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경제=김아미 기자]출산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아낙네가 멸치를 팔러 나왔다. 퉁퉁 불은 젖가슴을 드러낸 채 흥정에 여념이 없다. 그 옆에 나물 파는 아낙네는 손님이 내민 돈을 입으로 받았다. 이 억척스러운 여인네들에게서 진한 땀냄새가 난다.
독일 드레스덴 출신 화가인 윌리 세일러(Willy Seilerㆍ1903-?)는 전후 1960년대 한국의 재래시장을 이렇게 압축시켰다. 일본 목판화로부터 영향을 받은 작가는 우연한 기회에 방문했던 한국에서의 강렬한 인상을 사실적이고 섬세한 동판화로 기록했다.
이방인의 눈으로 한국의 옛 모습을 담은 작품들이 ‘가나아트 컬렉션’전에 나왔다. ‘이방인, 조선을 눈에 담다’라는 테마로 외국인이 본 근대 풍물화들이 가나인사아트(서울 관훈동) 전시장 3층에서 소개됐다.
세일러를 포함, 엘리자베스 키스(Elizabeth Keithㆍ1887-1956), 폴 자쿨레(Paul Jacouletㆍ1896-1960), 릴리안 메이 밀러(Lilian May Millerㆍ1895-1943) 등 일본 목판화 기법으로 1920년대 조선을 그린 작품들이 마치 당시의 한국 관광 사진첩을 보는 듯한 생생함을 전해준다.
윌리 세일러, 흥정, 채색 동판화, 21x29㎝, 1960년대 [사진제공=가나문화재단] |
가나문화재단(이사장 김형국)이 개최한 가나아트 컬렉션전은 20세기 초 한국 근대미술을 다양한 장르에 걸쳐 재조명하기 위해 마련된 전시다. 전통을 고수하거나 서구의 영향을 받아 새로운 양식으로 변화를 꾀한 한국 근대미술의 발전 양상을 한 눈에 볼 수 있도록 했다.
엘리자베스 키스, 정월 초하루 나들이, 목판화, 38x26㎝, 1921 [사진제공=가나문화재단] |
가나아트와 서울옥션을 설립한 이호재 가나아트 회장은 상업화랑 경영을 통해 축적한 유ㆍ무형의 자산을 ‘공익화’하기 위한 목적으로 지난해 2월 사재를 출연해 가나문화재단을 설립했다. 이번 전시는 가나문화재단의 이름으로 펼쳐지는 최초의 자료전인 셈이다.
릴리안 메이 밀러, 달빛 속의 한국농가, 목판화, 20.6x31.8㎝, 1928 [사진제공=가나문화재단] |
특히 이번 전시에는 고암 이응노(1904-1989)의 미공개 드로잉이 공개돼 눈길을 끈다. 동양화의 전통을 기반으로 새로운 조형 세계를 구축한 고암의 드로잉 700여점 중 400점이 전시장 4층과 5층을 채웠다. 가나문화재단은 고암이 1960년 프랑스 파리에 정착하기 전까지 그렸던 데생 작업을 모아 ‘고암 이응노 드로잉집 1930-1950s’도 출판했다.
이응노, 나부, 종이 위에 수묵담채, 37x28㎝ [사진제공=가나문화재단] |
이 밖에 전시장 지하 1층에서는 박수근(1914-1965)의 드로잉 35점을 볼 수 있다. 1982년 서울미술관 전시 후 30여년만에 공개되는 작품들이다. 빨래터 아낙네들의 모습을 담은 모노톤의 드로잉이 박수근의 유화작품 ‘빨래터’와는 다른 간결하고 소박한 맛을 준다.
전시는 3월 1일까지.
박수근, 무제, 종이 위에 연필, 12x16㎝, 연도미상 [사진제공=가나문화재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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