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암(豹菴) 강세황(姜世晃.1713-1791)
조선후기의 대표적인 문인화가. 詩,書,畵를 잘하는 삼절(三絶)로,
단원(檀園) 김홍도(金弘道-김해김씨), 자하(紫霞), 신위(申緯)의 그림 스승이시다,
자화상
표암 강세황(豹菴 姜世晃) 1713~1791
본관 진주(晋州). 자 광지(光之). 호 첨재(添齋)·표옹(豹翁)·노죽(路竹)·산향재(山響齋)·표암(豹菴). 시호 헌정(憲靖). 어려서부터 재능이 뛰어나, 8세 때 시를 짓고, 13~14세 때는 글씨에 뛰어난 솜씨를 보여, 소년기에 쓴 글씨조차도 병풍을 만드는 사람이 있을 정도였다. 아버지의 사랑과 교육을 받았으며, 매형이었던 임정(任珽)의 영향도 크게 받았다. 처남 유경종 외에도 허필(許佖) ·이수봉(李壽鳳) 등과 절친하게 지냈으며, 이익·강희언 등과도 교유하였다. 당대의 유명한 화가였던 김홍도·신위 등도 그의 제자들이다. 벼슬에 뜻이 없어 젊은 시절에는 주로 작품활동에만 전념하였다.
32세 때 가난 때문에 안산(安山)으로 이주한 뒤에도 오랫동안 학문과 서화에만 전념하였다. 처음 벼슬을 한 것은 61세로, 영조의 배려에 힘입어 관계에 진출하게 되었다. 이후 64세 때 기구과(耆耉科), 66세 때 문신정시에 장원급제하였으며, 영릉참봉·사포별제(司圃別提)·병조참의·한성부판윤 등을 역임하였다. 72세 때 북경사행(北京使行), 76세 때 금강산 유람을 하고, 기행문과 실경사생 등을 남겼다. 시·서·화의 삼절로 불렀으며, 식견과 안목이 뛰어난 사대부 화가였다. 그 자신은 그림제작과 화평(畵評)활동을 주로 하였는데, 이를 통해 당시 화단에서 ‘예원의 총수’로 한국적인 남종문인화풍을 정착시키는 데 공헌하였다.
이밖에도 진경산수화를 발전시켰고, 풍속화·인물화를 유행시켰으며, 새로운 서양화법을 수용하는 데도 기여하였다. 평생 동안 추구한 그의 서화의 세계는 궁극적으로 습기(習氣)도 속기(俗氣)도 없는 경지에 이르는 것이었다. 산수·화훼가 그림의 주소재였으며, 만년에는 묵죽으로 이름을 날렸다.
작품으로는 《첨재화보(添齋畵譜)》 《벽오청서도》 《표현연화첩》 《송도기행첩》 《삼청도》 《난죽도》 《피금정도》 《임왕서첩(臨王書帖)》 등이 있으며, 54세 때 쓴 《표옹자지(豹翁自誌)》에 있는 자화상을 비롯하여 7~8폭의 초상화를 남겼다.
송도기행첩 청청담(松都紀行帖 淸淸潭)
<송도기행첩>의 한 작품으로 선과 색감은 모두 맑고 명랑하며 구도(構圖)도 매우 참신한 시각을 잡고 있다. 바윗더미의 묘사에서는 대담하게 준법(浚法)에서 벗어나서 색채의 농담으로 입체감을 표현했으니 이런 파격적인 입체묘사는 당시 화단에서는 획기적인 의의를 지닌다 할 수 있다.
백석담(白石潭)
강세황의 〈백석담도〉는 강세황이 개성 지방을 여행하고 남긴 《송도기행첩》에 있는 그림 중의 하나로 미법(米法)을 토대로 하여 대담한 시도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넓적하고 각진 계곡 바위들이 강세황에게 무척 인상적이었는지 바위를 크게 부각시켜 표현하였다.
뒤의 낮은 산은 붓을 뉘어 점을 찍듯 미점으로 표현하고 바위는 윤곽을 그리고 엷게 음영을 주었다. 야산과 바위가 대조를 이루는 특이한 형태에 시선이 끌리는 작품이다. <송도기행첩>에 실려 있는데 비 갠 뒤의 투명해진 공기를 통해서 바라다본 백석담의 순간적인 아름다움을 화면에 옮겼음을 제발(題跋)에 의해서 확인된다.
<송도기행첩>은 강세황의 실경산수도 중에서 대표작에 속하는 화첩인데, 이 화첩 중에도 <백석담>은 <영통동구>, <청석담>과 더불어 백미로 꼽히는 수작(秀作)이다. 강세황의 실경산수는 정선의 영향이 역력함을 부인할 수 없으나 그 나름대로 개성과 특성을 갖추고 있다. 수묵 위주로 원근에 따라 농담의 구별이 분명한 묵선, 그 위에 담록과 담청색이 가채되어 밝고 담백한 화면, 나타내고자 하는 목표에 있어 중요부분의 과감한 선택과 생략의 겸비, 산세나 바위 처리에 있어 선염(渲染)에 의한 색의 농도차가 보여주는 입체감 등을 특징으로 열거될 수 있다.
