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글/시

그 어느 겨울 소묘

조용한ㅁ 2005. 12. 29. 04:20

       

 

                                                                            그림 조용한

                                                                                          -oil on canvas   4F--

-내 인생의 그림-

                                        글   _moon river_

 

언젠가, 꽃다운 20대 처녀이던 시절,
눈이 너무너무 많이 내려 쌓인 날 밤이었다.
대학원을 다니던 시절이라
월요일과 화요일 이렇게 이틀동안 밤 시간에 들어있는 수업을 듣기 위해,
하염없이 내려 쌓이는 눈에도 불구하고
지친몸을 이끌고 어둑해지는 밤 시간에 학교에 갔다.

교정에 들어서는데,
텅 비어버린 교정은 온통 눈밭으로 변해 있고,
어느새 나는 그 눈밭위를 걸어가고 있는
단 하나의 점이 되어 있었다.

낮시간동안 아르바이트를 하느라고 집을 비우느라,
눈 때문에 강의 취소되었다는 전화를
미처 받지 못했던 탓이었다.

내가 다녔던 대학은 교정이 아름답기로 이름난 곳이었다.
마치 동화속에 나오는 집들 같은 벽돌집 강의동,
교정을 빽빽하게 둘러싸고 있는 장한 나무들,
교정전체를 일년 사시사철 푸르게 지키고 있는
넓디넓은 잔디밭...

그 모든 것들이 눈속에 파 묻혀 있는데,
나를 완전히 압도시켜버릴 정도로 아름다웠다.
그래서 나는 집으로 되돌아 갈 생각을 하지 않고,
차에서 내려 그 눈밭 속을 혼자서 걸어가기 시작하게 되었다.

누군가가 그 광경을 보았더라면
아름다운 한점의 그림같았을 것이다.

고려청자에 새겨진  물찬 학같이 날씬한 20대 뇨자 유학생이,
압도적인 아름다움으로 반짝거리고 있는
눈밭위를 혼자서 걸어가고 있는 그림......

그렇지만,
그때 내 마음속은 무겁디 무거운 삶의 무게에 짖눌려
너무나 어두웠었다.

마치
잔가지위에 내리고 또 내려서
마침내 그 연약한 잔 겨울가지를
꺽어버리고야 말겠다는 듯
하염없이 쏟아지던
함박눈송이들 처럼,
내가 완전히 쓰러져 포기할 때 까지,
중단하지 않겠다는 듯,
내 어깨위에 차곡차곡 쌓이기만 하고 있던 삶의 무게...

그날밤, 눈밭 위에서,
왼쪽, 오른쪽,
발자국을 뒤로 하고 걸어가면서,
유학 온 이래 처음으로
남의 눈치 볼 필요 없이,
원없이,
실컷 울었다.

그 아름다운 그림은
실은 이렇게 슬픈 이야기를 담고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까,
그때까지 울 기회가 없었다.
영어로 강의듣고, 시험치고, 논문쓰고,
발표하고, 친구들 사귀면서
공부하기도 힘들었고,
공부해서 학점 따기만도 정신이 없는데,
비싼 딸라 학비 조달해 대기도 힘겨웠고,
의지할 곳 없이 외롭기 짝이 없다는 사실만으로도,
정말 힘들었다.
그치만,
역설적으로 그렇게 힘들수록,
울 시간, 울 여유는 더더욱 없었다.
일하고 지친 몸으로집에 돌아와
밤 늦은 시간 잠 잘 틈도 없이,
영어로 원서를 읽고 그것을 근거로 논문을 쓰고 하다 보면
때로 눈물이 찔끔찔끔 흘러도,
울고 앉아있을 여유마저 없어
눈을 깜빡깜빡거리며 눈물을 말려가면서
한 밤을 꼬박 지새워야 했던 시절이었으니까.........


...................

지금 이 늦은 밤에 혼자 잠 못 이루고,
혼자서 커피 마시면서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때로는
아름다워 보이는 그림이
실은 무척 슬픈 이야기를 담고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
그런가하면,
무척 슬퍼 보이는 그림이
실은 압도적으로 아름다운 이야기를 담고 있을 수도 있을거라는 생각......

오늘밤, 나는
내 인생 이야기가
실은 아름다운 이야기인지,
실은 슬픈 이야기인지,
그것을 곰곰히 생각해보느라,
잠 못 이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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