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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피두 센타

조용한ㅁ 2012. 3. 5. 23:29

15:28

 

고대부터 근대 이전까지 예술작품은 루브르에

근대 예술작품은 오르세에

근대 이후의 작품은 퐁피두센터에 있다.

현대 예술은 어렵다고? 과연 퐁피두센터는 내게 어떻게 다가올까?

(요즘 한 금융회사의 후원으로 서울에서도 퐁피두센터 특별전이 열리고 있던데!)

 

오늘은 일요일, 뮤지엄패스 4일권도 오늘이면 끝난다.

오전에는 카르나발레 박물관에 가서 파리의 역사를 되짚어보다

이제는 퐁피두센터로 간다.

파리의 수백 년 된 건물과 수천 년 역사를 훑어보다

파리에서 가장 미래스러운 건물로 가는 것이다.

이 사이에 시간은 수천 년이 놓여 있지만

공간은 걸어서 겨우 10분 남짓이다.

 

 

이 건물은 건물의 안에 있어야 할 것을

이렇듯 밖에 드러낸 특이한 방식으로 지어졌다.

건물 자체가 예술품인 것이다.

 

한때는 궁전 안에 화장실도 짓지 않았다는 프랑스.

겉이 아무리 화려할지라도 배선, 배수, 수도관, 환풍시설이 되지 않는 건물은 무용지물이다.

(빨강, 파랑, 초록, 노랑이 각각의 시설을 상징한다)

프랑스인의 가치관이 100년 사이에 바뀐 것일까?

여전히 프랑스 건물의 화장실은 대부분 지하에 있다.

이유는? 아마도 100년 전 건물을 지금도 그대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었다.

 

내부 또한 완성되지 않은 건물처럼 파이프들이 그대로 드러나 있는데

퐁피두 내부는 자유롭게 공간구획, 배치 등을 새롭게 할 수 있다고 한다.

30년 전에 이런 건물을 짓다니, 지금 봐도 미래에서 온 건물 같은데!

  

중앙에 설치된 화분 모형은 얼마 전

한 금융회사의 광고에 나와서 유명해지기도 한  장 피에르 레이노의 '빅팟'이다.

아래 전시물 사진에 등장할 마르셀 뒤샹의 <샘> 이후 이런 '설치 예술'이 활성화되었다.

 

이곳은 널리 알려졌듯, 파리의 미술/조각/음악/도서 등 문화가 어우러진 공간을 만들고 싶어했던

전직 대통령 퐁피두의 전적인 후원으로 설립되었다.

 

밖으로 드러난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가노라면

파리의 올망졸망한 모습이 한눈에 들어온다.

고도 제한으로 높은 건물이 없기에 누릴 수 있는 특별한 기쁨이다.

퐁피두센터 5층쯤의 높이인데 전망이 이렇게 좋다.

저쪽 맨 위로 사크레쾨르 성당도 보인다.

 

그리고 물론! 에펠탑도 보인다.

에펠탑도, 퐁피두 센터도 지어질 당시에는 사람들의 반대가 심했단다.

이런 흉측한 건물은 고풍스러운 파리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한 것이다.

오오~ 파리지앵도 이렇게 보수적인 때가 있었다.

몇몇 진보적인 선각자가 다수를 반대를 딛고 일구어낸 이 작품들에 경의를!

박물관과 미술관 안에 있는 작품 중 상당수도 제작된 시기에는 야유 받은 일이 많지 않은가.

 

이곳에서 내려다보니 일요일 점심 시간의 퐁피두센터 앞은 여전히 사람들로 북적북적하다.

쉬러 왔거나 구경하러 왔거나 공연 보러 왔거나, 공연을 하러 왔거나

어쨌든 각자의 목표를 갖고 왔겠지만 이들이 한데 모여 연출한 자유분방한 모습이 활기차고 재미있다.

퐁피두센터는 안과 밖이 모두 예술로 가득차 있다.

사진 위쪽의 환기구들도 꼭 마르셀 뒤샹의 설치미술처럼 느껴진다. ^^

 

 

왼쪽은 Marcel Broodthaers의 <salle blanche>이다.

방을 구성하는 가구 등의 물건을 싹 빼버린 채 이름만 써놓았다.

현대 예술은 온갖 철학을 집대성한 장르가 되어 가고 있다.

