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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의 전설’ 루치아노 파바로티(1)

조용한ㅁ 2016. 7. 10. 01:28
20세기의 전설’ 루치아노 파바로티(1)
                                                                   황승경│국제오페라단 단장·공연예술학 박사 lunapiena7@naver.com


 

루치아노 파바로티, 플라시도 도밍고, 호세 카레라스는 ‘빅3 테너’로 불린다. 1990년 로마월드컵 결승전 전야제 때 이 3명의 테너가 고대 로마의 카라칼라 욕장에서 벌인 역사적인 ‘3테너’ 공연은 지금도 많은 음악 애호가의 가슴에 감동으로 남아 있다.

 

특히 육중한 몸매에서 뿜어 나오는 천상의 목소리에 덥수룩한 구레나룻이 제법 잘 어울렸던 파바로티는 성악의 대중화를 이끈 ‘빅 테너’로 평가받는다. 2007년 영면에 들 때까지 세계 최정상의 테너로서 활동하며 성악을 대중화한 불세출의 스타는 이제 ‘20세기의 전설’로 남았다.

 

루치아노 파바로티(Luciano Pavarotti·1935~2007)는 이탈리아 중북부의 모데나에서 빵가게를 하는 아버지 페르난도와 담배공장에 다니는 어머니 아델레 사이에서 1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당시 모든 이탈리아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파바로티도 어린 시절을 파시스트와 레지스탕스의 대결 속에 어수선하게 보냈다.

 

파바로티의 아버지는 전쟁이 끝나자 숙원이던 합창단 활동을 재개했다. 그는 먼 곳에 있는 극장에 아들을 데리고 가는 열성팬이자 아마추어 테너였다. 빵가게와 가정에는 항상 음악이 넘쳐났고, 그도 아들과 함께 축음기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따라 불렀다. 파바로티 음악세계의 자양분이었다. 파바로티는 누가 보아도 기골이 장대하고 기운이 넘쳤다. 부전자전(父傳子傳)일까. 파바로티는 어릴 적부터 성악에 두각을 나타내 아버지와 함께 아마추어합창단과 교회성가대에서도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하지만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에는 진로를 선택해야 했다. 그러자 아버지는 지금까지의 태도와 달리 직업 성악가의 길을 가려는 아들을 말렸다. 누구보다도 아름다운 소리를 가지고 있었지만 가장의 책임감 때문에 그 길의 선택하지 못한 아버지는 성악가의 길이 험난하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결국 아버지의 반대로 체육교사가 되려던 아들의 마음을 잡아준 사람은 어머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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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험설계사 파바로티

 

당시 이탈리아 국민은 잔인한 전쟁의 참상을 겪은 뒤였다. 마음의 치료가 필요했다. 사람들은 오페라극장으로 몰려갔고, 자연히 오페라가수는 최고 인기를 누렸다. 파바로티는 어머니의 든든한 지원사격 덕에 아리고 폴라, 에토레 캄포갈리아니 교수를 사사할 수 있었다. 생계를 위해 초등학교 보조교사와 보험설계사로 아르바이트를 했다. 특유의 친화력을 앞세운 인간적인 매력을 발산하며 많은 여성 고객을 유치해 보험업계에서 ‘정규직 러브콜’을 받기도 했다.

 

단역이지만 꾸준하게 일이 맡겨지자 그는 미련 없이 보험설계사를 그만두고 성악에만 전념했다. 동갑내기 ‘절친’인 소프라노 미렐라 프레니는 일찌감치 데뷔해 세계 유수의 극장 무대에 올랐지만 파바로티는 북부 이탈리아의 작은 극장의 조역으로 만족해야 했다. 당시를 회상할 때 파바로티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당시에는 깜깜한 미래에 대한 불안감으로 조마조마했지만 한숨 푹 자고 일어나거나 맛있는 음식을 배부르게 먹으면 모든 것이 잘될 것만 같은 긍정적인 믿음이 생겼다. 그래서 음식을 좋아하기 시작했다.”

 

물론 그를 이끈 원동력은 꾸준한 노력이었겠지만 이 말은 밝고 낙천적인 성격과 음식을 사랑하는 그의 절대미각을 보여준다. 1961년 모데나 극장에서 오페라 ‘라보엠’으로 성공적인 데뷔를 한 그는 승승장구해 단숨에 세계를 아우르는 테너로 발돋움했다. 그러나 보이지 않게 서로 으르렁거리는 무대 위의 암투가 데뷔 전의 불안감보다 그를 더욱 초조하게 했는지 그는 맛있는 음식에 더욱 의지했다. 나날이 살이 쪘다. 몸무게가 180kg이라는 소문이 무성할 정도로 건강에 심각한 위기가 왔지만, 초창기의 파바로티는 무대를 꽉 채워주는 건실하고 듬직한 테너임은 분명해보였다.

