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흐와 고갱
<아를의 여인>
고갱이 아를의 고흐에게 온지 2주가 지나서 두 화가는 밖에 나가 주로 경치를 그렸는데 어느
날? 인물의 초상화를 그리기로 했다.
그 대상은 반 고흐가 아를에 처음 왔을때 묵었던 라가르 카페의 주인 지누 부인이었는데 지
누 부인은 반 고흐가 이곳에 정착 할 수 있도록 많은 도움을 주어 고흐가 항상 고맙게 생각
하고 있었다.
반 고흐는 지누 부인에게 아를 지방의 전통 민속 옷을 입도록 부탁했고 그녀는 손님이 없는
오전시간을 택해 모델 서는것에 응하고 카페의 탁자에 나와 있었다.
이를 보고 있던 반 고흐는 방 안에서 책을 몇권 들고 와서 한권은 부인의 앞에 펴 놓고?나머지는 그 옆에 놓았다.
이 광경을 바라본 고갱은 이맛살을 찌푸리며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고 술집 여주인을 그리는
데 왜 그 옆에 책을 그것도 누더기가 된 책들을 갖다 놓는가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에 아랑곳 하지 않고 반 고흐는 부인을 그리기 시작했다.
평상시에는 반 고흐는 책에는 영원과직결되는 깊은 향수를 느끼게 하는것이듬뿍 담겨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자기가 좋아하고 고마움을 느끼는 지누 부인을 아무것도 없는 탁자에서 자세를 취하
게 하기 보다는 비록 낡은 책이라도 옆에 둔다면 평상시에는 느낄수 없는 표정을 그녀에게
서 느낄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고흐는 지누 부인을 45분만에 완성한 초상화를 그려냈고 그러나 고갱은 그림을 그리지 않고
지누 부인을 스케치 한후 그 구도만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림 해석>
똑같은 모델을 놓고 같은 장소에서 그렸는데 고흐와 고갱의 그림은 완전히 딴판이다.
고갱은 숄의 둥근 곡선과 함께 넓은코, 완만한 눈썹, 턱까지 둥그스름해서 반 고흐의 지누
부인의 뽀족한 턱과 코, 각진 눈썹등 모든선이 날카로운것과는 대조를 이룬다.
또한 고갱은 실존하는 인물을 무시하고 지누 부인의 초상화를 <아를의 밤의카페>라는 제목
의 그림으로 바꾸어 놓았다.
그래서 지누 부인이 앉아 있는 탁자 위에는 책이 아니라 술병이 놓여있다.
그것도 싸구려 압생트의 술병과 술잔이다.
그녀는 카페 탁자 위에 앉아 손님들을 곁눈으로 보고 있다.
부인의 뒤에는 당구대가 있고 그 뒤 벽을 따라 일렬로 앉아 있는 손님들이 보이는데 이 손님
들은 반 고흐가 좋아서 모델로 삼았던 사람들이 등장하고 있다.
고갱은 이 사람들을 그리면서 경멸이 깔려 있는 의도로 그린듯한 모습이 깔려 있다.
고갱이 베르나르에게 보낸 편지에 의하면 이 그림에 앉아 있는 여인들은 창녀들이라고 했다.
?유화로 옮겨진 그녀는 눈을 가늘게 뜬 채 입술을 좀더 옆으로 당겨 냉소적인 미소를 짓고
있어 마치 뒤에 앉아 있는 여인들의 뚜쟁이처럼 보이기도 한다.
또 창녀들과 같이 술을 마시는 이는 바로 반 고흐가 좋아하는 우체부 조셉 룰랭이다.
반 고흐는 룰랭이 술을 많이 마신다는것을 알면서도 그의 해박한 지혜와 풍부한 인간성을 존경하였다.
고갱이 그런 룰랭을 창녀들과 희희낙낙하는 졸부로 둔갑시킨것은 반 고흐가 다정한 아버지
상으로 이상화한 룰랭의 이미지를 깍아 내린 것이다.
그리고 술에 취해 옆 탁자에 쓰러져 있는 사람은 반 고흐의 친구이자 가끔 같이 그림을 그리
곤 했던 프랑스 군인 밀리에이다.
사실 룰랭이 창녀들과 술을 마시거나 밀리에가 술에 취해 스러져 있던 적은 한번도 없었다.
고갱은 이 카페안의 사람들을 모두 타락한 인물로 묘사하면서 반 고흐가 소중히 여기는 사
람들을 모독하는 것으로 무시무시한 인간의 욕망을 드러냈고 이로써 두 화가의 갈등의 싹이 트기 시작했다.
하지만 고흐는 이런 그림을 그린 고흐의 의도를 눈치를 챘지만 고갱이 이곳에 온지 얼마 되
지 않기 때문이라고 애써 이해하고자 했고 <화가공동체>실현이라는 원대한 목표를 더 중요하게 생각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해바라기는 여름 꽃이다.
