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연잎 접듯/ 유재영
어린 구름 배밀이 훔쳐보다 문득 들킨
고개 쳐든 자벌레 이끼 삭은 작은 돌담
벽오동 푸른 그림자 말똥처럼 누워 있다
고요가 턱을 괴는 동남향 툇마루에
먹 냄새 뒤끝 맑은 수월재 한나절은
바람이 연잎을 접듯 내 생각도 반그늘
차 한 잔 따라 놓고 누군가 기다리다
꽃씨가 날아가는 방향을 바라본다
어쩌면 우리 먼 그때, 약속 같은 햇빛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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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날의 달개비꽃/ 유재영
고향 울안 어디서나 피다 지는 꽃이 있다
헤어지고 오던 날 남겨 둔 하늘처럼
유난히 동맥이 파란 몸매 야윈 그 아이
소꿉놀이 지치고 흙담 아래 주저앉아
그렇지, 도란도란 눈도 멀고 귀도 멀던
살며시 단발머리에 얹어주던 청보라
희미한 옛 시간도 꼭 쥐면 물이 들까
꽃 속에 있던 아이 어디에도 없는데
부르면 나올 것 같은 어린 날의 달개비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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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눈/ 유재영
잎새만한 작은 교회
헐거운 풍금소리
흐릿한 등불 아래
무릎 꿇은 두 그림자
그들의
야윈 어깨에
가만히 와 얹히는 손,
첫눈 내린 교회마당
누가 다녀가셨을까
처음 보는 발자국이
너무 크고 깊어서
별처럼
은그릇처럼
오래도록 반짝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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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구빛 저녁/ 유재영
외로움도
마주치면
별빛보다
아름다워
인간사
슬픈 꿈이
팔할쯤
머문 자리
꾸불텅
텅 빈 공간이
긴 목으로
서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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