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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글/시

늦은 답장 / 길상호


      늦은 답장 -시 길상호 낭송 솔롱고스 이사를 하고 나서야 답장을 씁니다 늦은 새벽 어두운 골목을 돌아 닿곤 하던 집 내 발자국 소리에 설핏 잠에서 깨어 바람 소리로 뒤척이던 나이 많은 감나무, 지난 가을 당신 계절에 붉게 물든 편지를 하루에도 몇 통씩 마루에 올려 놓곤 했지요 그 편지 봉하기 위해 버려야 했던 잎들은 모아 태워도 마당 가득 또 쌓여 있었습니다 나 그 마음도 모르고 편지 받아 읽는 밤이면 점점 눈멀어 점자를 읽듯 무딘 손끝으로 잎맥을 따라가곤 했지요 그러면 거기 내가 걸었던 길보다 더 많은 길 숨겨져 있어 무거운 생각을 지고 헤매기도 하였습니다 당신, 끝자리마다 환한 등불을 매달기 위해 답답한 마음으로 손을 뻗던 가지와 암벽에 막혀 울던 뿌리의 길도 보였습니다 외풍과 함께 잠들기 시작한 늦가을 그 편지는 제 속의 불길을 꺼내 언 몸을 녹이고 아침마다 빛이 바래 있었습니다 덕분에 나 폭설이 많았던 겨울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오늘은 집에 돌아오는 길가 마늘밭에서 지푸라기 사이로 고개 내민 싹들을 보았습니다 올해는 누가 당신의 편지 받아 볼는지 나는 이제 또 다른 가지를 타고 이곳에 와서 당신이 보냈던 편지 다시 떠올립니다
 
감자의 몸 / 길상호
 

감자를 깎다 보면 칼이 비켜 가는
움푹한 웅덩이와 만난다
그곳이 감자가 세상을 만난 흔적이다
그 홈에 몸 맞췄을 돌멩이의 기억을
감자는 버리지 못하는 것이다
벼랑의 억센 뿌리들처럼 마음 단단히 먹으면
돌 하나 깨부수는 것 어렵지 않았으리라
그러나 뜨거운 夏至의 태양에 잎 시들면서도
작은 돌 하나도 생명이라는
뿌리의 그 마음 마르지 않았다
세상 어떤 자리도 빌려서 살아가는 것일 뿐
자신의 소유는 없다는 것을 감자의 몸은
어두운 땅 속에서 깨달은 것이다
그러고 보니 그 웅덩이 속에
씨눈이 하나 옹글게 맺혀 있다
다시 세상에 탯줄 될 씨눈이
옛 기억을 간직한 배꼽처럼 불거져 있다
모르는 사람들은 독을 가득 품은 것들이라고
시퍼런 칼날을 들이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