아를 지방에서 여름이면 해바라기 밭에 꽃이 만발하여 일대 장관을 이룬다.
그러나 고갱이 아를에 온것은 10월 말이기 때문에 해바라기 꽃은 다 시들 무렵이고 반 고흐
의 아틀리에는 말라빠진 몇송이 해바라기 만이 꽃병에 있었을 뿐이다.
고흐와 고갱은 지누부인과 롤랭 부인의 초상화를 같이 그리게 되었는데 얼마되지 않아?
12월 초순에 고갱은 고흐에게 그림 한점을 그려서 주었다.
그것은 바로 <해바라기를 그리는 반 고흐> 였다.?해바라기를? 그리는 반 고흐를 가까이에서 그린 이 그림은 한 눈에 그리 이상한 점은 있어 보이지 않는다.
고갱이 이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시기는 날씨가 차가워져 야외 활동을 중단하고 방안에서
초상화를 그리던 무렵이다.
한데 고갱은 이 그림에서 반 고흐와 전혀 다른 방식으로 해바라기를 표현했다.
꽃잎이 다 떨어진 커다란 해바라기는 커다란 눈처럼 보인다.
역설적으로 반 고흐보다 해바라기가 더 눈을 크게 뜨고 있다.
이에 반해 반 고흐의 눈은 뜬것인지 감은 것인지 알 수 없고 눈 주변의 처리 때문에 멍한 표정으로 보인다.
그리고 ?고갱은 이젤과 반 고흐의 오른팔이 삼각형을 이루게 하여 반 고흐가 좋아한 V 자 구
성으로 표현을 한 것 까지는 괜찮았는데? 그런데 반 고흐가 들고 있는 붓은 보통 붓과는 달
리 너무 가늘어서 붓이 아니라 마치 바늘을 들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또 이젤뒤의 벽에는 푸른나무 비슷한 고갱의 대형 풍경화가 보이고 이 그림의 소실점이 반
고흐 위에 있어 그림이 사람을 억누르고 있는 듯하다.
또 뒤돌아 놓아 화면이 보이지 않게 너무 얇게 그려져 있는 반 고흐의 캔버스에 있는듯 없는
듯하여 그림을 그리는것 같지 않다.
이렇게 이 그림에는 미묘하게 반 고흐를 낮추고 자신을 높이려는 고갱의 의도가 숨어 있었다.
이 그림을 본 고흐는 어이가 없어 했는데? 그저 그림 앞에 서 있었을 뿐이었다고 한다.
이에 고갱의 그림에 대한 의도를 파악한 반 고흐는 조용히 물었다.
"이것이 나인가? "
"그래, 자네 아니면 누구겠는가? "
그러자 잠시후 고흐는 낮게 말했다.
"이것이? 분명 나라면 제 정신이 아닌 나로군"
그러자 고갱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해바라기를 열심히 그리는 자네에게 경의를 표하느라고 그린 것일세"
반 고흐는 고갱이 자기의 재능을 이용하여 가혹하게 장난을 쳤으며 자신에게 도전한 것이라 생각했다.
아무리 예술적 표현은 자유라고 하지만 이것은 지나치게 고흐 자신이 농락 당한거라고 생각했다.
그림에는 표현하는 사람의 주관이 담긴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아는 고흐는 더 이상 그림에 대
해 불만을 나타낼수 없었고 하지만 감정을 억누르는데도 한계가 있는 법이니 지누부인의 그
림에 이어 고갱의 표현이 가혹하다는것은 고흐에게 굴욕감을 안겨줬을 것이다.
그래서 고흐는 고갱과 같이 카페에 가서 압생트를 마시다 술잔을 고갱에게 던지는 것으로
불만을 표시했는데? 아를에 와서 주량이 줄었던 고흐가 고갱이 온 후로는 다시 예전처럼 술
을 그것도 독한 압생트를 많이 마시게 되었는데 그것은 고갱의 그림이 화근이 되었다고 보는것이 맞을 것이다.
그 후 이 그림에 항의하는 의미에서 고흐는 자기의 자화상중에 가장 날카로운 눈을 한 자화
상을 그리게 되었는데 이 자화상은 그의 왼쪽 귀가 그려져 있는 마지막 자화상이 되었다.
반고흐의 뛰어난 솜씨와 번개같이 그려 버리는 결단력에 자존심을 다쳤던 것을 복수하려고
지누 부인을 그리면서 초상화가 아닌 <아를의 밤의 카페>로 둔갑시켜 반 고흐의 주변 사람
들을 저속한 인물로 만들었던 고갱은 반 고흐가 기분이 상한 것을 알아채서인지 그 후에 그
린 룰랭 부인의 초상화를 그릴때는? 정상적인 초상화를 그리기도 했다.
