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대 원(1921~2005)
이대원 화백은 이중섭, 박수근, 장욱진과 함께 한국적 구상의 명맥을 잇는 매우 중요한 작가이며,
1930년대부터 2005년 눈을 감는 순간까지 70여년간 쉼없는 작품활동으로
한국 현대미술사에 길이 남을 수많은 작품을 남겼다.
한국 현대미술의 1세대에 속하는 이대원 화백은 1921년 파주 문산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으며,
제2고등보통학교 재학 때 조선미전에 연속 입선해 화가로서의 재능을 확인했다.
그러나 그는 부모의 반대로 경성제대 법문학부로 진학하였으나,
이후 화가의 길로 들어서 홍익대 초대 미대학장, 총장, 예술원 회장을 지냈으며
그는 50, 60년대 구상화 보다는 모노크롬이나 미님멀리즘이 압도하던 경향에 흔들리지않고
산과 들, 연못 등 자연풍경을 지속적으로 그려왔다.
이러한 그의 작품을 접한 프랑스 미술평론가 피에르 레스타니는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이대원은 동시대 한국화가들 중 서양미술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은 사람이다.
그러나 그의 나무 그림은 한국 수묵화 전통도 계승하고 있다는 점에서 독보적이라 할 수 있다.
‘화단의 신사’라고 불리웠던 그는 경성제국대학(서울대의 전신) 법대 출신으로
정규 미술교육을 받지 않은 특이한 이력을 지녔지만, 누구나 존경했던 인품과 해박한 지식,
앞선 안목과 끊임없는 작품 활동 때문에 후배 작가들에게 존경받는 인물로 기억되고 있다.
이 화백은 작가로서뿐만 아니라, 자신의 역량을 최대한 발휘하여
한국미술의 역사 속에서 다방면으로 중요한 역할을 한 미술인이다.
1950년대 당시 5개 국어에 능통한 유일무이한 지식인으로서 해외에 한국 미술을 알리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고,
대한민국 외교통상부 문화홍보 대사로서 활동, 말년에는 한국대사관 내 한국미술 알리기에 힘썼다.
끊임없이 바라보는 자연을 화폭에
초기의 일부 정물화나 풍물화를 제외하곤 근 50년 동안 화가 이대원씨가 그린 그림은
전부가 자연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그는 끊임없이 자연을 그려 왔다.
그것도 꾸며진 것이나 거창한 것을 상대로 그린 것이 아니고
산과 나무, 못과 풀섶처럼 그야말로 있는 그대로의 자연을 대상으로 그려 온 것이다.
그는 늘 되풀이되는 화제와 모티브로 늘상 똑같은 그림을 그려온 것 같이 들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이와 같이 아주 자연스러운 자연을 가장 자연스럽게 보이도록 그리기 위해
수없이 같은 대상을 그릴 때, 마다 새로운 그림으로 그리려 노력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일을 가능케 하기 위해 그는 여러 조형적 사고와 표현방법을 모색하였으며
그 같은 과정이 바로 다름 아닌 그의 화력의 역사를 이루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
‘제한된 소재를 계속 그리는 일에 싫증이 나지 않는가’
라고 묻는 사람이 있는데, 나는 오히려 제한된 소재 속에서
더욱 다양하고 열정적인 경험을 하고 있다고 대답하곤 한다.
나무는 삶의 방향으로 가지를 뻗는다.
나뭇가지는 생명의 선이다.
- 작가의 말
그 스스로도 말한 바 있다.
"늘 같은 것을 보아도 화가의 눈에는 항상 다르게 보입니다." 라고,
그림 속에는 늘 같은 하늘 아래, 같은 산과 나무, 풀섶을 그려 넣더라도
그것은 이미 같은 형태, 같은 색채, 같은 시각이 아닌 다르고 새로운 화면으로 형성되어 나오는 것이다.
그가 그림을 통해 추구하려 하는 것은 결코 우연한 자연의 일부를 화폭에 베껴놓는 일에 있는 것이 아니고
자연이 지니고 있는 가늠할 수 없는 차원의 실제를 화폭에 회화적으로 재발견하는 일에 있다.
자연대상을 응시하고 파악하여 그때 그때마다
마지막 단계에서 터득하게 되는 응집된 표현방법을 실현시켰다..
사계절에 따른 변화에서 새삼스러운 애착을 느낀다.
평범하기만 한 야트막한 산과 논,
그리고 나무 하나하나가 각기 독특한 애정으로 손짓해 부른다.
산 ,나무, 흙 속에서 우러나오는 무한한 생명력에
압도당하는 것 같기도 하다.
나 하나의 조그마한 생의 미약함을 새삼스럽게 느낀다.
무한한 형태, 무한한 색채를 이 조그마한 눈 머리 손을 가지고서는
도저히 정복할 수 없음을 깨닫는다.