 

오른쪽은 Fang Lijun의 <무제(Sans titre)>이다(부분 촬영).

중국이 요즘 현대미술의 대안처럼 각광받고 있는데,

그런 계기를 제공한 작가 중 한 사람이 바로 팡 리준이다.

그의 작품 제목이 왜 무제일까? 저토록 많은 사람이 빽빽하게 모여

각각의 표정을 한 채 자신의 얼굴만 내세우고 있는 그림은 사람들의 욕망을 떠올리게 한다.

그의 작품은 왠지 모르게 우스꽝스러운 분위기가 나서 보는 재미가 있다.

지금 이 글을 쓰면서 퐁피두센터의 홈페이지에 들어가 작품들을 다시금 보는 중인데

'무제'라는 제목을 치자 엄청 많은 그림이 검색된다.

아마도 그림에 제일 많은 붙은 제목이 '무제' 아닐까?

작가는 그런 것에 대해 경종(까지는 좀 무리여도), 혹은 장난을 치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왼쪽은 niki de saint phalle <Le mariee>이다.

이렇게 강렬한 작품을 만나면 뭐랄까..

사람들은 대개 이 작품 앞에서 한동안 서 있는다.

나도 그럴 수밖에 없었고 말이다.

이 작가는 20세기가 낳은 최고의 조각가 중 한 사람이다.

(여성 조각가라고 하는데.. 직업 앞에 '여성'이라는 단어를 붙이는 것에 반대한다, 나는. 쩝)

작품 활동 초기에는 매우 전위적인 회화 작업을 하다가(캔버스에 물감을 총으로 쏘아 작품을 했다는)

여성의 몸, 여성성에 대한 것을 주제로 삼아 작품활동을 계속해나갔다고 한다.

이 작품에서 신부의 웨딩드레스는 아이로 구성되어 있다(끔찍!!).

그녀가 생각하는 결혼, 여성의 삶이라는 것이 이런 것이었을까?

 

오른쪽에 있는 Wang du의 <입맞춤(Le baiser)> 역시 충격적이라 쉽게 눈을 떼기 힘들다.

얼마 전 한 친구와 연애 상담을 해주다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세상엔 반드시 일 대 일이어야 좋은 게 있는데,

그중에 하나가 사랑이더라."

사랑이 가장 진실한 가치를 대변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경우가 너무나 많다.

 

(이 외에도 신기하고 재미있고 어려운 현대 예술 작품이 많았으나

나는 일단 그림 위주로 감상기를 써본다.)

 

 

왼쪽은 마티스의 <interieur haune et bleu>이고

오른쪽은 <nature morte a la table de marbre vert>이다.

굳이 화가 이름을 대지 않아도 마티스는 그만의 개성이 아주 뚜렷한 그림을 그렸다.

예전에 <춤>이라는 그림을 보고 그의 팬이 되었는데 이 그림들 역시 색이 너무나 탁월하다.

나야 그림을 보는 눈이 부족하다만,

이 그림에서 색이 만들어내는 리듬감, 조화 등은 어찌 외면할 수 있을까.

 

 

왼쪽은 마티스의 <루마니아 풍의 블라우스(La blouse roumaine)>, 오른쪽은 <liseuse sur fond noir>이다.

마티스는 색깔로 현대미술의 혁명을 일으킨다. 이토록 단순한 스케치에

'과감하다'는 말과 가장 잘 어울리는 색 선택은 무척 흥미롭다.

실제로 그림들을 보면 그 화려한 색감의 조직에 마구 흥분이 된다.

 

 

왼쪽은 루오의 <le clown blesse>이고 오른쪽도 그의 작품들이다.

 내가 방문한 동안 루오의 특별전이 열리는 중이라 그의 작품을 많이 볼 수 있어서 좋았다.

그는 주로 광대 등의 하층민이나 예수님을 그렸는데

그가 그린 하층민은 단지 슬프다는 느낌을 넘어, 뭔가 묘한 감정이 들게 한다.

남을 웃겨야 하는 광대, 자신의 몸을 사용하여 다른 이를 만족시켜야 하는 창녀..

'도구의 인간'으로서 지성이나 신체적인 물리력을 사용하여 생산품을 만들어내는 다른 직업과 달리

몸 자체가 생계수단인 그들에게서만 느껴지는 뭔가 다른 아우라가 있는데

루오는 바로 그것을 잡아서 그림으로 데려온 것 같다.