벽오청서도(碧梧淸暑圖) 종이 담채 30cm x 35.8cm 서울 개인 소장
강세황의 〈벽오청서도〉는 그림 위에 '방심석전(倣沈石田)'이라고 밝혀져 있듯이 중국 남종화풍의 기본적인 화보인 《개자원화전》에 실린 심주의 구도를 모방하여 그린 것이다. 한 쌍의 오동나무 밑 초가에 앉아서, 마당을 쓸고 있는 시동을 바라보며 더위를 식히는 선비의 모습을 담고 있다.
초가의 주위는 대나무와 파초가 어울려 있는 매우 멋스러운 곳으로, 앞은 트여 있으면서도 옆에는 형식적인 울타리가 쳐져 있다. 짜임새 있는 구성과 활달하면서도 단아한 필묵법, 그리고 먹과 조화를 이루는 담채의 적절한 사용으로 높은 격조를 이루고 있다.화보 속의 심주를 모방한 것이지만 이를 자유롭게 해석하여 더욱더 높은 경지 위에 올려놓은 작품이다
영통동구(靈通洞口)
강세황의 〈영통동구〉는 강세황이 지금의 개성인 송도 지방의 여러 명승을 두루 여행하고 엮은 《송도기행첩(松都紀行帖)》 17면 중의 하나이다. 화첩의 발문에 가을에 여행하지 못함이 아쉽다고 밝히고 있다시피 모두 여름 풍경이다. 이 기행첩은 날카로운 대상 포착과 대담한 구도, 뛰어난 색채 감각으로 참신하고 개성 있는 필력을 보여준다. 특히 중량감 넘치는 바위의 처리는 서양의 입체 화법(立體畵法)과도 관련이 있는 듯하여 이채로운 분위기를 띤다.
靈通洞口亂石 壯偉大如屋子 蒼蘇覆之 乍見駭眼 俗傳龍起於湫底 未必信 然然環偉之觀 亦所稀有
그림에는 "영통동구에 난립한 바위들이 어찌나 큰지 집채만 하며 이 바위에는 푸른 이끼들이 끼었는데 눈을 깜짝 놀라게 한다. 세속에 전하기를 못의 밑바닥에서 용이 나왔다고 하는데 믿을 만한 것은 못된다. 이 넓은 장관은 보기 드문 풍경이다"고 적혀 있는데, 이는 영통동구의 풍경을 잘 설명해주고 있다. 바위들은 그냥 보아서는 그 크기를 짐작하기 어려운데, 산길을 따라 올라가는 선비나 시동의 크기와 비교해 보면 얼마나 큰지 짐작을 할 수 있다. 산은 윤곽을 그리고 미점으로 산골을 표시하였고, 바위는 이끼 낀 모양인 듯 녹색을 가미해 푸른 느낌을 주면서도 음영을 넣어 바위의 괴량감을 실감나게 묘사하였다
연강제색도(烟江霽色圖)
화면 전체가 우선 왼쪽 위에서 오른쪽 아래로의 넓은 강을 중심으로 대각선으로 분리되고, 전경 왼쪽에 강안(江岸)이 있고 미법수림(米法樹林) 속에 기와집 누각이 보인다.
강 건너 오른편으로 좀 치우쳐, 여름비가 그친 뒤 안개 자욱한 발묵(潑墨)으로 묘사된 산봉우리들이 연이어 솟아오르고 더 멀리 원산의 푸른 봉우리와 산등성이가 아득하게 나타난다. 강 건너 안개 짙은 숲속에 담묵으로 처리한 어촌이 흐릿하니 모습을 드러내고, 그 앞에 짙은 먹으로 다리를 하나 걸쳤는데 수면에 거꾸로 비친다. 강 이쪽에 농묵으로 큼직한 미점(米點)을 찍어 윤기나는 숲으로 가느다란 길이 나있어 누각으로 이어진다.
환갑 지나서야 빛 본 화필 … 18세기 문인화의 절창
[중앙일보] 입력 2013.05.03 01:01 / 수정 2013.05.03 01:03
표암 강세황 탄신 300주년 … 간송미술관·국립중앙박물관 특별전
단풍잎이 드문드문 달려 있는 나무가 계절의 무상함을, 홀로 앉은 노인이 쓸쓸함을 드러낸다. ‘밀려난 자들의 그림’ 남종문인화의 정서가 물씬 풍기는 표암 강세황의 ‘노인관수(老人觀水: 노인이 물을 바라보다)’다. 바위 틈으로 흐르는 물을 바라보는 노인이 표암 자신을 상징하는 듯하다. [사진 간송미술관] 그는 밀려난 이들의 대변자였다. 명문가 태생이었지만 출세길이 막혀 그림 그리는 데 전념할 수밖에 없었다. 호구지책으로 농사를 짓고, 그림을 그리고, 화평을 써주면서 수 십 년간 연마한 실력은 환갑이 돼서야 세상에 드날릴 수 있었다. 60세에 처음 벼슬길에 나섰고, 예원(藝苑·예술계)의 영수로 18년을 더 살았다. 후대는 그를 시서화 삼절(三節)이자, 단원(檀園) 김홍도(1745~1806?)의 스승으로 기억한다.