자연의 힘에 새로운 마음의 눈이 열리는 것 같다.
나는 한 그루 나무, 한 포기 풀, 한 줌의 흙을
사랑스러운 마음과 두려운 마음으로 바라보며,
이들은 깊은 곳으로부터 내 화심(畵心)을 이끌어내고 있다.
- 1975년. 작가의 말
바르고 지워가는 사이에 색면과 그 위에 칠하는 색점, 이들이 어울려서
그 위에 더 색필선의 속도에 따라 새로운 요소, 즉 대담한 운동감 속도감을 가함으로서
더욱 살아있는 자연의 힘을 전하게 되었던 것이다.
거칠 만큼의 색필선을 개별적인 대상의 형태감을 넘어서서
화면을 크게 지배하며중심적인 요소로서 부각되게 된다.
그의 그림은 의도적이 아닌 것 같이 보이게 하는 그의 의도가
얼마만큼 자연의 실체에 가까운 것이었나를 알수 있다.
'인왕산' 캔버스에 유채 200×500cm 2000
그림을 여유있게 즐기는 마음으로 행하였으며 그 마음까지를 그의 그림은 전한다.
'농원연작' 캔버스에 유채 112×162cm 1980
얼핏 보기에 평범한 것 같은 이 작가의 그림 속에 나타나는 구도를 보면
그것이 얼마나 단순하면서 다양한 효과를 내고 있는가 하는 점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가 있다.
상식적이지않는 시점과 범상치 않는 구도 설정은 그의 그림에
아주 단순하면서도 참신한 맛을 보태주는 역할을 가지게 한다.
순수하고 생동감 넘치는 색채 1980년대 그의 순수하고 밀도 짙은 감정표현과 독특한 기법은
1980년대 중반 이후 더욱 생동감 넘치는 색채로 지향되어 독창적인 화법을 완성시켰다.
그가 주로 사용하는 주제인 과일나무와 농원시리즈, 연못 풍경 등은 반복적인 화면이면서도 변화 있는 구도로 강렬하고 선명한 색채의 생동적인 붓놀림을 나타내고 또 다른 내면세계의 조화로운 풍경으로 거듭 그려지는 것이다.
그의 특이한 소박주의와 토속성은 현대적 양상의 비 자연주의의 수법들이 범람하면서
상실하게 된 한 고귀한 진실을 지탱시켜 주고 있는 것이다.
'농원연작' 캔버스에 유채 112×162cm 1984
“늘 같은 것을 보아도 화가의 눈에는 항상 다르게 보입니다.” 작가의 말
'농원연작' 캔버스에 유채 112×162cm 1992
'사과나무' 캔버스에 유채 27×84cm 1961.
'국화' 캔버스에 유채 100×80cm 1962
전통적 미의식과 한국적 감성의 표출 우리의 고화, 민화 민예품 등에 애정을 가지고 있던
이대원은 1960년대 전통적 미의식과 미의 유산의 본질을 자신의 현대적 화면에 도입하려고 시도했다.
'정물' 캔버스에 유채 45×65cm 1965
이 시기 그는 서예와 이조의 수묵화, 중국 청 초에 간행된 <개자원화전(芥子園畵傳)> 등의 묘화법 등을 배워,
1960년대 이대원은 민화 풍의 시도와 유채로서의 문인화 전통의 묵화 형식 계승하고
1970년대 동양적 혹은 한국적 감성 표출을 위한 점묘다채 수법을 통해 한층 독자성을 키워나갔다.
언덕위의 파밭 캔버스에 유채 38×45cm 1938
소박한 구도와 세련된 단순성 이대원은 1938년 17살의 나이로
조선미술전에 입선하면서 어릴 적부터 미술에 대한 남다른 재능을 보였다.
하지만 집안의 강한 반대에 부딪혀 미술공부를 할 수 없게 된 그는
대학에서는 법학을 공부하면서도 작품활동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의 작품활동에서 초기에 해당하는 이 시기의 작품에서도
그의 뛰어난 색감과 자유로운 붓 놀림을 찾아 볼 수 있다
창변 1965
약력 및 수상
홍익대학교 교수(1967년~)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초대학장(1972년~1974년)
홍익대학교 총장(1980년~1982년)
홍익대학교 명예교수(1986년~2005년)
한국박물관회 회장(1987년)
대한민국예술원 회장(1989년,1993년)
미술의 해 조직위원장(1995년)
외교통상부 문화홍보대사(2002년~2004년)
대한민국예술원상
국민훈장 목련장
오지호 미술상
전두환 전대통령 압류미술품 중 연희동 거실에 내걸렸던 이대원의 회화 농원. 120호. 1987년작.
6억6천만원에 낙찰됨.