 

 

왼쪽은 Umbo의 사진 <unheimliche strasse>이고, 오른쪽은 너무나 유명한 마르셀 뒤샹의 <샘>이다.

왼쪽 사진은 이렇게 내가 찍어온 것으로는 그 느낌을 다 담지 못하지만

사실은 정말 특이한 구도의 사진이다.

각자의 그림자가 직각으로 누워 직선을 만들어내고 있는데

그들이 살아 있는 한 언제든 따라다닐 그림자까지 구성하여 이토록 멋진 사진을 만들어냈다.

 

<샘>은 기성품을 예술화한 것이다.

실제 변기를 가져다놓고 '샘(샘솟는다고 할 때의 그 샘이다)'이라 했을 때

사람들이 받은 충격은 얼마나 컸을지 짐작도 되지 않는다.

앤디 워홀이나 요셉 보이스, 백남준 등의 예술가들이 그의 후예라고 할 수 있다.

 

미술에서 '미'란 '아름다움'을 뜻한다.

그러나 저 변기가 아름다운가?

마르셀 뒤샹은 '왜 미술이 아름다워야 하는가?' 하고 되물으며 미술의 정의를 바꾸어 놓았다.

 

하지만 또 한 편으로 생각해 본다.

아름다운 것이 무엇인가?

겉보기에 예쁜 것, 황금비율, 나아가 키 크고 늘씬한 것이 아름다운 것인가?

어려운 예술작품을 보면서 박수 치는 모든 사람들이 다 그 작품의 아름다움을 진심으로 공감하고 있는가?

아니, 저 변기는 왜 아름답다고 느끼지 못하는가? 단지 화장실에 있는 것이기 때문에?

 

뒤샹은 이 논쟁적인 작품을 통해 그런 근본적인 질문을 하고 있다.

 

 

왼쪽은 샤갈의 <le marchand de jouraux>이고, 오른쪽은 <double portrait au verre de vin>이다.

어쩜 저런 표정이 나올 수 있을까? 혹 모델이 있었다면 그는 샤갈의 눈에 어떻게 띄었을까?

결코 드러내고 싶지 않은, 날것의 슬프고 비루한 표정 때문에

그림을 보는 순간 숨이 턱 막힌다.

그리고 생각했다. 나는 살면서 이런 표정을 몇 번이나 지었을까?

모든 것이 피곤하고 희망이 전혀 없어 보이는 표정,

소중한 한 번뿐인 삶이 이렇게 남루해졌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한때는 내 아픔과 불행이 그 누구보다 크다고,

가장 크지는 않아도 누구도 내 아픔과 불행을 이해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그때는 내 얼굴이 어떤 표정을 하든, 내 마음만은 저런 표정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게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내가 엄청 축복받았다거나 그 후로 인생이 잘 풀렸다거나 하는 문제가 아니다.

그냥.. 그렇다는 거다. 삶은 생각보다 길고, 또 생각보다 짧다.

내 나이에 이런 이야기를 하기란 조심스러워서, 그냥 말을 줄인다.

 

다만 요즘 길거리에서 폐지를 줍는 어르신들,

심지어 그 길거리에서 힘겹게 식사 한 끼 드시는 분들 보면 가슴이 너무 아프다.

그분들 표정이 샤갈의 그림 속 노인의 표정과 같지 않을지라도

그냥 가슴이 무너지는 것 같다.

 

짐짓 모르는 척, 폐지나 상자를 내놓을 때 그분들이 집어가기 쉽도록 깨끗하게 접어서 내놓고

노점에서 과일이나 채소 몇 개 사는 것뿐, 나 한 사람의 안타까움은 큰 역할을 하지 못하는 것이 슬프다.

 

그림에서 노인의 뒤쪽으로는 현대적인 건물, 집이나 공장들이 보인다.

그러나 집도 공장도, 그 어느 곳도 노인이 들어갈 곳은 없는 듯

노인은 크고 집들의 입구는 너무나 좁다.

하늘조차 붉어서 그가 마음 둘 곳은 어디에도 없다.

 

오른쪽 그림은 아마도 연인이거나 막 부부가 된 두 사람의 초상인 듯하다.