서양의 모던아트는 고갱과 고흐로부터 시작된다. 탁월한 아카데미 출신 화가도 많았고 대가의 수제자들도 많았지만, 흥미롭게도 두 아마추어 화가가 모던아트의 지평을 열었다. 두 사람은 산업사회에서의 부르주아 중심의 비인간적 예술에 반발하며 하층민의 삶과 문명에 오염되지 않은 인간 본연의 모습을 각자의 고유한 상징 그리고 표현양식으로 그려냈다. 모던아트의 특징은 표현이었고 고갱과 고흐의 개성적 표현은 20세기 예술가들에게 규범이 되었다.
물 같은 성격과 불 같은 성격
● 폴 고갱과 빈센트 반 고흐는 우리에게 한 쌍으로 기억된다. 두 사람이 함께 작업한 적이 있고, 회화에 관해 논쟁하다가 서로 미워한 적이 있으며, 쌀쌀맞은 고갱의 태도에 화가 치밀어 고흐가 분을 삭이지 못하고 자신의 귓불을 잘라 창녀에게 크리스마스 선물로 준 해프닝 때문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두 사람에 의해 회화가 전통과 단절하고 근대에 들어설 수 있었기 때문이다. 파리에는 전통과 권위를 자랑하는 최고의 미술학교 에콜 데 보자르가 있었고, 명망 있는 대가의 문하생들도 많았지만, 가난하고 충분히 교육을 받지 못한 아마추어 두 화가가 그들 모두를 제치고 근대회화를 보여준 것은 여간 통쾌한 일이 아닐뿐더러 두 사람의 노력이 피땀으로 얼룩져 있어 생각할 때마다 가슴에 전율이 생긴다.
● 두 사람의 성격은 물과 불 같아 도저히 화해할 수 없는 기질이다. 고흐보다 5살 많은 고갱은 인습타파주의자였으며, 빈정거리는 말을 했고, 냉소적이었으며, 궤변을 일삼았고, 무심하며, 상대방을 자신의 손아귀에 넣어야 직성이 풀리는 너무 성격이 강한 사람이었다. 반면 고흐에게는 북유럽 특유의 거친 면이 있었지만 천성이 열심히 노력하는 기질이었고, 동료에게 격정적인 애정을 쏟는 불같은 사람이었으며, 우정을 위해서는 목숨이라도 내어줄 듯하지만 버림을 받게 되면 자신을 괴롭히는 매우 내성적인 사람이었다.
?
외로운 죽음
● 고흐에게는 간질병이 있었다. 간질 증세가 나타날 때 그는 소리를 듣고 영상이 눈앞에 어른거린다고 했다. 작가 귀스타브 플로베르는 “진주는 조개의 병의 결과이며 스타일은 대단한 고통의 산물이다”라고 했는데 고흐에게 어울리는 말이다. 그는 발작하게 되면 공간이 보인다고 했는데 그 공간이 작품에서 노란색으로 나타났다. 노란색은 그가 즐겨 사용한 고흐의 색이다. 노란색의 상징적 의미를 알면 그의 회화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발작을 일으켜 병원에 격리되기 전 1888년 12월과 이듬해 초 그의 그림에서 노란색이 배경으로 현저하게 나타난 것을 볼 수 있다.
● 고흐는 1년 동안 요양원에 격리되었고 병세가 호전되어 파리 근교 오베르로 갔다. 그가 그림을 그릴 수 있었던 것은 동생 테오가 매달 생활비를 보내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생이 결혼하고 자식을 낳자 형을 부양하기 어려워졌다. 고흐는 동생에게 경제적으로 부담을 주는 데 대해 늘 괴로워했고 결국 동생의 짐을 덜어주기 위해 1890년 7월 27일 오베르 근교 성곽 뒤로 가서 권총으로 자신을 쏘았다. 그는 37해 생을 쓸쓸히 마감했고 오베르 공동묘지에 묻혔다.
● 고갱은 문명이 인간성을 파괴한다고 비판하면서 생의 후반을 프랑스 식민지 타히티 섬에서 지냈다. 말년에 걸작 「우리는 어디서 왔으며, 누구이고, 어디로 가는가?」를 그렸는데, 이 물음은 그가 평생 자신에게 그리고 관람자에게 물었던 화두였다. 그림에는 신생아로부터 늙은이까지 인생의 파노라마가 펼쳐져 있다. 인생의 수수께끼를 상징하는 대작이다. 그는 1903년 8일 동안 집에 혼자 있었는데 4월 30일 갑자기 어지럽고 경련을 이기지 못해 커다란 소리로 이웃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는 밤낮을 구별하지 못하고 헛소리를 지르다가 뇌일혈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마르키즈 군도의 한 섬 히바오아 공동묘지에 묻혔고 묘비도 세워지지 않았다
'아름다운글 > 수필.기타'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길따라 가며 읽는 詩 (0) | 2011.08.09 |
---|---|
고흐와 해바라기 (0) | 2011.08.03 |
오월가 (0) | 2011.07.21 |
어느 집 며느리의 고백 (0) | 2011.07.02 |
기탄질리 (0) | 2011.06.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