표암(豹菴) 강세황(1713∼91) 얘기다. 표암이 올해로 탄신 300주년을 맞았다. 그를 기리는 여러 행사 가운데 첫 단추는 서울 성북동 간송미술관이 끼운다.
12일부터 여는 ‘표암과 조선남종화파전’이다. 표암을 중심으로 동년배인 원교(圓嶠) 이광사(1705∼77), 호생관(毫生館) 최북(1712∼86), 제자 세대로 단원 김홍도, 긍재(兢齋) 김득신(1754∼1822) 등 20명의 70여 점을 내놓는다.
다음 달 25일부터는 국립중앙박물관서 ‘강세황: 예술로 꽃피운 조선 지식인의 삶’전을 연다. 간송의 전시가 표암과 그의 시대를 일별하는 입문 성격이라면, 국립중앙박물관의 전시는 표암의 자화상, 당대 최고의 초상화가 이명기가 그린 표암 초상화, 서양화풍을 실험한 표암의 산수화 ‘영통동구(靈通洞口)’ 등 이 박물관이 갖고 있는 표암 관련 대표작을 한껏 뽐내는 특별전이다. 또한 표암의 묘가 있는 충북 진천군에서는 한국미술사학회 주관으로 7월 초 학술대회를 연다.
벼슬 길 막혀 농사 짓기도 … 뒤늦게 출세
71세의 강세황은 만년에야 벼슬아치가 된 자신을 상징하듯, 평복에 관모를 쓴 기묘한 모습의 자화상(보물 제590-1호)을 남겼다.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비범한 출생, 젊은 날의 역경, 강세황도 이런 길을 밟았다. 증조부는 영의정을 지냈고, 종조부는 현종의 부마(임금의 사위)였다. 명문가의 가세는 그의 대에 기울었다. 맏형이 과거 부정을 저지른 데 이어 역모에 가담했다. 입신(立身)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체면을 유지하려면 문인화가로 살아가는 길 뿐. 생계가 어려워 32세에 처가가 있는 안산으로 낙향했고, 여기서 환갑이 될 때까지 농사 지으며 서화를 수련했다.
인생의 전기가 된 사건은 임오화변(壬午禍變), 즉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사망한 일이다. 그날은 표암의 50세 생일, 소식을 들은 표암은 생일상에 고기를 쓰지 않고 소찬만 올리라 했으며 평생 생일을 그렇게 지냈다. 사도세자의 장인 홍봉한이 이런 표암을 눈여겨봤고, 그의 벼슬길을 열어줬다.
정조 또한 그를 배려했다. 아끼는 화원 단원의 스승이자, 부친에 절의를 지킨 이여서다. 표암이 정조 시대 예술계를 주도할 수 있었던 이유다. 일흔이 넘은 표암은 청 건륭제의 생일을 축하하는 사행단으로 북경을 방문, 후에 추사(秋史) 김정희(1786~1856)와 어울리는 고증학파를 알게 되고 서양 문물도 경험한다. 이렇게 해서 그는 겸재에서 추사로 이어지는 교량 역할을 하게 된다.
남종화 추종 … 쓸쓸한 분위기 그림 남겨 표암은 비슷한 이력을 가진 6세 연상의 현재(玄齋) 심사정(1707∼69)에게 공감한 듯하다. 심사정 역시 조부의 과거 부정과 역모로 벼슬길이 막힌 문인화가였다. 진경산수화풍이 한창이던 시대에 태어난 표암이 조선남종화를 추종하게 된 까닭이다.
쓸쓸한 문인화가의 눈길 머무는 곳에는 산수(山水)도, 난죽(蘭竹)도 쓸쓸하다. 이것이 조선남종화의 정서다. 조선남종화가 계승한 것은 명대의 남종문인화, 원말 사대가를 계승한 재야 문인화가들의 사의적 화풍이다. 그렇다면 왜 지금 표암일까.
간송미술관 한국민족미술연구소 최완수 연구실장은 “지금 우리가 처한 입장과 비슷해서”라고 운을 뗐다. “만족의 환희, 실망의 고통, 예술이란 크게 이 두 가지 감정에 공감하는 표현인 경우가 많다. 표암의 경우 후자다. 처한 상황이나, 그림에서 풍기는 쓸쓸한 정조가 그렇다. 성공한 이들보다 실패한 이들이 더 많은 것이 우리의 세상이다. 표암의 그림이 더욱 큰 공감을 얻을 수 있는 이유”라고 설명했다.
간송미술관의 전시는 26일까지, 오전 10시∼오후 6시. 02-762-04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