신기하게도 여자가 남자에게 목말을 태워주고 있다.

아마 샤갈이 결혼하면서 행복한 느낌을 그림에 담았기 때문에 그런가 보다.

 

 

왼쪽은 달리의 <lion, cheval!!!, dormeuse invisibles>, 오른쪽은 <guillaume tell>이다.

자신이 천재임을 스스로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는 달리.

대개 초현실주의 화가는 직관, 꿈(실제로 자다가 꾸는 꿈), 자동기술법(연상법) 등에 따라 그리는데

그래서 그런지 정말 기괴하다. 

 

 

왼쪽은 마그리트의 <les marches de l'ete>, 오른쪽은 <le modele rouge>

르네 마그리트는 같은 초현실주의적인 그림을 그리면서도 철학을 그림에 접목시키는 엄청난 역할을 해냈다.

영화 <매트릭스>에서 검정 양복을 입은 스미스 요원이 여러 명으로 복제되는 것도 마그리트의 그림에서 힌트를 얻은 것이라 한다.

 

그래도 그림이 말하는 바를 알아채기란 역시나 어렵다. 진중권의 <미학 오디세이>를 전권 읽었는데도.. 흠..

 

달리는 자신이 그림의 '창조자'로서 기괴한 장면을 창조해냈다면

마그리트는 '해석자'로서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물과 현상을 재해석하여

새로운 관점으로 그림을 그렸다.

 

 

위의 왼쪽은 피카소의 <figure>, 가운데는 <portrait de femme>, 오른쪽은 <confidences>이다.

아래의 왼쪽은 <la muse>, 오른쪽은 <L'aubade>이다.

 

마티스가 색으로 미술의 패러다임을 바꾸었다면 피카소는 형태로 패러다임을 바꾸었다.

본질을 그려야 한다 -> 보이는 대로 그려야 한다 -> 우리 눈에 비친 것을 그려야 한다

이런 식으로 바뀌어온 패러다임이 피카소에게서는 완전히 바뀌었다.

보이는 그대로 그릴 필요가 없다!

 

이런 개념이 처음 등장했을 때의 충격이란,

마치 뒤샹이 변기를 가지고 와서는

"'샘'이라는 작품입니다"라고 했을 때와 비슷한 충격이 아니었을까?

그럼에도 더욱 놀라운 것은 저렇게 형태가 파괴되었는데도

그림에 나온 모델의 성격이 보이는 듯하다는 것이다.

 

실제로 그림을 마주하고 있으면 그 조형성에 감탄이 절로 나왔다.

 

 

왼쪽은 미로의 <peinture>, 오른쪽은 <낮잠(la sieste)>이다.

미로의 왼쪽 그림을 보는 순간, 만약 퐁피두에서 그림 한 점을 가지라고 한다면

바로 이 그림을 가져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더 좋아할 만한 그림, 신기한 그림도 많지만

이 그림에서 보이는 순수함이 너무나 좋았기 때문이다.

내 방에 걸어놓고 날마다 함께하며 기분이 유쾌해지고 청명해질 듯한 느낌이 든다.

 

세계대전을 거치며 역시 인간이란 믿을 만한 존재가 못 된다는,

기득권을 가진 자들의 뜻대로만 굴러가서는 더 이상 희망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예술가는 초현실주의에서 해법을 찾았다. 이것은 기존의 모든 관습, 인습에서 벗어나

인간을 근본적으로 해방시키고자 하는 움직임이었다.

미로도 초현실주의 화가 중 한 사람으로 분류된다.

역시 예술가는 시대를 읽고 아파하며 인간의 근본 고민을 최전방에서 고민하는 사람들이다.

예술가답지 않은 예술가도 많은 세상이지만 말이다.

  

 

왼쪽은 샤갈의 <le poete mazin>, 오른쪽은 모딜리아니의 <gaston modot>이다.

한 사내를 그렸다는 점에서 소재는 같지만 그들의 성격은 무척 달라 보인다.

일단 샤갈의 그림은 불안정한 구도와 술병으로 보이는 소품 때문에 더 음침한 분위기가 나고

모딜리아니의 그림은 다른 것들과 마찬가지로 고요하게 '존재'하고 있다.

 

시인 마쟁은 샤갈의 절친한 친구였다.

