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의 전설’ 루치아노 파바로티(2)
황승경│국제오페라단 단장·공연예술학 박사 lunapiena7@naver.com
“내가 왜 탈세자인가?”
대중의 평가는 항상 그에게 너그럽고 후했지만, 음악평론계는 그에게 인색했고 각박했다. 그의 연기는 리얼리티가 결여되고 음악은 세련되지 못하다고 비판받았다. 음악교육을 받지 않은 그가 악보조차 제대로 읽지 못해 본인만의 표기로 기보한다는 사실이 언론에 공개되었을 때에 평단의 비웃음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비판 수위가 정점에 오른 때는 그 유명한 ‘3 테너’ 공연 당시였다. 공연 목적이 아무리 자선기금 모금이었다고 해도 1990년의 첫 번째 공연이 1000만 장의 음반과 700만 개의 영상물로 판매되며 대성공을 거두자 그들도 주머니가 두둑해졌을 것이라고 짐작했다. 이들은 여세를 몰아 1994년 미국 월드컵 결승 전야제에서 다시 ‘3테너’ 콘서트를 열었다. 사실 3명의 테너가 공연을 한다는 것은 레퍼토리 선정에서 그리 녹록지 않다. 각각 독창으로 본인들의 애창곡을 고르고 서로 함께 부르는 곡들은 민요에서 찾다보니 작품의 일관성이 없었다. ‘상업적인 악취가 진동하는 끔찍한 종합선물세트 같다’는 비난을 감수해야만 했다. 그럼에도 그들은 탄탄한 비즈니스로 자신들의 건재함을 만방에 알리기를 원했고 결국 세계 투어를 단행한다.
기억을 돌이켜보면, 필자의 유학생활 당시 이탈리아 성악교수들은 “지구상에는 3가지의 성(性)이 있다. 여자, 남자 그리고 테너(남성 고음파트)”라는 말을 자주 했다. 본인의 소리중력과는 반대로 고음을 내는 테너는 항상 자기 관리에 철저해야 하기 때문에 가늠이 불가능한 질투와 괴팍스러움이 있다는 주장이었다. 특히 감시와 견제를 하는 경쟁의 위치에 있는 테너들끼리 서로 우정을 나눈다는 것도 아주 드문 일이었다. 비록 소리의 질감과 주요 레퍼토리는 다르지만 파바로티와 도밍고는 매년 서로의 레퍼토리를 비교하며 서로를 민감하게 주시했다. 카레라스는 이 두 대가에 비하면 전성기가 매우 짧았고 백혈병으로 투병생활을 했기 때문에 소리가 예전만 못했다. 오히려 혼자 공연을 끌고 가는 것보다는 밀도 있는 집중력으로 몇몇 곡에만 힘을 쏟는 것을 선호했을 것이다. 새로운 2000년의 시대가 오는 시기에 저물어가는 테너들의 노익장이 성공을 거두리라고는 사실 아무도 예상 못했다. 런던공연에서는 2시간 30분 공연 동안 각각 13억 원의 수입을 올렸다. 당시 언론은 ‘한 단어에 70만 원씩 벌었다’며 비아냥거렸다. ‘3테너’의 이름으로 그들은 총 19회 공연을 했고 그로 인한 엄청난 수입은 짐작만 할 뿐 공개되지 않았다. 이들의 성공 이후에 3명의 남자 성악가가 모여 ‘빅3’, ‘스리 테너’라는 타이틀로 합동공연을 여는 것이 일종의 유행처럼 생겨났지만 진정한 ‘원조 빅3’는 변하지 않았다.
성악가가 아니면 체육교사의 길을 걸었을 것이라고 자주 언급했던 것처럼 파바로티는 운동을 아주 즐겼다. 유벤투스의 광팬으로 축구를 즐겼으며, 믿기지 않지만 체중이 130kg 정도 될 때까지는 직접 승마도 했다고 한다. 자동차 운전과 그림 그리기도 좋아했다. 그는 데뷔 당시에 자신의 얼굴에 특징이 없다고 생각해서 수염을 길렀고, 원래 진한 눈썹이지만 항상 아이펜슬로 버릇처럼 수염과 눈썹을 진하게 화장했다. 평상시에는 화려한 스카프와 챙이 달린 흰색 모자를 즐겨 착용했고, 무대에서는 항상 하얀 손수건을 가지고 다니며 자신만의 스타일을 고수했다. 비석같이 움직임이 없는 무대 연기력은 항상 지적을 받았지만 움직이지 않고 표정 연기와 바스트 장면이 많은 영화에는 주연으로 출연하기도 했다.
