술에 의존하기도 한다. 떠나기 전에 이 세상에서의 삶을 이해하고 의미를 찾는 것도 중요한 일이겠다. 알렉산더가 시어를 찾을 수 있었던 것도, 생의 마지막 순간이었기 때문에 일생동안 찾아도 구할 수 없던 것들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고 보여진다. 결국, 그 시어들은 손에 닿지 않는 멀리 있던 것들이 아니라, 미처 소중함을 느끼지 못했던 주변에 있었다. 그런 소중한 발견, 깨달음의 시간을 가능한 당길 수 있으면, 우리 삶은 더 빛날 수 있지 않을까. 알렉산더가 찾은 시어들은 소년으로부터 왔다. 그럼, 그 소년의 인생은 찬란하게 빛날 수 있을 것인가. 남은 인생이 열려있는 소년에게 그 깨달음의 순간이 중요한만큼, 생을 마감하는 순간의 깨달음도 역시 중요하다는 것도 기억해야 할 것 같다. 너무 늦었다는 깨달음의 순간은 그 자체로 빛나는 순간이다. 더 빨리 알았어야 할 중요한 것을 지금에라도 깨달았다는 것이 너무 늦었다는 깨달음이다. 그 순간이 언제이든, 우리는 이런 중요한 순간을 놓칠 수 없다.
알렉산더에게는 남은 시간이 많지 않았다. 일생의 과업을 완성해야 하고, 그것을 이루는 데 걸릴 시간만도 턱없이 부족했다. 마지막 길에서 만난 소년에게 사랑을 베풀어 주고 싶고, 실제로 실행에 옮기기도 하지만, 그는 떠나야 했다. 소년을 떠나보내야 했다. 소년을 떠나보내려고 국경에 간 장면도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 중 하나였다. 안개 자욱한 국경은 삶과 죽음의 경계를 나타내는 것 같기도 했다. 환상과 현실이 묘하게 섞여있는, 그 모호한 경계에 이르렀을 때, 소년은 고백한다. 돌아갈 가족이 없음을. 산을 넘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두려운 일이었음을. 죽음이 얼마나 가까이 있었는지를. 알렉산더는 소년과 다시 함께한다. 그리고 아직 약간의 시간이 남았을 때, 소년이 작별을 고한다. 이제 알렉산더는 소년에게 가지 말라고 외친다. 소년이 두렵다고 하자, 나도 두렵다고 이야기한다. 일생의 과업은 여기에서 이 소년과 함께 완성된다. 사랑하고 돌아보고 진솔해지는 순간이었다. 진짜 삶을 발견한 순간이었다. 그리고, 여행의 끝에서 이들은 버스를 탄다. 마지막 여행의 마지막 여정이었던 버스안에서, 인생과 역사를 함축한 이 명장면에서, 역시 상상과 현실이 섞이며 많은 아름다운 순간들을 경험한다. 혁명과 문학과 음악과 예술의 아름다움과 공존과 화해와 그 덧없음까지.
소년을 떠나보낸 알렉산더는 이제 생의 마지막 순간에 홀로 마주선다. 그는 이제 평생 찾고자 하는 시어들을 가졌다. 문을 열고 바닷가로 나가서 과거의 혹은 상상의 아내와 만난다. 바닷가 집에서 밖으로 난 문은, 과거와 상상과 현실을 이어주는 통로였다. 이곳에서 그들은 내일에 관해 이야기한다. 내일은 영원하고도 하루라고, 영원과 하루라고. 우리가 기다리는 것은 영원과 하루라고. 너무 늦었다고 생각한 순간에 우리앞에 다가서는 것은, 영원하고도 하루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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