 

리처드 보닝과의 만남


파바로티의 경력에 날개를 달아준 사람이 리처드 보닝이라는 지휘자였다. 비범하고 특출한 테너임에는 틀림없었지만 갈 길이 멀었던 파바로티에게 보닝은 1963년 호주 투어를 제안했다. 보닝은 지휘자이자 피아니스트이며 무시하지 못할 제작자이기도 했다. 보닝은 부인인 소프라노 준 서덜랜드의 파트너를 할 만한 테너를 찾고 있었다. 신장이 180cm 정도 되는 그의 부인은 최고의 찬사를 받으며 음악계의 주목받는 소프라노였다. 소프라노 중에서도 높은 음색을 가진 레제로 파트였다. 그런데 비슷한 음색의 상대역 테너들은 키가 작았다. 아무리 키높이 구두를 신겨도 사랑의 이중창을 할 때면 소프라노의 머리가 하나 더 있는 것처럼 보였다. 멀리서 보면 세기의 연인이 아니라 자애로운 어머니로 보여 극적 현실감이 떨어졌다. 마침 혜성같이 등장한 ‘하이 C의 제왕’ 파바로티는 다른 테너가 어려워하며 부르길 꺼리는 하이 C음, 즉 ‘C4(가온 도)’에서 두 옥타브 위의 C6(높은C, 도)음을 자유자재로 내는 음역을 가지고 있었다. 테너가 낼 수 있는 가장 높은 음역을 ‘하이 C’라고 한다. 안정적으로 내는 하이 C는 좋은 테너 여부를 판가름하는 잣대다. 파바로티는 ‘하이 C의 제왕’이라고 불렸을 정도였다.

 

파바로티의 음색, 레퍼토리, 180cm의 신장까지 모든 면에서 서덜랜드의 상대역으로 손색이 없었다. 이후 찰떡궁합을 과시하며 둘은 세계를 누비며 30년 가까이 노래를 불렀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파바로티는 더 이상 프리마돈나의 비호를 받는 초보 테너가 아니었다. 상황이 역전되어도 보닝 부부는 파바로티를 30년 전 파바로티로 대우해 그들의 관계는 삐꺽거리기 시작했다. 1990년대 후반부터는 왕래조차 하지 않았다. 그로부터 10여 년 후, 이미 거동이 불편하고 생명이 4개월도 안 남은 시점에서 파바로티는 거주지에서 차로 1시간 거리의 볼로냐에 공로상을 받으러 온 서덜랜드에게 진심으로 축하하는 영상을 보냈다. 세 사람은 다시 45년 전 처음 만난 날처럼 신뢰와 존중의 관계로 해후했다.

 

파바로티는 일생 동안 뉴욕의 메트로폴리탄극장에서 379회, 이탈리아 밀라노의 스칼라극장에서 140회, 런던의 코벤트가든에서 96회 등 세계 최고의 극장을 두루 섭렵했고, 수많은 진기록을 낳았다. 1988년 독일 베를린 도이치오퍼에서 도니제티의 오페라 ‘사랑의 묘약’의 아리아 ‘남몰래 흘리는 눈물’을 불렀을 때는 무려 1시간 7분 동안 박수가 이어져 무대 인사를 165번이나 해 기네스북에 올랐다. 그는 100여 장의 앨범을 취입했으며, 1991년 런던 하이드파크 공연에서는 비를 맞으면서도 찰스 황태자-다이애나 부부를 비롯한 15만여 명의 관객이 자리를 지켰고, 2년 후 뉴욕의 센트럴파크 공연에서는 그의 노래를 듣기 위해 50만 명의 관객이 몰려들었다. 불후의 명화 ‘티파니에서 아침을’을 연출한 블레이크 에즈워드 감독은 “꾀꼬리와 쥐들도 파바로티의 노래를 감상하기 위해 센트럴파크로 왔다”고 평가할 정도였다. 이후 30만 명의 파리 시민 앞에서 성공적인 야외공연을 이끌며 가장 대중적인 성악가가 되었다.

 

그런 그에게도 실수는 있었다. 1983년 스칼라극장에서 오페라 ‘람메르무어의 루치아’ 공연 중에는 심오하고 애달픈 아리아 대목에서 음이 틀려 관객들의 야유를 받았고, 1992년에는 스칼라극장의 개막 오페라인 ‘돈 카를로스’를 공연하면서 악보를 외우지 못해 ‘버벅대던’ 사건도 있다. 그러나 일생 동안 그의 과오에 대한 비난은 오래가지 않았다. 1983년 세금 때문에 주소지를 몬테카를로로 옮겨 영주권을 획득했을 때에도, 1992년 모데나에서 자신이 주최해 연 ‘파바로티와 친구들’ 공연에서 사상 초유의 립싱크를 했을 때도, 심한 여성 편력이 기사에 오를 때에도, 탈세로 기소당해 벌금형을 선고받았을 때에도 비난 여론은 들끓었지만 모두들 그에게 ‘마에스트로’라는 존칭은 잊지 않았다.

 

이탈리아는 공인의 탈세에 대해서는 엄격한 잣대로 처벌한다. 최고의 여배우 소피아 로렌도 1980년대에 탈세 혐의로 17일 동안 구치소에 수감된 적이 있었다. 2000년 250억 리라(한화 약 150억 원)의 벌금을 납부하면서도 파바로티는 강력하게 반발했다.

 

“탈세자는 국내에서 돈을 벌어 외국으로 빼돌리는 파렴치한들에게나 하는 말이고, 나는 1년에 300일을 외국에 머물며 성실히 돈을 벌어 국내에 가지고 왔다. 내가 왜 탈세자인가?” 그는 너무나 명료하고 당당하게 주장했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