조리기구가 담긴 가방
해외 연주가 잦은 만큼 그는 항상 이삿짐 같은 짐들을 가지고 다녔다. 가방에는 음식 조리기구와 식재료가 담겼고, 별도의 약 가방도 있었다. 몸이 악기인 만큼 관리를 잘해야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할 수 있으니 당연한 가방이었다. 과체중으로 신경통을 비롯한 많은 합병증이 생겨서 주의를 요했으니 약가방도 필수였다. 그래서 이를 관리하는 비서들의 역할이 아주 중요했고, 여비서들은 파바로티와 은밀한 관계로 발전했다.
1961년 결혼한 아내 아두아는 고향에서 조용하게 아이들과 함께 머물며 사업적인 동지로 파바로티의 모든 것을 눈감아주었다. 그러다 파바로티와 35세나 차이 나는 비서 니콜레타 만토바니와의 스캔들로 이탈리아가 시끄러웠다. 하지만 파바로티도, 아두아도, 니콜레타도 모두 불륜을 부정하며 사건은 일단락됐다. 그러나 1996년 어느 연예잡지에 파바로티와 니콜레타가 해변에서 격정적인 키스를 나누는 장면을 포착한 파파라치의 사진이 대서특필됐다. 필자도 파바로티의 이름이 실려 그 잡지를 구입했는데, 연인이 아니라면 할 수 없는 몹시 ‘친밀한’ 행동들이었다. 혹자는 니콜레타가 계산적으로 언론에 흘렸을 가능성을 강하게 의심했으나 어쨌든 사진이 공개된 지 한 달 만에 파바로티와 아두아는 합의이혼을 했다.
2000년 아두아는 법정투쟁 끝에 이미 성인이 된 3명의 딸의 양육비를 포함해 1억2000만 달러(당시 약 1120억 원)의 위자료를 받았다. 하지만 이혼 후에도 아두아는 여전히 고향 모데나에서 파바로티의 부모님과 3자녀와 함께 살면서 파바로티의 명성으로 하던 사업에서 손을 떼지 않았다. 2003년 파바로티는 니콜레타와의 사이에서 딸 엘리스를 얻었고 그해 12월 이혼숙려기간이 지나자 니콜레타와 결혼식을 올린다.
그의 건강은 예전 같지 않았고 오페라 전곡을 소화하기는 무리였지만, 2003년 그는 15년 전에 1시간이 넘는 박수갈채를 받았던 독일 베를린 도이치오퍼에서 오페라 ‘토스카’를 공연했다. 2004년에는 자신이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극장에서 오페라 ‘토스카’를 무난히 공연했다. 전성기의 체력도 음성도 아니었지만, 그는 자신의 모든 혼을 불사르며 환상적인 연주를 선사했다. 관객들은 열화와 같은 박수갈채로 답했지만 그도, 관객도, 다른 연주자들도 이 무대가 본 극장에서 들을 수 있는 마지막 파바로티 자취라는 것을 알고는 눈시울을 붉혔다.
파바로티는 12년 동안 10회의 ‘파바로티와 친구들’이라는 자선 콘서트를 인구 18만 명의 고향인 모데나에서 개최하면서 모데나를 국제적인 음악도시로 알렸다. 다이애나와 달라이라마는 물론 마이클 볼튼, 스파이스 걸스, 셀린 디옹, 본 조비, 스티비 원더, 리키 마틴, 머라이어 캐리 등 팝계의 수많은 별을 출연자로 초청해 크로스오버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물론 음악적으로 많은 부작용이 있었으나 이를 크로스오버라고 장르를 구분해서인지 음악평론계에서의 반발은 거세지 않았다.
행사는 비교적 성공적이었으나, 후원사인 이탈리아 국영방송국 RAI에서 지원금을 축소하자 2003년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공연을 열지 못했다.
2006년 토리노 동계올림픽 개막식에서 오페라 투란도트에 나오는 칼리프 왕자의 아리아 ‘공주는 잠 못 들고’를 부르고는 파바로티는 무대에서 영원히 내려왔다. 5개월 뒤 악성췌장암 수술을 받았지만, 이듬해 세계를 호령하던 거장은 이탈리아 페사로에서 사망했다. 오스트리아 빈의 국립오페라극장은 입구에 검은 천을 내렸고, 메트로폴리탄 오페라극장은 무대 커튼을 검은 천으로 바꾸어 달았다. 고향 모데나의 대성당에서 열린 장례미사에는 29년 전 파바로티가 같은 장소에서 아버지 페르난도와 듀엣으로 부른 ‘생명의 양식’ 영상을 보여주며 거장의 퇴장을 추억했다. 네 살짜리 막내딸 알리체가 “계속 나를 지켜달라”는 조사를 낭독할 때는 장내가 숙연해졌다. 포도주는 항상 고향 모데나산을 고집할 정도로 고향에 애착을 가졌던 그는 고향의 가족묘지에서 평온한 휴식을 하고 있지만 그가 한 획을 그은 성악의 대중화라는 혁신적인 변화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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