그림에서 마쟁은 커피를 마시며 글을 쓰는(혹은 책을 읽는?) 중이다. 

샤갈은 초상화를 별로 남기지 않았는데, 그런 것을 감안하면

마쟁과 얼마나 친분을 쌓았는지 짐작할 수 있다.

도대체 저렇게 형태가 파괴된 그림으로 어떻게 그의 캐릭터를 드러낼 수 있는 것일까?

캐릭터를 드러내기는커녕 사람을 비슷하게 따라 그리지도 못하는 나로서는.. ^___^;;

 

모딜리아니가 그린 가스통 모도는 프랑스의 배우, 감독, 작가이다.

배우, 예술가라면 격렬하고 열정적인 그림이 연상되는데 이런 고요한 초상화라니.

다만 걷어올린 소매에서 그의 열정이 아주 조금 엿보인다.

 

 

왼쪽은 브라크의 <le duo>, 오른쪽은<femme a la guitare>이다.

예전에도 그의 그림을 보면 항상 음악소리가 들리곤 했다.

어떻게 형태와 색깔로 음악을 그려낼 수 있는 걸까?

 

 

 

왼쪽은 마티스의 <창가의 바이올리니스트(le violiniste a la fenetre)>,

가운데는 <auguste pellerin ll>, 오른쪽은 <figure decorative sur fond ornemental>이다.

왼쪽과 가운데 그림은 저토록 형태를 단순화했으면서도 화가가 그리려 했던 대상이 명확하게 보인다니

다시 한 번 그림의 세계가 얼마나 깊고 놀라운지 생각하게 된다.

 

오른쪽 그림은 마티스 그림의 커다란 특징 중 하나인 '장식성'을 극도로 보여주는 작품이다.

화려한 무늬와 색깔을 단순화된 여성 주위로 배치시킨 것이 무척 흥미롭다.

보통 누드를 그리면 (아니, 그냥 인물을 그리더라도) 그것이 주제가 되어

나머지는 주제를 부각시키기 위해 존재하는데

마티스의 이 그림에서는 다른 것들이 시선을 양보하지 않는다.

마치 예전에 먹었던 과자 '톡톡'처럼(먹으면 입 안에서 톡톡 튀었던 과자)

이 그림을 보고 있으면 눈이 톡톡 자극받는 느낌이 가득 든다.

 

 

위의 조각은 마티스의 <deux negresses>이다. (뒤에 보이는 것도 마티스 그림이다.)

나는 마티스가 조각을 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___^;;

 

 

전시실 한쪽에서 저렇게 파리의 전경이 보인다.

저쪽에 사크레쾨르 성당이 우뚝 서 있다.

 

생각지도 않게, 너무나 기대 이상이었던 퐁피두센터.

그래서 생각보다 오랜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었지만 그래도 행복했다.

기대하고 갔다가 실망하여 나온 뮤지엄이 파리에서는 한 군데도 없었다.

다들 예상 체류시간이 길어졌고, 그만큼 한 곳 한 곳이 '완소' 장소들이었다.

오늘은 뮤지엄 패스 마지막 날이라, 퐁피두센터가 뮤지엄 패스로 입장한 마지막 박물관인데

마지막까지 파리의 박물관들이 실망시키지 않아서 정말 고마웠다.

다음에 파리에 올 때도 꼭 다시 찾아주마! (파리에 다시 갈 기회가 된다면^^)

 

 

그렇게 퐁피두에서 나오니 일요일의 오후, 퐁피두센터 앞은 여전히 들썩들썩한다.

저 오묘한 악기를 부는 아저씨는 얼굴이 빨개지도록 열심이다.

 

 

이 청년들은 특이한 구슬을 들고는 온몸에 돌리는 중이다.

어떻게 저걸 안 떨어뜨리고 계속 움직일 수 있을까?

휘둥그레~

 

 

오늘도 사람들은 퍼포머가 요청하면 기꺼이 앞으로 나가 퍼포먼스에 동참한다.

누구나 박수 치고 웃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나도 박수를 한껏 칠 준비, 크게 웃을 준비를 한 채

퐁피두센터에서 지친 다리를 털썩 주저앉았다.

퐁피두센터는 내부에서도, 밖으로 나와도

예술의 향기가 물씬 물씬 물씬이다!!

 

 


 

<퍼온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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